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꼬마!”
“티티 양, 조금만 천천히 가요!”
“타티아나, 그러다 넘어져!”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라키어스가, 이마를 짚으며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렇게 급작스럽게 타티아나에게 알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잘게 떨리는 하늘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바윗덩어리를 매단 양,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그날 저녁.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침실에 틀어박혔다.
‘라키어스가…… 카를로에 갈 줄은 몰랐어.’
예전이라면 라키어스를 카를로로 보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라키어스는 남자주인공답게 수많은 공을 세우며, 능력 있는 황자로서 입지를 다질 테니까.
또한 라키어스가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해야만, 추후 나를 다방면에서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싫어, 싫다고!”
나는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베갯잇을 와락 움켜쥐었다.
라키어스는 내 소중한 친구였다.
라키가 원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모든 행복을 거머쥐는 남자주인공이라고 해도, 그래도.
“위험한 곳에 보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퍽, 퍽!
나는 분노를 담아 베개를 마구 두드려 팼다.
“라키어스, 바보, 멍청이!!!”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쌔근거리며 재차 고함을 내지르던 바로 그때.
툭, 툭.
무언가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미세한 소리가 내 귀에 잡혔다.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비척비척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뜻밖의 사람을 발견했다.
“라키?!”
채 녹지 않은 눈이 군데군데 쌓인 정원에, 라키어스가 홀로 서 있었다.
아무래도 눈을 뭉쳐서 던졌나 보다.
내 방의 유리창 위로, 뭉쳐진 눈이 부딪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라키어스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배시시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 티티.”
“…….”
그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보자, 나는 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뭐야, 네가 여기에 왜 있어? 지금은 황성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잖아?”
다소 날 선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당연히 네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
라키어스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
나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 그렇다면 그냥 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으면 됐잖아. 왜 밖에서 눈덩이를 던지고…….”
“그야, 내가 평범하게 찾아갔으면 내 얼굴을 보지도 않았을 테니까.”
라키어스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최소 일주일은 내 얘기만 나와도 방문을 걸어 잠갔을 것 같은데. 아니야?”
“…….”
쟤, 왜 자꾸 사람 말문을 막히게 하지?
하지만 추운 정원에 계속 라키어스를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이, 일단 안으로 들어와.”
나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두 눈을 반짝 빛내는가 싶더니.
내 방 창문 옆에 심어진 아름드리나무에 냅다 매달렸다.
‘응? 현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기겁한 내가 창틀에 매달렸다.
“위, 위험해!”
하지만 그런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양, 라키어스는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에 올라섰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세상에, 뭐 하는 짓이야! 얼른 넘어와!”
내 딴에는 혹시 라키어스가 발이라도 헛디디면 어쩌나, 걱정스러워서 그런 거였는데.
“와, 손도 잡아 주는 거야?”
라키어스가 생글 눈웃음을 짓더니 냉큼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는 훌쩍 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솔직히 손은 안 잡아 줘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던 내가, 라키어스에게 잡힌 손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무사히 방 안으로 안착했는데도, 라키어스는 여전히 내 손을 꼭 마주 잡고 있었다.
“손, 놔줄래?”
잡힌 손을 새침하게 흔들어 보이자, 라키어스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조금만 더 잡고 있으면 안 돼?”
“안 돼.”
나는 손을 쏙 빼냈다.
라키어스는 제 손아귀를 아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뭐야, 왜 저런담?’
어리둥절해하던 내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보다 너, 눈 맞고 돌아다닌 거야?”
“응?”
“머리가 다 젖었잖아. 이러면 감기 걸린다고 몇 번이나 말해?”
그새 머리에 쌓인 눈이 녹았는지, 금빛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 수건을 집어 들었다.
“이리 와서 앉아.”
“넵.”
라키어스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티티, 너 공작령에서 아팠다며.”
축 늘어진 수건 아래, 붉은 눈동자가 걱정을 가득 담고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다…….
“지금은 좀 어때? 괜찮아?”
그리고 그 시선을 마주한 나는.
콩!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라키어스에게 꿀밤을 먹였다.
“야, 지금 네가 내 걱정할 때야?”
“아파, 티티.”
라키어스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꾸며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난 냉정하게 대꾸했다.
“아프라고 때린 거야.”
“너무해.”
“너무한 쪽은 내가 아니라 너지.”
나는 분노를 가득 담아서, 라키어스의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눌러댔다.
“고작해야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주제에, 카를로에서 영주 노릇을 하겠다고? 너, 카를로가 어디 붙어 있는 도시인지는 알고 있는 거지?”
아, 언성을 높일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라키어스를 마구 타박하고 있었다…….
“카를로는 마계와 국경이 잇닿은 최전방이잖아! 거길 가겠다니, 겁도 없어!”
약 7년 전, 막 세 용사들을 내 아빠로 삼았던 때.
제국에 입국하면서 카롤링거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번쩍거리는 다른 영지들과 다르게, 상당히 낙후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당시에도 오를레앙 노공작이 제공하는 물자를 정기적으로 받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 정도였으면…….
‘게다가 지금은 린츠 상단이 완전히 해체됐잖아.’
거래를 맡던 연결책이 사라졌으니, 당분간은 물자를 지원받기가 더더욱 어려워질 거다.
물론 새로운 거래 상단을 뚫으면 해결될 문제이기는 하지만.
고작해야 열다섯 살짜리 황자가 새 거래 상단을 뚫기까지, 얼마나 고생스러울 거야?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잖아.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있어?’
그런 의미를 담아서, 나는 라키어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나비 같은 속눈썹을 예쁘게 팔랑이며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화났어?”
아마 평소라면 저 미인계에 홀랑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워낙에 기분이 저조했기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화났어.”
그러자 라키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내 손에 뺨을 비비며, 한숨처럼 속삭인다.
“그래도 너무 화내지는 마.”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바스락거리는 목소리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한테 미움받아도, 너한테만큼은…….”
“…….”
“미움받고 싶지 않아.”
축 처진 라키어스를 보고 있자니, 영 기분이 좋지 못했다.
결국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그래, 이미 저지른 걸 어쩌겠어.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라키어스가 잘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편이 나을 테지.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직할령을 어떻게 다스릴 건지는 고민해 봤어?”
그러자 라키어스가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티티, 화 풀린 거야?”
“너 말하는 거 봐서.”
다만, 정말로 대책 없이 카를로로 가겠다고 하는 거라면…….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살벌하게 미소 지었다.
“아, 그게!”
라키어스가 움찔 어깨를 굳히더니,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일단 물자를 주기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주 거래 상단을 다시 뚫으려고.”
“상단?”
“응. 하지만 상단만 믿고 있을 수는 없으니, 장기적으로는 식량을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게 만들어야지.”
“뭔가 생각해 둔 방안이 있는 거야?”
“음, 카를로는 제국 최북단이라 날이 선선한 편이거든. 일단 차가운 날씨에도 잘 적응하면서, 재배면적 대비 수확량이 많은 곡물을 찾아보려고 해. 그리고…….”
아무래도 라키어스는 이번 직할령 문제를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카를로를 부흥시킬 갖가지 아이디어가 줄줄 흘러나왔다.
영지 경영에는 문외한인 내 눈에도, 꽤 현실적으로 보이는 아이디어가 상당수 있어 보인다.
그 이야기를 한참 듣던 내가 심술궂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신이 나?”
“응? 뭐가?”
한참을 열정적으로 떠들어 대던 라키어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카를로에 가는 거 말이야.”
나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카를로는 제도에서 엄청 멀지 않아? 이제 자주 못 보겠네?”
“그, 티티?”
“이러다가 서로 얼굴까지 까맣게 잊어버리면 어떡해?”
그러자 라키어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나는 안 잊어버려.”
“응?”
그 확고한 대답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