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래, 필로멜 후작의 말이 옳다.”
황제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족들은 마땅히 경계해야 하나, 그들을 경계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지.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도 국가가 해야 할 일.”
한편 다른 귀족들은 그저 슬금슬금 필로멜 후작의 눈치를 살필 따름이었다.
필로멜 후작가 자체가 대귀족의 반열에 들어 있는 데다가, 황비라는 뒷배가 있었으니까.
차마 후작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황제까지 저렇게 후작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으니…….
그런데 그때.
“제 생각은 그와 다릅니다.”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라키어스였다.
“이번에 마족은 인간 상단 하나를 포섭하여, 그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렸습니다.”
세자르는 연신 내뱉던 하품을 멈췄고, 지크프리트의 시선에는 이채가 어렸으며, 키리오스는 드디어 감았던 눈을 떴다.
귀족들 또한 화들짝 놀라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지크프리트 스승님께서 전말을 밝혀내기 전까지, 그 누구도 그 상단을 의심하지 않았지요.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고작해야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었다.
수없이 쏠린 귀족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라키어스는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오를레앙 공작령에 퍼진 마도구들은 모두 회수되었다지만, 옛 카롤링거의 땅과 인근 북부 영지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마도구는 아직 회수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온통 고요한 대회의장 안에서, 라키어스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인력을 파견하여 한시바삐 마도구들을 모두 회수해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자신들의 제자를 바라보는 세 용사들의 얼굴 위로,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
라키어스는 차분하게 말을 맺었다.
“각 가문에만 조사를 맡기기보다는, 황실에서 직접 나서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필로멜 후작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라키어스를 흘겨보았다.
“글쎄요, 전대 황후께서 카롤링거 태생이셔서 이리 말씀하시는 건 아니고요?”
순간 라키어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지금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필로멜 후작?”
“뭐, 그렇잖습니까. 요새 카롤링거에 관한 인지도가 많이 올랐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필로멜 후작이 얄밉게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 뭐라더라, 만화 위인전이라고 했던가요? 거기서 뜬금없이 카롤링거의 위인이랍시고 시어도어 대왕을 선정했다지요?”
그러고는 들으란 듯이 라키어스에게 되묻는다.
“뭐 시어도어 대왕은 거의 전설 속의 인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알렉산드로 3세면 망국의 왕이나 마찬가지 아닌지요?”
“…….”
거의 조롱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산드로 3세는 라키어스의 외조부였으니까.
“…….”
라키어스는 바로 항의하지 않았다.
아마 분노에 휘말려 자칫 말실수를 할까 두려워하는 듯하다.
그 대신, 소년은 필로멜 후작을 사나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붉은 눈동자 안으로 분노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뭐, 뭐야?’
필로멜 후작은 그 날카로운 기세에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내가, 고작 열다섯 살밖에 안 된 1황자에게 기가 질렸단 말이야?’
왠지 자존심이 상한 필로멜 후작이, 일부러 더 두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이왕에 카롤링거에게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된 마당이니, 그를 이용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지금 이용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요! 그러지 않고서야, 제국의 예산까지 사용해 가며 카롤링거를 도우라 주장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필로멜 후작.”
라키어스는 감정을 억누르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필로멜 후작에게 반박한다.
“카롤링거는 이미 데카르트에게 병합된 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카롤링거 국민은 데카르트의 국민이에요.”
“하, 같은 국민이요? 데카르트와 카롤링거를 어떻게 같은 선상에 두십니까? 그 미천한 것들과 우리를 같은 제국민으로 묶으시다니요!”
필로멜 후작이 들으란 듯이 비웃었다.
순간 라키어스는 분노로 머리가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참자.’
라키어스는 어금니를 깨물며 애써 감정을 진정시켰다.
여기서 화를 내고, 이성을 잃는 것 자체가 필로멜 후작의 노림수에 넘어가는 일이다.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해야만 한다.
지금 이 대회의장에는 보는 눈이 아주 많으니까.
“또한 저는 카롤링거만 도우라는 게 아니라, 마도구가 퍼진 모든 영지들을 전수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마치 아이에게 설명을 하듯, 라키어스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마도구를 회수하는 건 각 지역의 안전뿐 아니라, 더 나아가 데카르트의 안보에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되십니까?”
“지금 제국의 재정이 어렵다지 않습니까! 당장 급한 일도 아니니, 나중에 처리해도 될 일입니다!”
“그게 어떻게 급한 일이 아닙니까? 나중에 처리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나중은 도대체 언제입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이는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서로서로 눈치만 살필 뿐.
심지어 상황을 중재해야 할 황제마저도, 무심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필로멜 후작이 제 아들의 의견을 짓밟아주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때.
“이것 참, 정말 재미있네요.”
웃음 섞인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세자르였다.
“제가 알기로,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은 그 망국의 왕 덕택에 목이 붙어 있는 거거든요.”
“…….”
“…….”
거침없는 독설에,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창 언성을 높이던 라키어스와 필로멜 후작까지도 입을 다물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르는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들 입을 뻥긋도 안 하시는 것부터가 우스운데.”
세자르가 흘끗 필로멜 후작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혓바닥이 굉장히 기신 분도 있고.”
“세, 세자르 대사제! 그게 무슨 망발……!”
필로멜 후작이 창백한 얼굴로 세자르를 돌아보았다.
세자르는 그야말로 한 송이 백합처럼 청순하게 웃어 보였다.
“왜, 제가 없는 말 했습니까?”
그러고는 재차 쏘아붙인다.
“여태껏 카롤링거가, 데카르트로 마족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것.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
“…….”
다시 한번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라키어스는 놀란 얼굴로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자르는 지금 대놓고 라키어스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세자르, 그냥 포기해.”
키리오스였다.
“우리 마탑 녀석들보다도 못한 머저리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말해 봤자 네 입만 아프지.”
어깨를 으쓱인 키리오스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귀족들을 쏘아보았다.
“안 그래?”
친절?
그 어마어마한 독설과, 친절하다는 형용사가 같이 나올 수 있는 건가?
라키어스는 내심 기겁했다.
“다들 배때기에만 기름이 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대가리에도 기름이 꼈나 봐.”
키리오스가 들으란 듯이 빈정거리며,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헛소리나 찍찍 해 대고 있지. 안 그래?”
“…….”
“…….”
황제까지 있는 자리에서의 폭언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다만 오를레앙 노공작은 다소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지크프리트가 만류하듯 키리오스를 불렀다.
“키리오스.”
키리오스가 잔뜩 짜증을 냈다.
“아, 내가 뭐? 내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너더러 못할 말을 했다고 한 적 없어. 다만.”
지크프리트는 무감정한 금빛 눈동자로 귀족들을 응시했다.
“매번 안전한 후방에서 꽥꽥거릴 줄만 아는 돼지새끼들과 말을 섞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라는 소리다.”
“…….”
“…….”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대놓고 막나가는 키리오스, 그리고 은근히 막나가는 세자르와 다르게.
지크프리트는 제국에서도 유일한 공작가의 가주로써, 꽤나 상식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지크프리트가 저렇게까지 막말을 한다는 건…….
‘용사들께서 정말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셨나 봐.’
세 용사들은 여러모로 전설적인 존재였다.
인류를 지키겠다는 고귀한 목적과 더불어, 무려 다섯 마왕을 토벌하는 그 무력까지.
하다못해 황제까지도 입을 다물고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마당에, 귀족들이 저 막말에 반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