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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90)화 (91/163)

<96화>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차석사제의 가치는 성물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대, 대사제님.”

“이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차석사제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 내며, 세자르가 가볍게 몸을 돌렸다.

온기 없는 회색 눈동자가 차석사제를 스쳐 지나갔다.

“뭐 합니까? 창고로 안내해 주시지 않고.”

* * *

그 후.

“정말…… 엉망이군요.”

창고에 비축된 물품이며 신전의 면면을 살펴본 세자르가, 웃는 얼굴로 단언했다.

차석사제는 바짝 어깨를 움츠리고, 두 평사제는 각자 이마를 찡그리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두 평사제의 반응이 기이했는데.

‘무려 대사제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데도, 전혀 놀라지를 않네?’

마치 올 게 왔다는 듯한 반응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석사제가 평사제들을 노려보는 순간, 평사제들은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한편 세자르는 물품의 입출고를 정리한 서류를 팔랑팔랑 넘겨 보다 말고.

탁.

더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서류철을 닫아 버렸다.

그 소리에, 사제들은 흡사 채찍으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바짝 어깨를 움츠렸다.

“대신전에 보고한 물품과, 실제 보관하고 있는 물품 개수가 어째…….”

세자르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맞는 게 전혀 없네요?”

“그, 그건…….”

어찌할 바 몰라 하던 차석사제가 갑자기 평사제들을 노려보았다.

“이, 이런 건 자네들이 알아서 잘 관리해야 할 것 아니야!!”

세상에, 반말을 하네?

나는 정말 놀랐다.

사제들끼리는 기본적으로 신분에 상관없이 존댓말을 쓴다.

신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의미였다.

그 규칙이 어찌나 엄격한지, 하다못해 교단의 수장인 셋째 아빠조차 꼬박꼬박 모두에게 존대를 하는데…….

하지만 차석사제는 재차 언성을 높일 따름이었다.

“내가 바빠서 놓치면 자네들이 알아서 손을 봐야 할 것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잘 챙기겠습니다.”

평사제들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도 저 무례한 언사에 반발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차석사제는 아주 오랫동안 평사제들에게 반말을 지껄이며 지내 왔던 것 같다.

동시에 차석사제가 비굴한 미소로 세자르를 돌아보았다.

“그, 평사제들이 다소 게으릅니다. 하지만 제가 앞으로 더 꼼꼼히 살펴볼 터이니…….”

“아하, 그러니까 지금.”

그 꼴을 지켜보던 세자르가 나긋한 어조로 되물었다.

“스스로가 관리 감독에 소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건가요?”

“예?”

차석사제가 화들짝 놀랐다.

“아까 전부터 평사제들을 질책하기만 할 뿐, 스스로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던데.”

세자르가 시큰둥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차석사제의 지위를 저들에게 넘기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저, 저는……!”

“애초에 관리 감독을 쓰레기같이 했으니, 그 쓰레기 같은 지휘에 따르느라 평사제들이 저렇게 고생하는 것 아닐까요?”

쓰레기.

그 노골적인 모욕에 차석사제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하지만 세자르의 독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평등하다는 교리가 있지 않나요? 그러니…….”

“대, 대사제님!”

“평사제들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말고.”

세자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재차 못을 박았다.

“멋대로 말을 놓지도 마세요.”

“…….”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컥……!”

차석사제가 바짝 어깨를 굳히고는, 손톱을 세워 가슴팍을 그러쥐었다.

부릅뜬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대, 대사제님, 숨, 숨이…….”

응?

나는 다소 당황하여 차석사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동시에 세자르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를 곁눈질하더니,

“이런.”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헉, 허억, 헉……!”

차석사제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인 채 거칠게 숨을 몰아 쉰다.

살찐 턱을 따라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세자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입장이 바뀐 기분이 어떻습니까?”

“대, 대사제님.”

“당신이 남을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는 그만큼, 남도 당신을 짓밟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요.”

허리를 숙인 세자르가, 솜털처럼 보드라운 목소리로 차석사제에게 속삭였다.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사람들입니다.”

“허억, 허억, 헉…….”

“그러니, 알량한 차석의 지위를 가졌다고, 다른 사제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았으면 해요.”

차석사제는 겁에 질린 눈초리로 세자르를 올려다보았다.

세자르가 반달처럼 눈을 휘어 보였다.

“대답.”

“아,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좋아요.”

세자르가 얼어붙은 차석사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고는 두어 번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자, 일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사제들은 바짝 기합이 들어가서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자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사제들에게 합류하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 그렇지. 티티 양은 미리 영주관에 돌아가 있으면 어떨까요?”

“네? 왜요?”

“그야 티티 양은 사제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세자르가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내 딸의 손에 어떻게 먼지를 묻히겠어요?”

“…….”

“…….”

“…….”

침묵이 흘렀다.

두 평사제는 물론이고,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차석사제까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이 민망함은 몇 번이나 겪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긋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 일하러 갈까요?”

“아니, 티티 양. 티티 양까지 굳이 일할 필요는 없…….”

세자르가 득달같이 나를 만류하려 들었으나,

“일.하.러 갈.까.요?”

나는 상냥하게 눈매를 접으며 재차 또박또박 말했다.

“……네에.”

세자르는 시무룩하게 양어깨를 늘어뜨렸다.

딸 바보에게 빌미를 주지 마시오.

다년간 세 아빠들 밑에서 살아온 바, 이만한 진리도 없었다.

* * *

신전의 물자 조사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일단 마무리가 됐다.

“아으으.”

나는 마차에 몸을 싣자마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졌다.

‘정말, 여태까지 이 신전이 어떻게 굴러간 건지 모르겠다니까?’

나는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장부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서, 약초 다발이며 붕대 같은 소모품들은 일일이 숫자를 세 봐야만 했다.

그나마도 평사제들만 대략적인 물자의 흐름을 기억하고 있을 뿐.

‘신전의 수장인 차석사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담?

최소한 자기 신전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속으로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그때.

세자르가 조그맣게 날 불렀다.

“티티 양.”

“네?”

내가 세자르를 돌아보았다.

세자르는 어쩐지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아까 전…….”

그렇게 운을 떼 놓고도, 세자르는 한참을 입술만 달싹였다.

마치 너무 미안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그 후.

세자르가 한숨을 내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험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요.”

응?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험한 모습이라뇨?”

“아까, 차석사제에게…… 있잖아요.”

세자르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티티 양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는데.”

아니, 그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어?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세자르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다.

“신성력도…… 티티 양 앞에서 그렇게 함부로 발해서는 안 됐어요.”

“저, 셋째 아빠?”

“제가 좀 더 티티 양을 배려했어야 했는데. 아까는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그만…….”

으음.

나는 미간을 좁혔다.

뭐, 세자르가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는 이해를 못 할 건 아니었다.

신성력은 보통 마기와 상극이니까.

하지만.

‘너무 쓸데없는 걱정이 아닌가 싶은데.’

애초에 저 정도의 신성력에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면, 난 인간계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다.

그러니까.

‘굳이 저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는데.’

물끄러미 세자르를 바라보던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 정도 신성력으로는 제게 아무런 해도 안 된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전 괜찮다니까요?”

하지만 세자르의 표정은 영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세자르가 저렇게 처져 있는 모습은,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거기다, 솔직히 말하자면요.”

그랬기에 나는, 아주 커다란 비밀을 이야기하듯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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