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기뻐.’
뭐랄까, 나를 저렇게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새삼스럽지만 가슴이 따스해진다.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정말로 할아버지와 손녀가 된 것만 같아서…….
“일단 아버지께서는 물건들을 추려서 키리오스에게 보내 주십시오. 자세한 건 그 녀석이 더 잘 알겠지요.”
“그러도록 하마. 그런데 넌?”
“저는, 지금부터.”
지크프리트가 싸늘하게 선언했다.
“린츠 상단에 다녀오겠습니다.”
* * *
지크프리트가 린츠 상단 본점을 급습한 때는, 슬슬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이른 저녁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아, 수레는 그쪽에 두면 안 되지!”
“장부 속 숫자랑 그릇 개수가 안 맞는데? 이거 그릇 어디 갔어?”
“그렇게 짐을 내려놓으면 어떡해? 물건들 다 깨지면 자네가 책임질 거야?!”
린츠 상단 본점은 짐을 나르는 일꾼들, 장부를 들고 물건을 살피는 중간관리자, 짐마차와 말까지 뒤섞여 온통 분주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사나운 걸음걸이로 본점에 다가왔다.
일꾼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분은…….”
새카만 머리카락.
고귀한 핏줄을 증명하는 금빛 눈동자.
신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조각상처럼 수려한 얼굴.
“오를레앙 공작님…… 아니신가?”
지크프리트였다.
다만 이상한 건, 귀족 중의 귀족인 그가 수행원조차 없이 혼자 본점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지크프리트가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금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나는가 싶더니.
쿵!!
온 세상이 흔들렸다.
동시에 사람들은 제 어깨 위로 묵직한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꼈다.
흡사 거대한 손이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기라도 하듯이.
“헉!”
“이, 이게 뭐야!?”
사람들은 기절할 것처럼 놀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 무게가 어찌나 무거운지, 저절로 무릎이 꺾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애써 그 무게를 버티며, 간절하게 지크프리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이, 일단 이것 좀……!”
지크프리트는 싸늘한 얼굴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쿵!!
재차 사람들의 어깨에 무게가 더해졌다.
“억!”
“자, 잠깐!!”
어마어마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눈동자로 지크프리트를 올려다본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이 힘의 주인은 바로, 지크프리트.
인류를 구원한 용사의 것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절박하게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귀기 어린 금안이 이쪽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쉬었다.
“어, 어라?”
“으아아……!”
사람들의 얼굴 위로 점차 공포가 번져 가기 시작했다.
본능이 그들에게 속삭였다.
눈앞의 남자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감히 범접할 수도, 손을 댈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그 무언가가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들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금껏 지크프리트가 그들과 같은 땅에 서고,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그저 지크프리트가 기꺼이 미물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춰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쿵!!
다시 한번 무게가 실렸다.
“끄윽…….”
“억!”
사람들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 모습은 마치 신을 경배하는 신자들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그 곁을 느긋한 걸음으로 지나갔다.
어느새, 세상의 모든 소음은 사라진 지 오래.
온 세상이 고요한 가운데,
뚜벅, 뚜벅, 뚜벅.
땅을 짓밟는 부츠 굽 소리만이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울렸다.
바람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데,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막 본점 안에 들어서려던 지크프리트가, 흘끗 시선을 내려 사람들을 시야에 담았다.
“너희들 모두, 마족과 결탁한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다.”
“뭐?!”
“마족이라니?!”
경악한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물론 이 중에 린츠 상단과 마족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 명확한 죄과는 추후 조사를 통해 판명 날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악 따위는 저와는 전혀 관련 없다는 양.
지크프리트는 그저 덤덤하게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혹시 모를 도주를 막기 위하여 움직임을 제약하였으니, 함부로 움직여서 스스로의 몸을 상하게 하는 불상사는 일으키지 않길 바라며…….”
뚜벅.
부츠 굽이 다시 한번 땅을 짓밟으며 묵직한 소음을 냈다.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 말을 끝으로, 지크프리트는 본점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몸을 낮추었다.
두려웠다.
* * *
그 시각.
린츠 상단주, 토마스 린츠는 흡족한 얼굴로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크, 내 수완이란.”
토마스가 나지막이 킬킬거렸다.
그가 탄탄대로를 걷게 된 시기는 약 4년 전.
정체 모를 신사를 한 명 만나게 되고부터였다.
그 신사는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많았다.
자신의 신분을 절대로 밝히지 않았고,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토마스는 그 신사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신사를 만날 때마다 눈을 가린 채, 그쪽에서 보내준 마차를 타고 한참을 빙빙 돈 후에 마주앉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야.’
나직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최대한 상단을 키우도록 해.’
‘예, 예?’
‘여러 귀족 가문들과 연을 맺고, 그들에게 각종 물품을 공급할 정도로 신뢰를 쌓아. 그를 위해서라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그래서…….’
꿀처럼 다디단 속삭임이 울렸다.
‘언젠가 내가 필요할 때, 그때 딱 한 번만 도움을 주면 돼.’
처음에는 유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막대한 금액이 통장에 입금되고.
지방의 그저 그런 상단이었던 린츠가, 신사의 도움으로 제국 최고의 상단 중 하나로 발돋움하게 되자…….
‘예,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토마스는 신사와의 만남을 인생 최대의 행운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수상한 면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사가 지원하는 자금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토마스는 그 자금으로 경쟁자들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갔다.
루머를 퍼뜨린다거나, 기술자를 빼돌린다거나, 가게 터를 빼앗는다거나.
돈이 많으니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이러시면 저희 가게는 완전히 망합니다!’
눈물콧물을 흘리며 싹싹 비는 가게 주인들이 몇이었던가.
‘내가 알 바야?’
울부짖는 사람들을 향해, 토마스는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일들이 몇 번씩 이어지자.
어느새 린츠 상단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커다란 상단이 되어 있었다.
“하, 이번에는 얼마를 지원 받으면…… 잠깐.”
푹신한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던 토마스가, 문득 멈칫했다.
“왜 이렇게 주변이 조용하지?”
상단의 본점이란 수많은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온갖 소음이 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쥐새끼 한 마리조차 돌아다니지 않는 듯 고요하지 않은가.
바로 그때.
쾅!!
장인에게 의뢰하여 맞춘 최고급 호두나무 문이, 걸레짝 찢어지듯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뭐, 뭐야!!”
놀란 토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쿵!
문손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무 부스러기가 온통 휘날리는 가운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 서늘하게 가라앉은 금안이 토마스를 똑바로 직시했다.
“오를레앙…… 공작님?”
토마스가 멍하니 상대방을 불렀다.
‘오를레앙 공작이 왜 여기에?’
도저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흡사 토마스의 목을 휘어잡기라도 하듯.
그리고.
“컥!!”
거대한 힘이 토마스의 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억, 컥, 어억……!”
토마스는 마구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목을 죄이는 힘은 느슨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강해질 따름이었다.
헐떡이던 토마스가 쥐어 짜내듯 언성을 높였다.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입술을 떼어냈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야말로 얼음 같은 목소리였다.
“마족과 결탁한 죄. 마족의 물건을 오를레앙 공작가에 공급한 죄.”
순간 토마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마족이라고?!’
그 우아한 신사가 설마하니 마족이었단 말인가?!
마족은 모두 징그러운 짐승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토마스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어억, 사, 살려……!”
토마스는 손톱을 세워 허공을 마구 긁어 댔으나 허사였다.
그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빠져나갔다.
발악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크프리트가 재차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