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 *
나는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었을까.
연분홍색 꽃잎이 팔랑거리며 눈앞을 가로질렀다.
“…….”
나는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정원이었다.
마음은 온통 엉망진창인데, 뺨 위에 와 닿는 봄바람만큼은 무척 부드러웠다.
“하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뭐야.’
사실 그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걱정할까 봐 염려한 라키어스의 호의 덕택이었는데.
그 긴급한 회의를…… 내 감정 하나로 망쳐 버렸다.
‘다들 무척 놀랐겠지.’
지금쯤 회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셋째 아빠는 정말로 신성 결계를 칠 생각인 걸까.
나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도대체가, 사람 걱정시키는 데에 뭐 있다니까!’
자괴감과 분노가 제멋대로 뒤섞여, 머릿속이 꼬인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다.
그런데 그때.
“티티 양.”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셋째 아빠.”
세자르였다.
세자르는 드물게 주눅이 든 목소리로 내게 말을 붙였다.
“많이 놀랐나요?”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세자르가 안절부절못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걱정했다면 미안해요. 다만 이편이 모두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
“저도 알아요.”
나는 날 선 목소리로 세자르의 말을 끊어냈다.
“셋째 아빠가 제시한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쯤은요.”
“…….”
세자르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애써 숨을 고르며, 감정을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성물이 기능을 멈췄고, 마수들이 카를로 안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상황.
지금은 기존에 배치된 병력들이 마수들을 막아 내고 있다지만, 그래 봤자 아주 짧은 시간을 버는 정도겠지.
그 말은 즉.
영지민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장 결계가 복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세자르가 시간을 벌어 준 틈에, 다른 영지에서 사제를 지원받아 성물부터 복구하고.
기사단을 파견하여 카를로 안에 남아 있는 마수들을 소탕한다.
그래, 알고 있다.
머리로는 다 알고 있지만…….
“싫어요.”
최대한 또렷하게, 어른스럽게 말하고 싶었는데.
막상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저는…… 싫어요.”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세자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하려 드는 게, 정말 싫어.’
나는 이미, 세 아빠들이 너무나도 소중해져 버렸는데.
아빠들이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가지 않는데.
아빠들이 조금의 위험이라도 감수하려 드는 게, 이제는 참을 수가 없는데…….
“저더러 이기적이라고 하셔도 할 수 없어요.”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터져 나온 건 눈물이었다.
“세상에, 티티 양. 왜 울어요? 제가 뭔가 잘못 말하기라도 했나요?”
당황한 세자르가 어떻게든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윽, 흐윽.”
굵은 눈물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는데.
한 번 터진 눈물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는 카를로의 사람들보다는 역시…….”
나는 옷소매로 마구 눈가를 문지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셋째 아빠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요.”
“…….”
그러자 세자르가 멈칫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한참 동안 말을 고른다.
그러고는.
“나도 그래요.”
응?
뜻밖의 대답에, 나는 젖은 눈으로 세자르를 올려다보았다.
세자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도 티티 양이 제일 중요하답니다.”
“……셋째 아빠.”
“이번에 신성 결계를 펼치려고 한 것도, 그래서예요.”
세자르가 고개를 내려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온화한 회색 눈동자가 날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영지민들뿐 아니라, 티티 양을 보호하고 싶으니까.”
“…….”
내 눈에 고인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면서, 세자르가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그래서 그런 거랍니다.”
그러고는 씩 눈매를 휘며 말을 덧붙인다.
“뭐, 그리고 저도 이렇게 젊은 나이에 무덤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고요.”
“네에?”
“그렇잖아요. 아주 혹시나 이번 일로 티티 양의 몸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키리오스와 지크프리트가 아마 절 어디다 묻어 버릴 것 같은데요.”
“아니, 무슨 그런 농담을 다 하세요?”
나는 울던 와중에도 기가 막혔다.
그러자 세자르는 얄미우리만치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신 앞에서 맹세컨대, 진담인데요?”
“…….”
어이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세자르가 여상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에 앞서, 저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테지만요.”
……정말, 참아 보려고 했는데.
다시 한번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내자, 세자르가 양손으로 부드럽게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그렇게 눈을 비비면 안 돼요. 다음 날 눈이 붓는다고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그럼요. 티티 양은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걸요.”
세자르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나는 그만 폭발해 버렸다.
“셋째 아빠는 보통 중요한 사람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해요?!”
“티, 티티 양?”
당황한 세자르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까 전만 해도 그래요!”
나는 세자르의 옷깃을 와락 움켜쥔 채, 잔뜩 언성을 높였다.
“신성 결계가 얼마나 몸에 무리가 되는지 잘 알면서!”
“그, 잠시만 진정하고…….”
“어떻게 제 앞에서, 딸 앞에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한다고 선뜻 말할 수가 있어요?!”
“음, 그건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가 걱정하다 못해 쓰러지는 꼴 보고 싶으신 거예요? 네?!”
나는 세자르를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알았으니까 울음부터 그쳐요. 네?”
세자르는 내 등을 어설프게나마 토닥여 주었다.
“티티 양이 이렇게까지 울 일이 아닌걸요. 그러니까 좀 진정하고…….”
“울 일이 아니라고요?!”
기가 막힌 내가 재차 언성을 높였다.
“그럼요.”
세자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신성 결계로 몸에 무리가 갈 거였다면, 다섯 마왕을 토벌하던 때 이미 죽지 않았을까요?”
세자르는 필사적으로 나를 달래려 들었다.
‘아니, 지금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원망스럽게 세자르를 노려보다 말고, 불쑥 되물었다.
“그럼 셋째 아빠는, 제가 셋째 아빠랑 똑같은 일을 해도 괜찮아요?”
순간 세자르가 덜컥 굳어졌다.
얼굴까지 창백하게 질려서는 언성을 높인다.
“아니, 티티 양이랑 저랑 같습니까?!”
“그것 봐요.”
“…….”
내가 새치름하게 쏘아붙였다.
드물게 말문이 막힌 세자르가, 한참을 어물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서 옛 성인께서 입장을 바꿔 봐야 아는 게 있다고 말씀하셨군요.”
“…….”
그러고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티티 양이 걱정할 일 없도록 최대한 조심할게요. 네?”
“…….”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 상냥함이 너무 소중해서.
그리고 간신히 잊고 있었던 내 비밀이 다시금 떠올라서.
나는 마왕이고, 이들은 나를 죽여 없애야 마땅할 용사들이며.
그리하여 언젠가는 이 상냥한 사람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쳐서…….
“정말 나빠…….”
다시 한번 후드득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세자르를 붙든 채, 오래오래 울었다.
* * *
한참 후.
간신히 울음을 그친 내게, 세자르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나요?”
“말 걸지 말아요.”
“…….”
내 살벌한 반응에, 세자르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내 알 바인가?
‘흥.’
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온통 연분홍빛으로 물든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평화로운 풍경과는 달리.
바위를 얹은 양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난 정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네.’
한숨만 푹푹 내쉬던 나는, 힐끔 세자르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자르는 안심하라는 양 빙긋 웃어 주었다.
……정말 사람 속도 모르고.
‘뭔가, 셋째 아빠가 신성 결계를 하루라도 덜 칠 방안이 없을까?’
나는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꽃잎들을 노려보며,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하다못해 마수를 내쫓을 수만 있으면…… 잠깐.’
순간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어서였다.
‘마수를…… 내쫓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