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 *
달조차 뜨지 않는 어두운 밤.
조도를 낮춰 놓은 나이트 스탠드 아래로, 한 여인이 비스듬히 침대에 기대어 편지를 읽고 있었다.
<대사제가 카를로에 도착했습니다.>
“하, 정말.”
여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편지가 와작 구겨졌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대사제가 내려갈 줄이야…….”
여인, 황비가 입술을 짓씹었다.
눈엣가시 같은 라키어스가 카를로의 영주로 부임한 지도 벌써 5년째.
여러 실책을 저질러서 평판이 깎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라키어스는 카를로를 훌륭히 통치해 내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라키어스가 루돌프의 황위 계승을 위협하게 될 거야.’
그래서 황비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 라키어스의 평판을 깎아내리기 위해 공작을 해 왔다.
라키어스의 평판이 높아진 건 카를로를 회복시킨 것에서 기인했다.
그러니 그 평판을 짓밟으려면,
‘카를로에 크나큰 타격을 줘야겠지.’
황비는 비릿하게 웃었다.
‘카를로뿐 아니라, 제국민 모두가 라키어스를 원망하며 책임을 물을 정도의…… 아주 큰 타격 말이야.’
그리하여 오랫동안 공을 들인 끝에, 고르고 고른 자신의 끄나풀을 신전 안에 심었고.
그 끄나풀을 카를로에 파견하는 것까지 성공했다.
더하자면, 그 끄나풀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두 번은 쓸 수 없다.
그 말은 즉.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살려야 해.”
황비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입술을 짓씹던 중.
문득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떠올랐다.
‘그대는 당신의 아들이 황제가 되길 바라고, 나는 마족의 대표로서 차기 황제의 어미와 친분을 쌓고 싶으니.’
순간 황비가 덜컥 굳어졌다.
목소리가 재차 유혹적으로 속살거렸다.
‘우리는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제 눈앞에서 루돌프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나뒹구는 모습을.
바닥을 적시던 선혈과, 허공을 노려보던 루돌프의 멍한 눈동자.
그 모든 것이 환상임을 알면서도, 그날 황비는 아들의 침실 앞을 배회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만큼 선명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황비는 와들와들 떨리는 제 손목을 반대편 손으로 콱 붙들었다.
‘달리 도와 달라고 말할 곳도 없어.’
잠시 후.
황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청할 수밖에.’
제 아들, 루돌프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루돌프를 통해 공고히 유지될 황비의 지위와, 필로멜 후작가가 얻게 될 영광을 위해서라면.
황비는 그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었다.
* * *
세자르는 본격적으로 신전의 기강을 잡기 시작했다.
평사제들은 물론이고, 차석사제까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하기야, 무려 대사제가 직접 나와서 일하는 상황이잖은가.
차마 차석사제가 농땡이를 칠 수는 없었겠지…….
그렇게 신전은 점차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는 듯했다.
한편 나는 라키어스의 성년식 준비에 골몰했다.
다만 거창하게 준비해 줄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여, 역시 생일이니까 케이크는 먹어 줘야겠지?’
……그렇게 케이크나 구웠지만 말이다.
다만 그 케이크를 보자마자, 세자르는 대번에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은 표정이 되었는데.
“설마 티티 양이 직접 케이크를 구우셨나요?”
어, 음.
왠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은 이 분위기는 도대체 뭐지……?
나는 눈동자만 굴리다가, 소심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 그게. 위에 과일이랑 초콜릿 장식만 올렸는데…….”
심지어는 생크림도 균일하게 바를 줄 몰라서, 주방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걸 내가 케이크를 준비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갑자기 양심이 아파 오는데.
한편 그 말에, 세자르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어쨌든 케이크를 직접 준비하기는 하셨다, 이 소리군요.”
서운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저, 셋째 아빠?”
“저도 티티 양이 직접 과일과 초콜릿 장식을 해 준 케이크를 받아 보고 싶었는데.”
“…….”
그 아련한 혼잣말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여태까지 나는 아빠들의 생일에 최선을 다했다.
라키어스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썼다고 자신할 수 있다.
아빠들이 마음에 들어 할 선물을 고르느라, 노라와 함께 얼마나 머리를 쥐어뜯었었는데!
“정말, 딸자식 키워 봤자 하나 소용없군요.”
그 말을 끝으로.
세자르는 새침하게 총총걸음으로 가 버렸다.
“저, 저기요?”
나는 당황스럽게 세자르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일 끝에.
마침내 라키어스의 성년을 축하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두 번 성년을 축하해 줬다가는, 어째 내가 골병이 들 것 같다…….
* * *
라키어스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태양이 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사위는 푸르스름한 어둠에 젖어 있었다.
버릇처럼 몸을 일으켜, 집무실로 향하려던 라키어스가 멈칫했다.
‘아, 그렇지.’
오늘은 라키어스가 성년을 맞는 생일이었다.
그렇다고 화려하게 파티를 열 상황도 안 되고,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라키어스는 모처럼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오전의 휴식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행정관들에게도 휴가를 주었다.
비록 기한은 오늘 낮 1시까지고, 오후에는 업무에 복귀하라는 명령도 함께 내렸으나.
‘정말이죠? 정말로 내일 낮 1시까지는 호출 안 하시는 겁니다?’
‘늦잠! 늦잠 잘 거야!’
고작 그 정도로도 행정관들은 거의 눈물을 흘릴 것처럼 기뻐했다…….
‘……내가 그렇게 빡세게 굴렸나?’
다소 멋쩍은 표정이 되었던 것도 잠시.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
카를로의 영주로 부임한 지도 벌써 5년.
처음 도착했을 때의 카를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
아마 스승님들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혼자서 버텨 내지는 못했을 것이리라.
그의 노력은 헛되지만은 않아서, 카를로는 이전과는 달리 꽤 도시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차근차근 발전하는 카를로의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아.’
라키어스는 목을 조르는 듯한 초조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내가 노력해야만…….’
그런데 그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뾰로통한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동시에 라키어스의 시야에, 창문 쪽 커튼이 바람을 머금어 동그랗게 부풀어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환기한 후에 제대로 문단속을 하지 않은 듯한데.
“이런.”
짧게 혀를 찬 라키어스가 창문을 닫으러 다가갔다.
촤아악-
커튼을 걷어 내자, 그 너머로 영주관의 정원이 펼쳐졌다.
라키어스는 저도 모르게 그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카를로는 제국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일까, 정원에는 뒤늦은 봄이 막 만개하는 중이었다.
얼어붙었던 땅은 부드러운 녹색으로 뒤덮였다.
겨우내 메말랐던 가지 위로, 연분홍색 복숭아꽃이 무리 지어 피었다.
“…….”
순간 붉은 눈동자가 복잡한 빛을 품었다.
마족들의 침공 이래로, 카를로는 인간들이 살아가기에 여러모로 힘겨운 땅이 되었다.
하다못해 영주관에 관상용으로 심는 꽃나무조차, 식용할 수 있는 과실수 위주로 심게 될 정도로.
하지만.
‘아름답네.’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라키어스는 충동적으로 창문을 밀어 열었다.
방 안으로 밀려드는 바람은 더 이상 차갑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봄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촉촉한 봄바람이었다.
그러던 중.
‘아.’
라키어스는 바람결에 밀려든 무언가를 무심결에 낚아 챘다.
손을 펴 보니 복숭아꽃 꽃잎이었다.
파르스름한 새벽빛에 젖어 든 분홍 꽃잎이 어쩐지, 타티아나의 봄꽃 같은 머리채를 연상시켜서일까.
……어쩐지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러고 보니…… 티티는 어째서 카를로까지 온 걸까?’
둑이 터져서 물길이 흐르듯.
한 번 타티아나를 떠올리자마자, 자꾸만 타티아나에게로 모든 생각이 쏠린다.
‘세자르 스승님이야 신전의 일을 처리하러 오실 만하지만, 티티는 딱히 올 이유가 없잖아.’
‘이곳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그래도 5년 만에 만났는데,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서 조금 아쉬운데.’
그리고 그 모든 생각 끝에는.
‘티티도, 아주 조금은.’
가당치도 않은 희망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내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와 준 게 아닐까?’
라키어스는 저도 모르게 꽃잎을 움켜쥐었다.
‘아냐,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리고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창문 너머로 맑은 햇볕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어느새 아침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