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왜냐하면.
‘무려 라키어스가 성년이 되는 생일인걸.’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 중요한 날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어!’
아마 라키어스는 바쁘다는 이유로 제 성년까지 무시해 버릴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성년만큼은 내가 직접 가서 챙겨 줄 생각이었다.
방문하는 것도 비밀로 해야지.
그럼 라키가 엄청 놀라겠지?
입을 가리고 숨죽여 웃던 것도 잠시.
나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다만 아빠들을 어떻게 설득할지가 관건인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끼던 펜을 꺼내 들었다.
내가 열 살 생일선물로 라키어스에게 받았던 펜이었다.
‘일단은 편지 답장부터 쓰자.’
난 바쁘게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 * *
일주일에 한 번, 가족끼리 다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
“좋아요.”
세자르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산뜻하게 대답했다.
“마침 제가 카를로에 방문할 생각이었거든요. 티티 양은 저와 동행하면 되겠네요.”
“세, 셋째 아빠가요?”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아주 쉽게 라키어스를 만나러 가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에 차석사제를 새로 파견했거든요. 그쪽 신전의 상황이 어떤지 확인할 겸, 파견한 차석사제는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살필 겸. 겸사겸사 가 보려고요.”
“야, 거짓말 좀 치지 마. 라키어스 녀석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거면서.”
그러자 키리오스가 코웃음을 쳤다.
세자르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키리오스를 흘겨보았다.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라키어스 녀석이 편지 한 통 보냈다고 쪼르르 달려가는 꼴 좀 봐.”
뭐? 라키어스가 편지를 보냈다고?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동시에 키리오스가 얄밉게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사제가 일을 잘하든 말든, 그런 사소한 것까지 네가 직접 살펴봐야 할 이유는 없잖아? 다른 사제를 보내도 그만인데 말이야.”
“이번에 파견한 사제는 차석사제라고 했잖아요? 그 정도면 신전 내에서도 상당한 고위직이라고요.”
세자르가 시큰둥한 얼굴로 항변했다.
“웬만한 사제를 보낸다 한들, 차석사제의 권위에 눌려 제대로 살필 수 없을 것…….”
“핑계는.”
그 항변을 중간에서 끊어내며, 키리오스가 피식 웃었다.
“차석사제 위로도 수석사제가 있는 거 누가 몰라? 걔네 보내면 되지.”
“키리오스, 수석사제더러 쟤네라니요.”
세자르는 부러 엄중한 표정을 꾸며냈다.
“수석사제는 신전의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함부로 외부에 파견을 보낼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하, 그럼 대신전의 수장인 대사제께서는 카를로까지 직접 가실 정도로 한가하시고?”
“…….”
아무래도 정곡을 찔렸나 보다.
우와, 세자르가 말문이 막히는 건 정말 드문데.
키리오스가 쯧쯧 혀를 찼다.
“그거 알아? 넌 뭔가 켕기는 게 있을 때마다 말이 유창해지더라.”
“…….”
“거기다 너, 다른 속셈 있는 거 다 알아.”
“속셈이라니요?”
키리오스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 기회에 꼬마를 독점하려고 그러지?”
“…….”
아니, 무슨 저런 유치한 말을?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완전 억지 아니야?
게다가 나는 이제 꼬마라고 불릴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언제까지 날 꼬마라고 부를 셈이지?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크흠, 흠.”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는 세자르였다…….
키리오스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삿대질을 했다.
“야, 너무 얌체처럼 구는 거 아니냐?”
“그게 뭐 어때서요?”
그새 기세를 회복한 세자르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되물었다.
“티티 양은 지크프리트의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고, 가끔 마탑도 방문하죠. 그에 반해, 저는.”
세자르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티티 양과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단 말입니다!”
“…….”
“…….”
침묵이 흘렀다.
키리오스와 지크프리트가 뜨악한 시선으로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세자르는 ‘왜, 뭐, 왜?’라는 뻔뻔한 눈빛으로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나는 다소 머쓱해졌다.
‘그, 나를 예뻐해 주시는 건 정말 고맙기는 한데…….’
때마침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세자르를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라키어스를 보러 가겠다고?”
“네, 가고 싶어요!”
나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하소연을 했다.
“거의 5년을 얼굴도 못 봤잖아요. 라키의 성년식 정도는 제가 챙겨 주고 싶어요.”
“뭐, 세자르와 함께 간다면 그럭저럭 안전하기는 할 테지만…….”
지크프리트는 묘하게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가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고, 세자르가 있으니 안전 문제도 해결되어서 차마 가지 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꼭 가야겠니?’
차마 이 질문을 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나는 그 속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배시시 눈매를 접어 보였다.
“편지 자주 쓸게요.”
“……그래.”
음, 편지로는 완전히 해결이 안 되나 보군.
“첫째 아빠.”
나는 애교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엘빈 거리에서 새로운 디저트 가게가 생긴다는데.”
비록 지크프리트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귀가 쫑긋거리는 게 다 보인다.
“카를로에서 돌아오면 저랑 같이 가 주실 거죠?”
그러자 키리오스가 뾰로통한 얼굴로 툭 끼어들었다.
“야, 꼬마. 나는?”
아차.
나는 얼른 대꾸했다.
“둘째 아빠도 당연히 같이 가야죠!”
“흥.”
그제야 키리오스가 다소 누그러진 표정이 되어,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나는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좋아, 두 사람 모두 일단은 적당히 기분이 풀어진 것 같고.’
때마침 세자르가 살벌한 얼굴로 신신당부를 했다.
“어쨌든 이번에는 나와 티티 양 단둘이서 갈 테니까, 다들 방해할 생각은 말아요. 알았나요?”
지크프리트와 키리오스를 번갈아 돌아보는 그 기세가 엄청나게 흉흉하다…….
뭐, 그렇게 나의 카를로 방문이 결정되었다.
* *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와 세자르는 곧바로 제도를 떠났다.
지크프리트와 키리오스는 못내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그래도 꼬박꼬박 배웅은 나와 주었다.
‘세자르 옆에 꼭 붙어 다녀라.’
‘꼬마 너, 입맛 없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응?’
‘아, 잔소리 좀 작작 해요!’
두 사람이 끝없이 걱정을 늘어놓는 통에, 듣다 못한 세자르가 잔뜩 짜증을 부릴 정도였다…….
우리는 마차로 북쪽으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갔다.
카를로는 제국령의 최북단이었던 오를레앙 영지보다도 더 북쪽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확실히 날씨가 쌀쌀한 느낌이 든다.
‘으, 추워.’
내가 가볍게 어깨를 떨자, 세자르가 숄을 건네주었다.
“걸치고 있어요.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냉큼 숄을 받아 들어 어깨에 둘렀다.
하지만 세자르가 영 마뜩잖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새인데.
“그렇게 헐겁게 걸치고 있으면, 숄을 두르는 의미가 없잖아요?”
동시에 세자르가 손을 뻗어 숄을 단단히 여며 주었다.
그러면서도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티티 양은 몸이 약하니까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요새 영양제는 잘 챙겨 먹고 있나요?”
헉.
나는 눈동자만 굴렸다.
침묵이 흘렀다.
“…….”
“…….”
찰나의 눈싸움 끝에.
세자르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착하자마자 꼭 챙겨 먹어요.”
“네에…….”
나는 양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흑. 쓴 거 싫어.
조금 시무룩해졌던 나는, 힐끔 세자르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더 이상 세 아빠들이 금이야 옥이야 보살펴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라키어스는 열다섯 살에 직할령의 영주로 파견되었는데, 나는 그보다도 한 살이 더 많은걸.
그런데도 세 아빠들은, 여전히 나를 품 안의 어린 딸처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뻐서.
“…….”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세자르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렇게 귀엽게 웃어도, 영양제는 무조건 먹어야 해요.”
……아니, 누가 뭐랍니까?
정말, 사람의 훈훈한 기분을 완전히 박살을 내 버리시네.
속으로 투덜거리던 내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도시가 보였다.
여태껏 살아왔던 제도라거나, 북부의 중심지인 오를레앙 공작령과는 다르게.
묘하게 삭막한 느낌이 나는 도시였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우와.”
화들짝 놀란 내가 마차 창문에 달라붙었다.
“여기, 정말 카를로 맞아요?”
“네, 맞아요.”
“세상에…….”
나는 두 눈을 반짝였다.
내가 막 제국으로 입국하던 당시 보았던 카를로는, 도시라기보다는 다 쓰러져가는 도시 비슷한 무언가에 가까웠었는데.
지금은 도시라는 이름에 부끄러움 없는 모습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