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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94)화 (95/163)

<100화>

“1황자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동시에 문 너머로 사용인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를레앙 공녀께서 아침 식사를 함께 하실 수 있는지 여쭈라 말씀하셨습니다.”

타티아나가?

뜻밖의 이름에, 라키어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무어라 전할까요?”

“기쁘게 함께하겠다고 전해.”

생각보다도 앞서 대답이 튀어 나갔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사용인의 인기척이 사라진 후.

라키어스는 황급히 욕실로 향했다.

‘진정해, 고작해야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는 것뿐이잖아.’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들떴다.

* * *

얼마 후.

빠른 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서던 라키어스가 멈칫했다.

“이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아침 식사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게 꾸며진 식탁이었다.

배 속에 갖가지 견과류와 과일을 넣어 통으로 구워 낸 닭 요리.

버터를 넣어 으깬 감자와 그레이비소스.

싱싱한 샐러드와 갖가지 음료들.

그리고 욕심껏 초콜릿이며 과일 장식을 올려놓은 탓에, 가운데가 주저앉을 위기인 생크림 케이크까지.

“라키, 생일 축하해!”

먼저 와 있던 타티아나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머리에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 곁에는 세자르가 타티아나와 똑같은 모양의 고깔모자를 쓴 채, 시큰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니, 잠깐만.’

순간 라키어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라키어스는 거세게 눈을 비빈 후 세자르를 다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이…… 고깔모자를?’

라키어스는 뭔가 우주적인 공포를 맛본 기분이었다.

“라키어스.”

때마침 세자르가 생긋 웃으며 라키어스를 불렀다.

“오늘 일을 다른 곳에 발설하면…… 알죠?”

그러고는 이를 꽉 악물며 라키어스를 협박한다.

그제야 라키어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하마터면 스승님께서, 때 이른 노환으로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 하신 줄…… 아야! 아, 생일이면 농담쯤은 봐주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나마 생일이라서 목숨을 건진 줄 아세요.”

한편 타티아나는 옥신각신하는 두 남자를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딱 한 마디를 했다.

“앉아요.”

그 명령 한 마디에, 두 남자는 얌전히 자리에 착석했다.

타티아나는 잔뜩 뾰로통해져서 투덜거렸다.

“정말, 이게 뭐예요. 모처럼 다 같이 모였는데 싸우기나 하고.”

“티티 양, 전 억울합니다. 이건 다 라키어스 녀석이 쓸데없는 헛소리를 해서…….”

“셋째 아빠도 잘한 거 하나도 없어요. 생일인데 좀 봐줄 수도 있잖아요?”

라키어스는 티격태격하는 두 부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저릿했다.

소중한 사람들이 그의 성년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망상에서조차 꿈꿔 본 적 없던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 풍경 자체가 어쩐지 환상처럼 느껴져서…….

‘만약 이 모든 게 내 망상이면 어쩌지.’

순간 라키어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을 수 없이 두려워진다.

그런데 그때.

타티아나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

“라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순간 라키어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식사 안 할 거야?”

타티아나는 여전히 눈앞에 있었고.

세자르 또한 시큰둥한 시선으로 라키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라키어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긋 미소 지었다.

드물게 유쾌한 기분이었다.

* * *

그렇게 라키어스의 생일 기념 아침식사를 끝마친 후.

나와 라키어스는 부른 배를 꺼뜨릴 겸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비록 북부라서 날씨 자체는 서늘했지만, 그래도 뒤바뀌는 계절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정원에는 뒤늦은 봄이 가득 피어나 있었다.

“와, 너무 예뻐.”

그야말로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분홍색 복숭아꽃이 꽃망울을 잔뜩 터뜨렸다.

푸른색과 분홍색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눈이 아리다.

나와 라키어스는 무리지어 피어난 꽃그늘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분홍 눈이 내린 듯, 떨어진 꽃잎으로 발밑은 온통 화려하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워.”

라키어스가 나를 돌아보며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설마하니 너한테 직접 성년을 축하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깜짝 놀랐어.”

“그야, 친구잖아.”

나는 어깨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네가 카를로로 떠난 후부터는 제도에 코빼기도 안 보이니 어떡해? 챙겨 주고 싶은 사람이 찾아와야지.”

“아, 설마.”

내 대답에, 라키어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내 생일을 챙겨 주겠다고 일부러 내려온 거였어?”

“당연하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여기까지 내려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나는 들으란 듯이 우쭐거렸다.

“나만 한 친구도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하라고. 알았어?”

“그러게, 이거 감사해야겠는걸.”

라키어스가 나지막이 키득거리던 그때.

봄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동시에, 내가 쓰고 있던 모자가 휙 날아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

당황한 내가 모자 쪽을 돌아보았으나.

그보다는 라키어스가 모자를 낚아채는 게 먼저였다.

“잡았다.”

씩 눈웃음을 지어 보인 라키어스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괜찮아? 머리가 다 헝클어졌네.”

“아, 응. 괜찮…….”

반사적으로 모자를 받아 들려던 나는, 멈칫 어깨를 굳혔다.

불쑥 뻗어 온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위로 모자를 푹 눌러 씌웠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검을 쥔 사람 특유의 단단한 손이었다.

“…….”

라키어스는 서투르게 모자와 목을 고정시키는 리본을 다시 묶어 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내 리본이 예쁘게 묶였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그 시선이…… 자꾸만 의식이 되어서.

‘이상해.’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핀잔을 줬을 텐데.

지금은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어렵다.

때마침 라키어스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음, 티티처럼 예쁘게 리본은 못 묶겠네. 그건 풀고 다시 묶는 게…….”

“아니, 이대로가 좋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

“…….”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락사락 꽃잎이 풀숲에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릴 뿐.

사위는 그저 고요했다.

“그,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잠시 머뭇거리던 라키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

“응?”

“빈말이 아니라, 네가 이렇게 찾아와 줘서 정말 기뻐.”

라키어스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거든.”

“……라키.”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잠시 말끝을 흐리던 라키어스가, 진지함과 민망함이 뒤섞인 얼굴로 말을 맺었다.

“아니었던 것 같아.”

“…….”

나는 물끄러미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라키어스는, 뭐랄까.

조금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마 내 표정도 라키어스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정말…… 이상해.’

우리는 그냥 어렸을 적부터 함께 어울렸던 친한 친구인데.

‘어째서 난 자꾸만 라키어스를 의식하게 되는 걸까?’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저 그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나는 어쩐지 숨을 쉬는 게 조금 어려워졌다.

한편 내 대답에, 라키어스의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정말로 기쁘다는 양, 티끌 하나 없이 환한 미소였다.

“그래? 티티도 나 보고 싶었어? 기쁘네.”

그런 라키어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 신경이 오로지 라키어스에게 쏠리고, 이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이한 감각.

그때,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다.

‘아.’

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바람에 휩쓸린 복숭아 꽃잎들이 분홍빛 바다처럼 일렁거렸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수천수만의 꽃잎 가운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 모아 빚어낸 듯한 청년이 서 있었다.

금실처럼 반짝이는 금발을 이마 위로 흩뜨리며, 붉은 눈동자를 반달처럼 휘면서.

나를 향해 웃는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고.

……불현듯 생각했다.

그리고.

바스락.

내 구두 밑으로 꺾인 나뭇가지가 밟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야, 방금?’

도대체 그 감각은 뭐였을까?

방금 전까지 내 전신을 지배했던, 세상에 단둘만 남아 있었던 것 같은 그 느낌.

그 기이한 감각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그게 아쉬웠…….

‘아쉬워?’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정말, 도대체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려, 나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나와 라키는 그냥 친구일 뿐이잖아. 무엇보다도 라키에게는…….’

나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저 애와 맺어질 운명의 짝이 있는걸.’

라키어스의 평생의 연인이 될, 이 세계의 여자주인공.

평생을 외면당하며 고단하게 살아왔던 라키어스에게 유일하게 먼저 다가와 주고,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그러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참 이상했다.

날씨는 봄꽃이 피어날 정도로 온화한데.

단단하게 숄도 둘렀으니 추울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삭풍이 부는 양 싸늘했다.

“……티.”

“…….”

“티티!”

헉.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솨아아-

다시 한번 바람이 밀려 들었다.

복숭아꽃 향기가 훅 끼친다.

바람결에 내 뺨 위로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손을 뻗은 라키어스가,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면서 투정 부리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랑 있을 때는 내게 집중해 주면 안 될까?”

“…….”

나는 그런 라키어스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 날도, 언젠가는 끝나고 말 거야.’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주인공, 라키어스가 처단할 절대 악.

마왕이니까.

‘그러고 보면, 여자주인공은 언제쯤 나타나게 될까?’

불현듯 나는 여자주인공에 대해 떠올렸다.

라키어스를 도와, 마왕을 처단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우는 여자주인공.

……오로지 그녀만이 라키어스에게 완벽한 행복을 줄 수 있겠지.

여자주인공이 나타난다면.

라키어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자리를 비켜 줘야겠지.

알고 있다.

잘 아는데도.

“…….”

폐부를 가득 메운 복숭아꽃 향기가 이상하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철컹거리며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응?’

나와 라키어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경갑을 차려입은 기사 한 명이 다급하게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영주관 안으로 발을 들이자, 기사가 목이 터져라 외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마수가 도시 외곽에 침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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