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셋째 아빠가 차석사제님을 혼내 줘서, 속이 시원했어요.”
“……그랬나요?”
“그럼요!”
나는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제야 세자르도 조금 표정이 밝아졌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셋째 아빠의 기를 조금 더 세워 주도록 할까.
“제가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티티 양.”
“만약 제가 순혈 마족이었다면, 셋째 아빠 같은 좋은 아빠를 만날 수 없었을 것 아니에요?”
진심에 적당히 과장을 섞어 그렇게 말하자.
세자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음, 역시.’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셋째 아빠는, 얄미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표정이 가장 잘 어울린다.
내 마음에 쏙 드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세자르가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그렇다면 이제 라키어스를 탈탈 털어 볼 차례로군요.”
네?
* * *
세자르는 영주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당장 영주의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라키어스.”
“스승님?”
집무실에 앉아 있던 라키어스가 가만히 세자르를 올려다보았다.
세자르가 삐딱하게 질문을 던졌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요?”
“…….”
세자르가 저렇게 느닷없이 들이닥쳤음에도, 라키어스는 전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에 가깝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는 듯한데…….
“어째서 차석사제를 처벌하지 않았죠?”
세자르가 냉엄한 시선으로 라키어스를 응시했다.
“몰랐다는 변명은 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그런 머저리로 교육시키지 않았으니까.”
“…….”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라키어스를 향해, 세자르가 차게 웃으며 재차 되물었다.
“내가 왜 사제들에 대한 처벌 권한을 넘겼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건.”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넘긴 거라는 것쯤, 라키어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라키어스는 바짝 긴장했다.
나 또한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나도, 라키어스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세자르는 저렇게 웃을 때가 제일 무섭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라키어스 당신은 직접 저들을 처벌하는 대신, 내게 편지를 보냈죠.”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라키어스를 향해, 세자르가 나긋하게 되물었다.
“왜 당신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내가 대신 말해 볼까요?”
회색 눈동자가 라키어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입술에 어린 우아한 미소와는 달리, 그 눈동자에는 미소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신전의 면이, 더 나아가 내 자존심이 상하는 게 걱정스러웠던 거죠.”
“…….”
정곡을 찔렸는지, 라키어스가 입술을 당겨 물었다.
세자르가 매섭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를 불러낸 거예요. 대사제가 직접 고위 사제를 처벌하는 편이, 이쪽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라키어스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세자르가 대뜸 라키어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키어스. 당신이 내 밑에서 몇 년을 수학했었죠?”
“……대략 7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무려 7년이에요.”
세자르가 나긋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이 같은 배려를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것조차 배우지 못했나요?”
“물론 그런 의도도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라키어스가 조금 억울한 얼굴이 되어 항변했다.
“저는 황자고, 상대는 신전 소속의 고위 사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자칫 잘못했다가는…… 황가와 신전 사이의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하, 정치적인 이유로 내린 판단이다?”
세자르가 귀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정말로 그런 판단하에 행동한 거라면, 라키어스는 아직도 너무 무르군요.”
“……스승님.”
“이왕 정치적으로 나갈 거라면, 내 이름을 끌어다가 차석사제를 완전히 찍어 눌렀어야죠.”
“예?”
라키어스가 놀란 눈으로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기겁했다.
‘오늘 저녁 식사는 닭고기로 합시다.’라고 말하듯, 평연한 어조인 것까지 기가 막혔다.
아니, 세자르 정도면 저 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지 않아?
한편 모두를 기겁하게 한 폭탄 발언을 떨어뜨린 주제에, 세자르는 얄미우리만치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렇잖아요. 대신전의 수장인 대사제가 당신의 스승인걸요?”
“아, 아니. 스승님. 지금 무슨…….”
“그 유용한 무기를 여태껏 안 쓰고 놓아뒀다니. 가르친 보람도 없이 아직도 헛똑똑이에요.”
라키어스의 동공은 이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나도 그리 다른 꼴은 아니리라.
그런 우리들을 향해, 세자르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그럼 이럴 때에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알려 드리지요.”
흠흠, 목을 가다듬은 세자르가 들으란 듯이 줄줄 말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스승님의 천재적인 두뇌를 이 모자란 제자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
“…….”
나와 라키어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세자르를 응시했다.
“따라 해 보세요.”
“…….”
라키어스가 묵묵히 있자, 세자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재차 채근했다.
“뭐 합니까? 얼른 따라 하지 않고요.”
라키어스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빠르게 세자르의 말을 따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스승님의 천재적인 두뇌를 이 모자란 제자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세자르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어쩌겠습니까, 모자란 제자를 가진 내 죄지요.”
“…….”
라키어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도끼눈을 뜨고 세자르를 노려보았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라키어스 딴에는 세자르가 신경이 쓰여서 저렇게 한 건데, 세자르가 저렇게 칼처럼 선을 그어 버렸으니까.
다만 나는 은근히 현 상황이 흐뭇했는데.
‘두 사람 모두, 은근히 서로를 아낀다니까?’
세자르도 그렇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인류의 세 영웅이자 빛의 교단의 수장인 대사제였다.
그런 이의 이름을 끌어다 쓰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라키어스를 그만큼 염려하기 때문 아니겠어?
“뭐, 여기까지만 잔소리하겠습니다.”
세자르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지금까지 잔소리 다 하셔 놓고선…….”
그리고 라키어스는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 마디 토를 달았다가,
“아야!”
세자르에게 한 대 쥐어박혔다…….
“의약품, 비상식량, 의복까지. 재고가 아예 안 맞더군요.”
냉철한 얼굴로 돌아온 세자르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이따위로 물품을 관리하다니, 인간이라기보다는 돼지 새끼의 지능을 가진 게 아닐까 싶지만요.”
숨 쉬듯이 흘러나오는 독설에, 라키어스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짧게 혀를 찬 세자르가 라키어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내가 파악한 것 외로도 어떤 일탈을 저질렀습니까?”
“일단 이것부터 받으십시오.”
라키어스가 세자르를 향해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저희가 신전에서 지원받았던 물자의 내역입니다. 비교해서 살펴보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어?
순간 내 눈이 동그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류철 위로 아빠들의 캐릭터가 그려진 점착 메모지가 앙증맞게 붙어 있었으니까.
내가 일전에 라키어스에게 보내 주었던 신제품이었다.
한편 라키어스는 내가 바라보는 쪽으로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다가,
“…….”
부끄러웠는지 귀 뒤가 붉어졌다.
‘세상에, 너무 귀엽잖아!’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지그시 억눌러 삼켰다.
어쨌든 라키어스가 내민 자료와 증언에 따르자면.
차석사제는 자신이 고급인력이라는 이유로, 고위 관료나 고급장교들의 큰 부상만 치료하려 할 뿐.
대부분의 일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연스럽게 치료 인력이 모자라게 되었고.
평사제들에게만 계속해서 업무가 과중되는 모양새였는데…….
“그리고 이건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사실 차석사제께서 카를로의 평균 생활보다 편안하게 지내시는 편이기는 합니다.”
대화 말미에, 라키어스는 최대한 순화하여 차석사제의 사치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자 세자르가 단박에 그를 한 줄로 요약했다.
“사치스럽다 이거죠?”
“……예.”
스승의 거침없는 말에, 라키어스는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글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 교단의 월급이 좀 짜요.”
“스승님, 제발 언사를 좀…….”
결국 라키어스가 앓는 소리를 냈으나, 세자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왜요? 짠 건 짠 거죠. 하여간 월급만으로는 절대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을 거고,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지도 않을 테니.”
회색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사재를 쓰든, 누군가가 지원을 해 주든 했을 텐데……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