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국경을 맞댄 마족들을 경계하기 위함인지, 카를로는 평범한 도시보다 훨씬 더 군사적인 방비가 튼튼해 보였다.
그런데 그때.
“티티 양은, 라키어스를 만나는 게 그렇게나 좋은가요?”
세자르가 눈을 반달처럼 휘며 검지로 입매를 톡톡 두드렸다.
“아까 전부터 계속 웃고 있네요.”
뭐?
나는 무심결에 입술을 어루만졌다.
한껏 위로 치솟은 입꼬리가 만져졌다.
“아…….”
머쓱해하던 것도 잠시.
나는 세자르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는 셋째 아빠도 지금 웃고 계시잖아요.”
“……제가요?”
세자르는 정말로 놀란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정말로 모르셨던 것 같은데?’
나는 짓궂게 입을 열었다.
“라키를 만나는 게 그렇게 반가우세요?”
세자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세자르는 질색을 하며 미간을 좁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에이, 왜 말이 안 돼요?”
나는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셋째 아빠는 라키의 스승님이시잖아요. 제자가 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티티 양도 아니고, 시커먼 사내 녀석이 왜 보고 싶겠습니까?”
한편,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차는 착실히 달려서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생활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을 법한 깔끔한 도시의 전경이 시야 안에 들어왔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입성은 깨끗했다.
크게 부유해 보이는 사람은 없어도,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사람 또한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표정이 밝았다.
저 사람들은 최소한,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일 터.
아무래도 라키어스는 내 생각 이상으로 잘해내고 있는 것 같다.
마차는 도시를 가로질러, 깔끔한 정원이 딸린 3층짜리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영주가 기거하는 영주관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들어가면 라키어스가 있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긴장감으로 목 뒤가 빳빳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지?
5년 만에 얼굴을 본다고 생각하니까, 새삼스럽게 긴장돼!
<혹시 나중에 만나게 되더라도 어색하게 굴지는 마. 알았지?>
……어째서 라키어스가 보냈던 그 편지의 내용이 지금 생각나는 거야?!
때마침 세자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일단 내리죠.”
나는 세자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바닥에 발을 디뎠다.
마침 세자르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기에, 은근슬쩍 질문을 던진다.
“그러고 보니, 셋째 아빠는 이전에도 카를로에 몇 번 와 보신 적이 있죠?”
“두 번 정도 와봤습니다만…… 어째 올 때마다 풍경이 변하는군요.”
“그래요? 어떻게 변했나요?”
“예전보다 상당히 나아졌어요. 인구 유출 문제도 얼추 해결된 것 같고, 물자도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라키어스가 일을 잘해 준 것 같아요.”
세자르는 그렇게,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라키어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를 듣던 내가 방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
순간 세자르의 얼굴 위로 멋쩍음이 번졌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인다.
“뭐, 라키어스가 아예 무능하지는 않은가 봅니다.”
“에이, 꼭 그렇게 한 마디씩 붙이신다니까?”
그런데 그때.
벌컥 영주관의 문이 열렸다.
키가 훌쩍하니 큰 금발 적안의 미청년이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등 뒤로는 행정관 두엇을 거느린 채였다.
‘아.’
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라키어스다.’
항상 궁금했었다.
스무 살을 코앞에 둔 라키어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키는 많이 자랐을지, 몸은 건강한지.
……이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 선 라키어스는.
그야말로 한 세계의 주인공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청년이어서.
저 완벽하게 아름다운 청년이, 한때 서로 애칭을 부르며 어울렸던 내 친구였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영주님, 오늘 일정은…….”
“돌아오신 후에 검토하셔야 할 서류는…….”
행정관들이 청년을 향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라키어스는 무심한 얼굴로 그 설명들을 듣다 말고,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붉은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티티?”
라키어스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마치 눈앞에 서 있는 내가 환상은 아닐까, 그렇게 의심하기라도 하듯.
그 순간.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떡해, 이러다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니,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바람에 긴장이 돼서 이러나?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키어스잖아.
내 제일 친한 친구 말이야.
“라…… 아니.”
반사적으로 라키어스의 애칭을 부르려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라키어스 옆에 붙어 선 두 행정관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아, 그렇지.’
공식적으로 나는 오를레앙의 공녀였고, 라키어스는 데카르트 제국의 1황자이자 카를로의 영주다.
보는 눈이 있으니, 여기서는 예의를 갖추는 편이 좋겠지.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타티아나 폰 오를레앙,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좋아, 완벽한 동작이었어.
나는 내심 속으로 뿌듯해했다.
평소 예법 교육을 열심히 받아 둔 보람이 있다니까?
“…….”
그러자 라키어스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굉장히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는가 싶더니.
“꺄악!”
갑자기 나를 품 안에 와락 끌어안았다!
“진짜네.”
“……어, 아니, 네?”
“진짜 티티야.”
라키어스가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지…….”
“…….”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져서.
나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괜히 심술궂게 투덜거렸다.
“……정말, 세상에 티티가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하지만 우리는 그 감동적인 순간을 오래 만끽하지는 못했다.
지옥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오른 듯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기 때문이었는데.
“떨어져.”
그 사람은 바로 세자르였다.
평소의 정중한 존대조차 모조리 집어치운 그 모습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헉.”
나와 라키어스는 후다닥 떨어졌다.
“라키어스.”
라키어스를 노려보는 색소가 옅은 회색 눈동자가 마치, 얼음장 같다…….
세자르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한 송이 목련처럼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요새 몸이 무척 편한가 보죠? 오랜만에 한 번 굴려 줄까요?”
라키어스는 그 즉시 찌그러졌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스승님.”
“그럼 목숨으로 사죄하지 그래요?”
“아니, 무슨 목숨까지…… 아야, 아! 그만 좀 때려요! 대사제가 이렇게 폭력적이어도 되는 겁니까?!”
에효.
어째 5년이나 지났는데도 달라진 게 전혀 없네.
나는 흐린 눈으로 두 사제의 사이좋은(?)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이런저런 소동 끝에.
나와 세자르는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티티, 미리 연락이라도 해 줬으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라키어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어째 꼬리를 붕붕 흔드는 강아지가 연상되는데.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 어때, 놀랐어?”
“그런 거라면 성공했네. 엄청 놀랐어.”
라키어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건 그렇고, 라키어스.”
세자르가 라키어스를 위아래로 뜯어보더니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군요.”
……그런가?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내 눈에는 그냥 늘씬하고 탄탄한 몸매의 청년으로 보이는데?
“라키어스 당신은 지금, 카롤링거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입니다.”
세자르가 삐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들이 챙겨 주기에 앞서, 스스로 몸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저, 스승님?”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라키어스가, 조심스럽게 세자르의 눈치를 살폈으나.
이미 늦었다.
잔소리가 끝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내 준 영양제들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겁니까?”
“…….”
어째, 세자르 특제 영양제의 쓰디쓴 맛이 입 안에 감도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라키어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흠칫 어깨를 굳히는가 싶더니, 이내 질색을 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아 진짜, 오랜만에 만났는데 구박부터 하시기입니까?”
“구박을 할 만하니까 하지요. 눈 밑이 새카매 가지고는…… 쯧, 몰골이 말이 아니군요.”
어, 물론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혀까지 찰 정도까지는 아닌데?
나는 재차 어리둥절해졌다.
한편, 그런 위화감은 라키어스도 느꼈나 보다.
“저, 스승님.”
라키어스는 한참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세자르를 바라보더니,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설마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요?”
세자르는 눈썹까지 꿈틀 굳히면서 정색을 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우리는 차석사제를 만나러 갈 테니, 라키어스는 그만 일 보세요.”
“예? 하지만 모처럼 티티와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글쎄요, 계속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어도 되나요?”
세자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