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사실을 적시하는 것도 모욕이라면, 아마 모욕일 수도 있겠군요.”
“세자르 대사제!!”
황제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세자르는 여전히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을 뿐.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어떻게든 사과를 듣기는 해야 하는데!!’
황제는 내심 초조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생겼다.
다만 문제는, 세자르에게 사과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인류를 구한 세 영웅의 일원이자, 빛의 신이 가장 총애하는 첫 번째 대리자.
어찌 보면 황제보다도 더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지 않은가.
보다 못한 지크프리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자르, 이게 도대체 무슨 무례지.”
“아니, 뭐…….”
“얼른 황제 폐하께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하나?”
지크프리트가 재차 채근했으나, 세자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지크프리트가 나지막하게 소곤거렸다.
“라키어스를 생각해라.”
“…….”
세자르는 그제야 불만스럽게나마 사죄의 말을 입에 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1황자 전하를 워낙에 아끼는 바람에, 선을 넘었군요.”
“…….”
평소 라키어스를 그렇게나 굴려 놓고, 뭐라고……?
지크프리트는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다소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금세 표정을 정돈했지만 말이다.
“다만 폐하께서도 하나 약속해 주십시오.”
“……무얼 말이오?”
“린츠 상단이 제국 각지에 퍼뜨린 마도구 문제, 확실하게 조사하겠다고 말입니다.”
순간 황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저도 1황자 전하와 생각이 같습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번 마도구 문제는 확실하게 뿌리 뽑아야 합니다.”
“오를레앙 공. 그건…….”
“저희 오를레앙은 물론이고, 마탑과 대신전에서도 조사에 물심양면으로 협력할 것입니다.”
순간 키리오스와 세자르가 도끼눈을 떴으나, 지크프리트는 가뿐하게 무시해 버렸다.
한편 그 말을 들은 황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저 말은…….’
비록 지크프리트의 태도는 시종일관 정중했으나.
결국 황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오를레앙 공작가와 마탑, 대신전과 합동 조사를 하겠다는 뜻 아닌가.
더 분한 건, 황제에게는 저 말을 거절할 명분도 힘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결국 황제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황제를 향해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희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알겠소.”
지크프리트를 필두로, 세자르와 키리오스는 물론이고 오를레앙 노공작까지 대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귀족들은 얼떨떨하게 서로를 마주 보다가, 황제와 필로멜 후작의 눈치를 연신 살피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가시방석 위에 앉아도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대회의장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키리오스는 당장에 라키어스부터 잡아들였다.
“야, 라키어스.”
키리오스가 두 눈을 부라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직할령을 다스리겠다고 한 거야?”
“어…… 그게.”
라키어스가 머쓱하게 입술만 달싹였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키리오스의 눈매가 점점 더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너 이 자식, 설마 화가 난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저지른 건 아니지?”
“그,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기는 뭐가 아냐! 이 녀석이 정말!”
철썩!!
키리오스가 라키어스의 등짝을 거세게 후려쳤다.
“아야, 왜 때려요?! 스승님 손 엄청 매운 거 아세요?”
라키어스가 등을 어루만지며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키리오스는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마력을 끌어올려서 등짝 보호한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쳇, 좀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돼요?”
라키어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제자를 향해, 키리오스가 재차 따져 물었다.
“그래서 그 잘난 네 생각이 뭔데?”
그러자 라키어스가 슬그머니 키리오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 듣고서 비웃으시지 않을 거죠?”
“생각해 보고.”
“…….”
하지만 키리오스는 생각 이상으로 단호했다…….
라키어스는 저도 모르게 불만스러운 표정이 되어 버렸다.
“말 그대로예요. 황족들 중 그 누구도 카롤링거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니, 저라도 카롤링거를 보살피고 싶었어요.”
“뭐? 그거 듣기 좋으라고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말 아니야?”
“……도대체 키리오스 스승님은 저를 어떤 사람으로 보시는 거예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키리오스를 흘겨보는 것도 잠시.
라키어스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진심이에요. 저는 적어도 데카트르의 황족으로서 몸이라도 편히 살았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카롤링거의 사람들을 어떻게든 돕고 싶어요.”
“흐음.”
그 말에, 키리오스는 구박을 멈추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라키어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스승님들께 부끄러운 제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요.”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스승님들은 인류를 구한 영웅들이시잖아요.”
붉고 투명한 눈동자가 세 영웅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 말간 시선에 담겨 있는 감정은 순수한 존경심, 그리고 애정이었다.
“그런 분들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제게 반절의 피를 나눠 준 나라의 사람들까지 모른 척하는 건 너무 창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키리오스는 의외라는 것처럼 라키어스를 응시했다.
“네가 웬일로 그런 말을 다 하냐?”
“음, 키리오스 스승님 앞에서 진지해진 제가 잘못이겠지요?”
라키어스는 거의 해탈한 얼굴이 되었으나,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이번 대회의에서 제 편을 들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스승님들께서는 정치적인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민폐를 끼쳤어요.”
“…….”
그러자 키리오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어라?’
라키어스는 찔끔했다.
뭔가 제 말이 키리오스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은데, 도무지 어느 지점에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던 라키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할 테니…….”
“아니, 듣자듣자 하니까. 왜 말을 그딴 식으로 하지?”
순간 키리오스가 정색을 했다.
“스승들이 제자를 보호하려 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네?”
“애초에 너 같은 청소년까지 아득바득 짓밟으려 하는 필로멜 후작이 이상한 거지! 게다가 폐하, 아니. 크흠, 흠!”
맞다, 얘 황제 아들이지?
자연스럽게 황제에 대한 불평불만까지 늘어놓으려던 키리오스가,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되삼켰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에 대한 거라면, 뭐든 기탄없이 말씀하셔도 됩니다.”
“……진짜 그래도 되냐?”
“당연하죠. 원래 국왕 폐하도 뒤에서는 욕하는 법이라고 했고요.”
고개를 끄덕인 라키어스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아바마마께서도 뭐, 한 나라의 군주로서 그리 적합하신 분은 아니시고…….”
“…….”
“…….”
“…….”
세 용사들은 떨떠름하게 서로를 곁눈질했다.
‘야, 쟤 저렇게 둬도 되냐?’
‘조금 늦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성 교육도 함께 시켜야 하나?’
‘인성 교육이요? 당장 카를로로 내려가야 하는 사람한테요?’
세 용사들이 눈짓으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차.
“그리고…… 카를로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라키어스가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중얼거렸다.
“조금 더 티티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동시에 라키어스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세 용사들이 그야말로 살벌한 눈빛으로 라키어스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주변 온도가 확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내 착각이었나?’
하지만 라키어스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느닷없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뒤를 돌아본 라키어스가 순간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티, 티티?”
타티아나가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라키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티티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아빠들도 기다릴 겸, 오랜만에 네 얼굴도 볼 겸 입궁했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대답한 타티아나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웬 카를로야? 카를로에는 왜 가는 건데?”
“티티, 그게…….”
“카를로는 마계와의 접경지역이잖아. 그리고 넌 아직 열다섯 살밖에 안 됐고. 그런데도 그 위험한 곳으로 가겠다고?”
“…….”
타티아나가 재차 캐물었다.
라키어스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하지만.
“응.”
그 대답에는 흔들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순간 타티아나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바보, 멍청이! 고집쟁이야!”
“티티, 난…….”
“됐어, 네 마음대로 해!”
그러고는 홱 돌아서서 마구 뛰어가 버린다.
세 용사가 눈짓으로 라키어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