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 *
할아버지는 나를 겨울옷으로 꽁꽁 싸매고, 그도 모자라 커다란 털모자까지 뒤집어씌운 후 온실로 향했다.
“하아.”
나는 커다랗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마셔서 그런 걸까?
어쩐지 공작성에 있을 때보다 숨을 쉬는 게 더 편한 느낌이었다.
“춥지는 않으냐?”
“그럼요.”
나는 방긋 미소 지었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모자까지 쓰고 있는데, 추우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 아닌가.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래도 추우면 꼭 말해라, 알았지?”
정말, 누가 부자 아니랄까 봐.
잔걱정이 많은 모습까지 지크프리트를 닮았다.
할아버지는 정원을 가로질러 온실로 향했다.
온실 안에 들어서자, 바깥과는 전혀 다른 따스하고 습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와, 너무 예뻐요.”
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갖가지 희귀한 식물들도 물론 흥미로웠지만, 그보다는 새로 심은 듯한 꽃들에게 더욱 눈길이 갔다.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흰색, 분홍색…….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형형색색의 화려한 색깔, 그리고 꽃 품종명이 적힌 아기자기한 팻말들까지.
정말로 나를 위해 하나하나 신경 써서 준비한 게 확연히 티가 나서.
“…….”
나는 조금 울컥해졌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말을 붙이셨다.
“아가,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이냐. 응? 어디 아파?”
“아니요, 하나도 안 아파요.”
나는 버릇처럼 고개를 가로젓다 말고 멈칫했다.
‘아니, 잠깐만.’
순간 나는 경악했다.
‘정말로 하나도 안 아프잖아?!’
제멋대로 들끓어 오르던 마기는 그저 고요했다.
바늘 수천수만 개가 내장을 찔러대는 듯한 통증도, 귓가에서 윙윙거리던 이명도 모조리 사라졌다.
‘뭐지?’
공작성에서 주기적으로 상태가 완화될 때에도, 마기가 모조리 가라앉지는 않았다.
다만 그 기세가 약해졌을 뿐.
하지만 지금은…….
‘마치…… 마기 폭주가 완전히 진정된 것 같아.’
나는 경악을 애써 억누르며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아까 전과 지금을 비교해 봤을 때, 달라진 건 단 하나.
장소뿐이었다.
‘내내 앓아누워 있던 탓에, 공작성 밖으로 나온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러고 보면 공작성 본관에서 나왔던 직후, 숨을 쉬기가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다.
그렇다면 공작성에서 모종의 영향을 받아서 내 마기가 폭주한 걸까?
공작성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나는 내가 앓아누웠던 그 시기와, 그 당시에 내 신변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를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앓아누웠던 당일, 린츠 상단주를 만났어.’
그리고 상단주가 새벽에 물품들을 공작성으로 들여보낸다고 했었고.
나한테는 인형을 하나 선물했…….
‘이럴 수가.’
그 순간.
난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인형이 내 곁에 없었다.
* * *
나는 당장 지크프리트를 찾아갔다.
그 와중, 공작성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시 온 몸의 마기가 들끓는 게 느껴져서.
‘하, 정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타티아나, 무슨 일이지?”
의사와 함께 있던 지크프리트가 나를 돌아보았다.
탁자 위에 수많은 약재들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 약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뭉클해졌으나.
‘아냐, 지금은 한가하게 감동받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마음을 다잡은 내가 종종걸음으로 지크프리트 곁으로 다가갔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내게?”
“네. 첫째 아빠랑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요.”
내 대답에, 지크프리트는 단박에 의사를 돌아보았다.
“잠시 자리를 피해 줄 수 있겠나?”
“예, 알겠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단둘만 남자, 나는 일단 지크프리트에게 내가 눈치챈 현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처음 앓아누웠던 때는 새벽녘이었고, 린츠 상단에서 새 물건이 들어온 시간도 새벽녘이었다는 것.
공작성 밖으로 나가자마자, 내 마기가 순식간에 진정되었던 것.
평소 나는 린츠 상단주가 선물로 준 인형을 끼고 다녔으나, 온실을 방문할 때에는 인형을 놓고 갔던 것까지.
고작해야 열한 살짜리 어린아이의 의구심임에도, 지크프리트는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러니까 린츠 상단의 물건들이 의심스럽다는 거지?”
지크프리트가 진중한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나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다. 넌 일단 쉬고 있거라.”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지크프리트는, 그대로 방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공작성 내부를 사용인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혹여나 린츠 상단에서 알아챌 것을 염려했는지 무척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세상에.’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져서는,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물건들을 끌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크프리트의 명령을 받은 사용인들이, 린츠 상단에서 공급한 모든 물건들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하, 정말로 이거였나?”
물건들의 전수조사를 마친 지크프리트가 날선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앞에는 몇몇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나비와 덩굴무늬가 우아하게 그려진 꽃병, 탁상시계, 손바닥만 한 액자…….
그 중에는, 지금 지크프리트의 손에 들린 내 인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가 막혀서.”
지크프리트의 손아귀 안으로, 귀여운 강아지 인형이 와작 구겨졌다.
“마족들 중에, 이딴 물건들을 만들 수 있는 인재가 아직도 남아 있었던 건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응?”
뒤늦게 합류하신 할아버지가 당황하여 질문을 던졌다.
지크프리트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이 물건들, 마족의 손이 닿은 물건입니다.”
“마족의 손이 닿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경악한 할아버지께서 두 눈을 부릅뜨셨다.
“하지만 내게는 마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
“그럴 수밖에 없지요. 마기를 교묘하게 숨겨 놓았거든요.”
지크프리트가 서늘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저와 아버지가 마기를 느낄 수 없도록 술식을 걸어 두었어요.”
“그게 무슨…… 아니, 그보다 넌 그걸 어떻게 눈치 챈 게냐?”
“한계 이상의 마력을 흘려 넣어서 술식을 깨뜨렸습니다.”
“…….”
“…….”
순간 나와 할아버지는 상황의 심각성조차 잊고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렇잖아, 마력량이 어마어마한 지크프리트나 할 수 있는 무식한 방법인걸.
잠시 후.
할아버지가 표정을 정돈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 술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도?”
할아버지가 멈칫하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는 다섯 마왕을 토벌하여, 인류를 구원한 세 용사의 일원이었다.
그런 지크프리트조차 알 수 없었던 거라면.
“네.”
고개를 끄덕인 지크프리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인간들 중에서는, 키리오스 정도만이 이런 술식을 걸 수 있을 겁니다.”
“그, 그 정도야?”
“예. 아버지뿐 아니라 제 감각까지 속이지 않았습니까? 이런 술식은 극히 희귀해요.”
지크프리트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저도 간신히 감각을 속이는 술식이라는 것까지만 눈치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감각을 속이는지, 이 물건이 무슨 기능을 가졌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네가 알아내지 못할 정도라면, 확실히 대단한 술식이기는 하구나.”
할아버지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지크프리트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솔직히 이런 술식을 구현할 수 있는 마족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다섯 마왕 외로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리고 난 지크프리트의 저러한 반응에서 다시 한번 확신을 얻었다.
‘술식을 구현한 이는 아마도 바르톨로아의 가주겠지.’
세 용사와 비견해도 모자라지 않은 초고위 마족.
마계의 영원한 2인자, 바르톨로아 일족.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는 아마도, 이 마기들에 영향을 받아서 요 며칠간 앓아누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일단 마기가 인간의 몸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기도 하고…….”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나에 대해 적당히 둘러대 주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저 정도의 미약한 마기는 곧잘 견뎌내지만, 타티아나는 기존에도 워낙에 몸이 약했기에 영향 받은 게 아닐까 싶어요.”
나는 힐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별다른 의심 없이 믿으시는 듯하다.
“그렇다면.”
잠시 머뭇거리던 할아버지가, 간절하게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저 물건들을 치우면, 더 이상 아이가 아플 일은 없는 것이냐?”
“…….”
제 아버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지크프리트가, 안심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예, 제 추측으로는 그렇습니다.”
“……다행이구나.”
그 대답을 듣고서야, 할아버지는 확연히 안도한 표정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