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까 전부터, 문밖에서 행정관들이 전전긍긍하는 기척이 느껴지던데요. 라키어스도 느끼고 있었잖아요?”
“…….”
라키어스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세자르의 두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설마 끝까지 모른 척할 생각이었습니까?”
“아뇨, 그게.”
라키어스가 찔끔했다.
세자르는 제법 어른스럽게 라키어스를 타일렀다.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면 못 씁니다.”
음, 무척 좋은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셋째 아빠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게 문제지.
“…….”
라키어스는 기가 막힌 얼굴로 셋째 아빠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심정인 듯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르는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가죠, 티티 양.”
“아, 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쨌거나 행정관들이 곤란해하고 있다니까, 이쯤에서 빠져 주는 게 좋겠지.
그렇게 방문을 열자마자…….
“대사제님, 그리고 오를레앙 공녀님을 뵙습니다.”
“혹시 대화가 끝나셨다면, 저희가 영주님을 좀 뵈어도 되겠습니까?”
행정관들이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는, 초조한 얼굴로 질문 세례를 했다…….
“그러세요.”
세자르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행정관들의 얼굴이 활짝 피어나는가 싶더니, 다들 우르르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영주님, 지금 당장 결재해 주셔야 할 서류가…….”
“마을에서 올라온 보고서들도…….”
라키어스는 행정관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뇌에 찬 얼굴로 서류들을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약간 기시감을 느꼈다.
‘저거 약간…… 우리 세 아빠들의 모습이랑 비슷한데?’
때마침 세자르가 팔짱을 낀 채 혀를 쯧쯧 찼다.
“정말, 저렇게 손에 잡히는 서류부터 보면 안 되는데. 중요도부터 따져서 검토해야 하는데…….”
“…….”
나는 힐끔 세자르를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세자르가 불편한 얼굴을 했다.
“티티 양. 왜 그렇게 바라보시나요?”
“있잖아요, 셋째 아빠.”
나는 짓궂게 웃어 보였다.
“역시 라키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오신 거 맞죠?”
“티티 양, 라키어스의 헛소리는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전혀 없답니다.”
딱 잘라 대답한 세자르가 휙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난 보았다.
세자르의 귀 뒤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모습 말이다.
‘뭐야, 걱정한 거 맞네!’
난 음흉한 미소를 짓다 말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세자르를 바짝 따라붙었다.
“잠깐만요, 같이 가요!”
* * *
우리는 영주관에 짐을 푼 후,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물론, 새로 파견된 차석사제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실은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괜히 우리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신전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하면 귀찮아지니까요.”
세자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자고로 일을 잘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상사의 방문에 대비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
우와, 이 사악한…….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여하간,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갑자기 신전으로 들이닥쳤고.
불쌍한 평사제들은 그야말로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대, 대사제님?”
“빛의 첫 번째 아드님이신 대사제님을 뵙습니다.”
평사제들이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하기야, 전생으로 치면 갑자기 내가 다니는 회사의 총수가 내려온 것에 가까운 일이라고 보면 되나?
물론 회사와 신전을 똑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겠지만…….
아니지. 생각해 보니 대사제가 더 높지 않아?
기업 총수는 자본이지만, 대사제는 모든 제국민이 믿고 있는 신앙의 중심이잖아!
그건 그렇고.
‘다들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두 평사제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치 3일 밤낮은 꼬박 철야를 한 것 같은 모습인데?’
게다가.
‘신전이…… 굉장히 낡았네.’
신전 양쪽으로 놓여 있는, 신자들이 앉는 길쭉한 신자석도.
빛의 신의 신상을 모시는 제대도.
제대 위에 깔린 하얀 천까지도, 무척 낡았다.
그나마 신상이나마 말끔한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
‘흐음.’
나는 미간을 좁혔다.
내가 알기로, 제국 각지에 파견된 신전들은 대신전에서 예산을 지급한다고 들었다.
물론 지급된 예산만으로 살림을 하는 건, 여러모로 빠듯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어려워 보인다고?
“어서 오십시오, 대사제님!”
때마침 쩌렁쩌렁한 인사가 울렸다.
허겁지겁 달려온 차석사제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조아렸다.
대략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어찌나 잘 먹고 잘사는지, 얼굴에 번질번질하게 기름기가 돌았다.
“이런, 오를레앙 공녀님께서도 함께 오신 겁니까? 이리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차석사제가 나를 돌아보며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리하여 도착한 응접실은…….
‘지, 진짜 화려하네.’
나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손님들이 자주 들르기에, 웬만큼 구색을 갖춰 놓는 영주관의 응접실보다도 훨씬 호사스러운 것 같다.
물론 사제가 딱히 풍요로운 생활을 하지 말라고 제한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제가 교단에서 지급 받는 월급만으로, 이렇게 번쩍거리는 응접실을 꾸미는 것부터가 가능한가?’
게다가 응접실을 꾸밀 예산이 있다면, 낡아빠진 신전 본관부터 어떻게 수리하는 게 낫지 않아?
한편 세자르는 묘한 얼굴로 응접실을 둘러보고는,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일은 좀 어떻습니까?”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 세자르,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세자르는 기분이 나쁠수록 사근사근해지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아, 잘되고 있습니다. 걱정일랑 마시지요!”
차석사제가 가슴을 탕탕 치며 대답했다.
세자르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런가요? 어쩐지 평사제들이 좀 피곤해 보여서 말이죠.”
“이 거지 같…… 아, 죄송합니다. 낙후된 영지에 헌신하느라 그런 거겠지요. 저도 영지를 보살피느라 영 피로가 안 가십니다.”
방금 거지 같다고 말하려고 했지? 그렇지?!
낙후된 영지라면서 대놓고 저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게다가 피로가 안 가신다고 하는 것치고는, 당신 얼굴부터가 기름기가 잘잘 흐르고 있잖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세자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점검을 시작해 보도록 하죠.”
“……점검이요?”
“예. 비축된 의약품과 식량, 의복이 넉넉한지. 사람들을 모자람 없이 지원할 수 있을지 확인하려 합니다만.”
“…….”
순간 차석사제가 다소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세자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조만간 성물의 상태도 한 번 점검해야겠군요.”
성물.
성물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굉장한 귀물로,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물건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반영구적인 물건이지만, 신성성을 유지하려면 주기적으로 신성력을 충전해 줘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차석사제 이상의 고위 사제가 아니면 신성력을 충전할 수 없기에, 고위 사제들은 제국에서도 무척 귀하게 대접받는 인재들이었다.
뭐, 눈앞의 이 아저씨가 카를로에 배치된 이유이기도 하지.
그리고 성물이 필요한 이유는…….
‘마수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마수는 마기의 영향을 받아 흉포해진 맹수들이었다.
카를로는 마계와 잇닿아 있는 곳이었으므로, 마수들이 끊임없이 출몰하고 있었다.
그래서 각 마을에 성물을 놓아둠으로써 마수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어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석사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혹스러운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잘못 봤나?’
나는 다소 미심쩍은 얼굴이 되었다.
“그, 성물은 각 마을에 배정되어 있잖습니까. 설마 직접 가 보시려고요?”
동시에 차석사제가 벙글벙글 웃으며 세자르에게 물었다.
“예, 그럴 생각입니다.”
그러자 차석사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카를로 외곽 마을들을 돌아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 고귀하신 분께서 굳이 그런 사소한 것까지 확인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걸 확인하러 온 것이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사소하다니요?”
세자르가 평연하게 되물었다.
“성물은 교단의 보물이자, 카를로 시민들의 목숨을 지키는 물건 아닙니까.”
“아, 아니. 저는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니고…….”
“또한 성물이 카를로에 있기에, 차석사제께서 카를로에 계시는 것이기도 하고요.”
세자르는 버릇처럼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