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 *
잠시 후.
이야기를 얼추 마무리한 일행은 자리를 파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얼른 씻고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습니다.”
“…….”
“티티 양?”
“아, 네!”
세자르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딸아이를 불렀다.
자꾸 계단 아래를 힐끔거리던 타티아나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타티아나가 세자르를 돌아보았다.
“셋째 아빠, 먼저 올라가서 주무세요.”
“티티 양?”
“저, 라키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좋은 밤 되세요!”
인사를 남긴 타티아나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세자르는 오묘한 얼굴로 멀어지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타티아나가 라키어스를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다는 것쯤, 눈치챈 지 오래였다.
또한 그건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두 사람 모두 어린아이였을 때는 서로의 성별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친구로 지낼 수 있었겠지만.
시간은 흐르고, 그에 따라 감정도 변한다.
타티아나는 어느새, 라키어스를 이성으로 의식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다.
그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딸이 자라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군요.”
타티아나가 지금 나이까지 무탈하게 자란 건 무척 기쁜데.
별개로 품 안에서 곱게 기르던 딸이 괜히 멀어진 느낌도 들어서.
더 정확히는, 조금은 서운한 것 같기도 해서…….
세자르는 고개를 저으며 제 침실 쪽으로 돌아섰다.
어쩐지 오늘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이 조금 길어질 것 같다.
* * *
1층의 영주 집무실 앞.
나는 굳게 닫힌 방문 앞에 선 채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예전에는 정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라키어스를 대했었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길기는 긴 것 같다.
‘거기다…… 라키어스가 워낙에 훌쩍 자라기도 했고 말이야.’
아니, 아무리 한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까지 잘생겨질 필요가 있나?
마왕을 처단하고 세계를 구하는 데에 잘생김이라는 조건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정말, 심장 건강에 해롭단 말이야!
내가 속으로 괜히 툴툴거리고 있던 그때.
달칵.
“뭐야, 왜 자꾸 앞에서 얼쩡거려?”
갑자기 방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라키어스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시큰둥한 목소리로 핀잔을 준다.
“보고할 게 있으면 문 앞에 서 있지 말고…… 티티?”
뒤늦게 나를 발견한 라키어스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여긴 웬일이야?”
“으, 응? 아…… 그게.”
나는 어쩐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상해.’
예전처럼 장난도 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싶은데.
그러기는커녕, 라키어스에게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영 쉽지가 않았다.
결국 난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 그보다 넌 내가 문 앞에 서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그게.”
라키어스가 멋쩍게 미소 지었다.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행정관인 줄 알았어.”
……아니, 방 안에 들어앉은 채로도 그 미세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다는 거야?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얜 점점 더 아빠들을 닮아가는 것 같다니까?’
하기야 고작 열다섯의 나이로, 무려 세 용사들에게 ‘어디 가서 칼 맞아 죽을 녀석은 아니다’라는 평을 받았으니까.
인간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건 맞겠지만…….
“가끔 보고하기 난감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행정관들이 문 앞에서 우물쭈물 서 있을 때가 있거든.”
한편 내 경악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라키어스가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안, 놀랐지? 티티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문을 열지는 않았을 텐데…… 아, 일단 안으로 들어올래?”
“아냐.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나는 힐끔 라키어스 뒤편의 책상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책상 위로 어지럽게 흐트러진 서류들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었던 듯한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차,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닌데.
괜히 말이 심술궂게 튀어나왔다.
라키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무슨 이 시간까지 일을 하고 그래, 사람이 쉬기도 하고 그래야지. 그러다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 왜 입이 자꾸만 제멋대로 움직이는 거야!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
“풋.”
“……뭐야, 왜 웃어?”
나는 조금 당황했다.
뜻밖에도 라키어스가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아, 미안해. 그러니까…….”
한참을 키득거리던 라키어스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티티는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가로저은 라키어스가 내게 되물었다.
“그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티티야말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 같은데.”
“그게…….”
나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라키어스의 얼굴을 직접 보고 말을 하려니, 낯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래도. 셋째 아빠가 라키어스를 대하는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는걸.’
어차피 여기까지 찾아온 상황인데.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가는 것도 좀 이상하니까.
나는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 셋째 아빠 말이야.”
“세자르 스승님?”
“응. 그, 아까 전에…… 네 배려 같은 건 전혀 기쁘지 않다고, 조금 말씀을 심하게 하셨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셋째 아빠의 입장을 배려해 준 게 정말 기뻐.”
라키어스는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에 힘입어,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거기다 그런 말을 듣고도 전혀 화도 안 냈잖아? 나라면 분명 엄청 화났을 거야.”
……아니, 별다른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자꾸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걸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마워, 셋째 아빠를 신경 써 줘서. 그리고 아빠가 다소 심하게 말했던 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당연히 해야 할 감사 인사고, 사과일 뿐인데.
이상하게 뺨이 화끈거렸다.
도저히 라키어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그, 그럼 잘 자!”
나는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심장이 제멋대로 두방망이질을 친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울상이 되어서 계단 위를 뛰어 올라갔다.
* * *
달칵.
문이 닫혔다.
방문 너머로, 타티아나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라키어스는 그 소리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 후, 타티아나가 충분히 멀어졌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아하하!”
라키어스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이 정도 막말은 막말도 아닌데.”
사실 세자르가 모나게 구는 건 이미 익숙했다.
그의 스승인 세 용사들은 기본적으로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다소 제멋대로에, 기분파였으며, 심술궂은 쪽에 가깝다.
다만 스승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타티아나만이, 그들의 본성을 모를 뿐,
“그런데 그걸 또 사과하러 왔다니.”
라키어스가 이마를 짚으며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쉴 새 없이 걱정 가득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 모습까지.
모조리 5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5년이라.”
한참을 키득거리던 라키어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타티아나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었다.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오로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라키어스는 타티아나를 다시 마주했던 그 순간을, 눈을 감고도 그림처럼 그려낼 수 있었다.
갓 피어난 봄꽃을 닮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흐트러지고.
맑은 가을하늘을 한 조각 떼어 빚어낸 듯한 눈동자가, 라키어스를 똑바로 바라보던 그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됐어, 이러다 정말로 밤을 새겠어.”
라키어스는 고개를 휘저어 애써 타티아나에 대한 생각을 털어냈다.
산처럼 쌓인 서류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동시에 툴툴거리던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무슨 이 시간까지 일을 하고 그래, 사람이 쉬기도 하고 그래야지. 그러다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말을 곱씹던 라키어스가 한숨처럼 혼잣말을 했다.
“정말…… 티티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니까.”
황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천천히 질식해 가던 어린 라키어스.
그런 그를 구원했던 건, 타티아나가 그를 향해 내밀었던 자그마한 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타티아나는…….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자는 게 낫겠네.”
마음을 정한 라키어스는 훌쩍 몸을 일으켰다.
탁.
집무실의 불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