<79화>
* * *
오를레앙 공작성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고성 특유의 고색창연한 모습이었다.
거대한 규모의 공작성에는 공작가 직계가 사용하는 본관을 중심으로, 기사들의 연무장,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별관, 거대한 정원, 온실 등등이 딸려 있었다.
햇빛을 머금은 공작성이 장엄하게 나를 굽어본다.
‘여기서 지크프리트가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거지?’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작님과 노공작님, 그리고 공녀님을 뵙습니다.”
노공작과 가주의 귀환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지크프리트가 사용인들을 마주하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군. 잘 지냈나?”
동시에 사용인들이 우르르 지크프리트에게로 몰려들었다.
“도련님! 아니, 이제는 도련님이 아니라 가주님인가요?”
“근 10년 만에 뵙는군요. 이렇게 몸 건강히 계신 모습을 뵈니 감개무량합니다.”
“다섯 마왕을 토벌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다들 지크프리트를 대하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다.
아무래도 지크프리트는 어렸을 적, 공작성 사람들에게 꽤 사랑받고 살았던 듯한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더니,
“나를 부르는 호칭은 가주님이든 도련님이든 맘대로 하고. 이리 와라, 타티아나.”
내 시선을 느낀 지크프리트가 내게 손짓했다.
“아, 네!”
나는 도도도 지크프리트 곁으로 다가갔다.
날 제 앞에 세운 지크프리트가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내 딸이다.”
형형한 금안이 사용인들을 응시했다.
마치 눈빛으로 ‘내 딸 귀엽지?’라고 묻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반응이 뒤이어 이어졌는데.
“세상에, 이분이 공녀님이신가요?”
“어쩜,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다들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혹시 지크프리트가 눈빛으로 협박이라도 하고 있나?’
나는 힐끔 지크프리트를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반응이 격렬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이렇게 귀여우신 분이시라니, 여러모로 도련님께는 과분한 따님이 아닌가 싶은데…….”
“아, 다들 시끄럽군.”
내게 쏟아지는 칭찬을 흐뭇하게 듣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그 말에는 정색을 했다.
동시에 할아버지가 시큰둥한 어조로 지크프리트에게 말을 붙였다.
“지크프리트, 나는 일을 보러 갈 테니 너는 아이 좀 보고 있거라.”
“아, 그럼 저도 돕겠…….”
“아니, 그럼 우리 손녀를 혼자 두겠다는 소리냐?”
할아버지가 정색하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셨다.
“절대 따라오지 말고 타티아나나 잘 챙겨라. 알겠어?”
“…….”
지크프리트가 황당한 얼굴로 멀어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집사가 지크프리트를 향해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너무 당황하지 마십시오. 오랜만에 가주님께서 돌아오셔서 기쁘셔서 저러시는 겁니다.”
“그…… 저렇게 대뜸 짜증을 내시는 게?”
“먼 길을 오셨으니, 굳이 일을 하시기보다는 푹 쉬시라는 뜻이죠.”
집사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모두 저녁식사가 준비될 동안 방에서 좀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는 어쩌고 싶지?”
“저, 공작성 구경하고 싶어요!”
나는 해맑게 대답했다.
설마하니 공작성까지 바르톨로아의 영향에 놓여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뭔가 수상한 점이 잡힐지도 모르잖아?
“알았다. 자, 손.”
지크프리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냉큼 그 손을 맞잡았다.
* * *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크프리트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그런지 꽤 편안해 보였다.
공작성은 굉장히 넓고 화려했다.
몇 개인지 모를 거실이며 응접실, 손님용 침실, 화려한 예술품들이 곳곳에 배치된 용도를 모를 방…….
수상한 점을 찾아보겠다는 처음의 목적까지 잊고, 신이 나서 구경하다가.
나는 그만 완전히 지쳐 버렸다…….
“이런, 이리 와라.”
그를 눈치챈 지크프리트가 나를 달랑 안아 들었다.
“힘들지? 간식이나 먹으러 갈까?”
일단 뭐, 지금까지 수상한 부분이라거나 마기를 느끼지는 못했으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하여 우리는 주방에 도착했다.
저녁식사 준비를 한창 하고 있어서인지, 주방에는 훈훈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도련님! 아니, 가주님!”
주방하녀들이 반갑게 지크프리트를 맞이했다.
지크프리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도련님이라고 불러도 돼. 그보다 타티아나에게 코코아나 한 잔 주겠나? 마시멜로 띄워서.”
“마시멜로요?”
“그래. 아이가 마시멜로를 좋아하거든.”
……정말로 내 취향을 기억해 주고 있구나.
나는 조금 가슴이 뭉클해졌다.
동시에 하녀들이 내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날이 추운데 침실에 계시지 않고요.”
“공작성 구경 중이에요!”
“어머나, 그러셨어요?”
하녀들의 얼굴 위로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어떤가요, 구경은 재미있으셨나요?”
“네! 방이 엄청 많았어요!”
“그러셨군요.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서도, 어렸을 적 모험을 하겠답시고 방을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셨는데…….”
으잉? 지크프리트가?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지크프리트를 돌아보았다.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좁히며 항변을 했다.
“……도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건가?”
“어머, 어렸을 적 일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하녀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다른 하녀가 분주히 코코아를 만들면서,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도련님도 샌드위치라도 좀 만들어 드릴까요?”
샌드위치?
순간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하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훈련하시다 말고 몰래 간식을 드시러 오셨잖아요, 노공작님께서 훈련 좀 그만 빼먹으라면서 쫓아오고는 하셨는데.”
“정말요? 아빠가 그랬어요?”
“……저건 다 거짓말이다, 타티아나.”
지크프리트가 정색을 했다.
하지만 어느새 목뒤가 붉어진 것을 보아하니, 신빙성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닌 듯한데.
난 지크프리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기해.’
지크프리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집 안 탐험을 한다거나 훈련을 빼먹는 등.
어린아이다운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그러던 중.
‘어라?’
나는 주방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나무상자들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식료품을 배송할 때 쓰는 상자들인 것 같다.
그런데 상자에 새겨진 이름이 어째 눈에 익었다.
<린츠.>
‘린츠상단이 공작가의 주거래 상단이라더니, 공작성에서 사용하는 일상물품까지 다 공급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의문에 오래 잠겨 있을 수는 없었는데.
“공녀님, 코코아 드세요!”
하녀가 따끈한 코코아가 담긴 컵을 내게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네!”
나는 그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 마시멜로를 띄운 코코아는 못 참지!
* * *
다음 날.
나와 지크프리트,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외출했다.
지크프리트가 아주 오랜만에 공작령으로 귀환했으니, 영지를 시찰하며 무언가 어려움이 없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평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공작령 외곽이었다.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이 쌓인 농가의 풍경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노공작님!”
때마침 공작가의 마차를 알아본 농민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잘 지냈나?”
먼저 마차에서 내린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늙수그레한 농민에게 말을 붙였다.
“그럼요. 어째 여기까지 오셨습니까요?”
농민 또한 수더분하게 웃어 보였다.
저렇게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이인 것 같다.
“아이고, 바닥이 온통 진흙탕인데 내리셔도 됩니까? 신발이 더러워질 텐데요.”
요 며칠 바닥이 얼었다 녹으면서 땅이 진흙 범벅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자네들도 밟고 다니는데 뭘 그러나.”
오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솔직히 값비싼 부츠에 진흙이 묻는 게 좋을 리 없잖아?
진흙은커녕, 비료를 섞인 물에 젖었다며 팔팔 뛰어 댔던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어쩜 저렇게 남매가 다를 수 있담?’
내가 속으로 쯧쯧 혀를 차던 차.
“타티아나, 이리 오거라.”
지크프리트가 나를 안아 들고 마차 밖으로 발을 디뎠다.
“요새 뭐 힘든 건 없나?”
“아, 별 건 아니고 곡물창고에 쥐가 좀 끓습니다. 쥐약을 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 알겠네. 전체 농가에 배부하도록 하지. 다른 건?”
농민과 한참 대화를 나누던 할아버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미간을 좁히며 잔소리를 한다.
“날이 찬데 뭐하러 내렸느냐.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