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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98)화 (99/163)

<105화>

평생을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살아왔다.

비록 인류에게 환멸을 느낀 적도 여러 번이지만, 그래도 인류를 그 누구보다 위했노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 인류 전체보다도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만약 타티아나가 위험에 처한다면, 과연 자신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타티아나에게 달려가지 않을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이것 참.’

쓴웃음을 지은 세자르가 뒤돌아섰다.

어쨌든 지금은 그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카를로의 영지민들을, 얄미운 제자 녀석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 * *

말을 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파르스름한 새벽을 귀퉁이부터 살라 먹으며 아침 해가 뜨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부터 은빛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올라왔다.

까마득히 높은 곳까지 치솟은 빛줄기는, 반원형으로 둥글게 펼쳐지는가 싶더니 전 카를로를 감쌌다.

세자르의 신성 결계였다.

“…….”

나는 이를 악물며 고삐를 바투 쥐었다.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약초를 찾아내어, 세자르가 신성 결계를 펼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

그러니까 그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 * *

거의 새벽부터 쉴 새 없이 말을 달렸는데도, 첫 번째 마을에 도착하니 해가 머리 위로 높게 솟아오른 오후가 되어 있었다.

“여기인가?”

말에서 뛰어내린 라키어스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 영주님.”

뒤따라 말에서 내린 기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뭐랄까, 제국 어디에서나 일상적으로 볼 수 있을 법한 흔한 마을이었다.

다만 지금은 마수의 침입 때문에 온통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여기는…… 그나마 큰 피해가 없는 마을이라고 했잖아.’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벽과 땅은 온통 그을렸고, 불을 끄는 데 사용한 양동이 등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집기들을 불타는 집에서 다급하게 끌어냈는지, 구석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제멋대로 쌓아 둔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다들 두려워 보여.’

잔뜩 겁에 질린 농민들이 조그만 창고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품 안에 소중하게 아이를 끌어안은 아낙의 모습이 유난히도 눈에 밟혔다.

때마침 라키어스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화재 때문에 집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급한 대로 농기구 창고를 비우기는 했습니다만, 저들이 다 들어가기에는 다소 좁아서…….”

“……그런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던 라키어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가 갖고 온 군용막사라도 저들에게 넘기게. 그럭저럭 바람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예? 그렇다면 기사님들은…….”

“걱정 마. 날도 따뜻하니 어디서든 알아서 자겠지.”

이미 익숙한 일인지, 기사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막사를 펼치고, 사람들을 안으로 들인다.

라키어스는 한참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당장 필요한 식량은 뒤따라오는 후발대가 지원해 줄 거야.”

“아, 그게 정말입니까?”

농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라키어스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늦어도 하루 내로 도착할 테니, 조금만 더 참아 줘.”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러던 중.

라키어스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다만 레이디가 한 명 있으니, 혹시 방 하나만 빌려줄 수 있다면…….”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라키어스의 말을 끊어냈다.

“저도 기사들과 함께하겠습니다.”

“공녀, 하지만…….”

“괜찮습니다. 특혜를 받으러 따라온 것이 아니니까요.”

“…….”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라키어스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공녀는 저와 함께하도록 해요.”

“네, 영주님.”

내게 옅게 눈웃음을 지어 보인 라키어스는, 다시 곁에 붙어 선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수에 대한 피해 현황부터 조사하게. 인명 피해와 가축, 농가 피해는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아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기사가 짧게 군례를 갖추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라키어스는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수습을 해 봤나 보다.

지휘하는 모습이 무척 익숙해 보인다.

그 후.

라키어스는 농민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화재가 났다고 들었는데…….”

“아, 예. 목초지도 모조리 다 탔습니다.”

농민이 시름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건초 창고는 살아남았지만, 그래도 목초를 모조리 잃어서 피해가 큽니다.”

“뭐든 필요한 게 있다면, 후발대가 도착하면 그들에게 요청하도록 해. 도와줄 거야.”

농민을 다독인 라키어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목초지는 어디에 있지?”

“예?”

“그 목초지를 좀 보고 싶은데.”

“아,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소 뜬금없는 요청이라고 느껴질 법도 한데.

농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도, 순순히 우리를 목초지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만큼 라키어스가 카를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거겠지.

나는 내 앞에서 걸어가는 라키어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굳건한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내 눈에는.

그 뒷모습이 조금은 피로해 보였다.

* * *

우리는 마침내 목초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럴 수가.”

한때 푸르렀을 목초지는 반 이상 타서 새하얀 재가 날리고 있었다.

그나마 푸릇푸릇한 곳이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전체 목초지의 비율에 비교하자면 아주 적은 부분이었다.

“…….”

“…….”

그 참혹한 광경에, 나와 라키어스는 말을 잃었다.

길을 안내해 준 농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완전히 타 버렸어요. 게다가 그나마 남은 생초들도 재로 뒤덮여서, 건초를 만들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고…….”

“……그렇군요.”

나는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듣기로, 이 마을은 마수 피해가 다른 곳보다 훨씬 적다고 했다.

피해가 적은 게 이 정도라면, 다른 마을들은 지금 얼마나 심각할까.

그런데 그때.

“그나마 마수들이 오두막은 건드리지 않아서 다행이지요.”

농민이 흘리듯 말을 덧붙였다.

어?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내 열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농민이 얼른 부연설명을 해 주었다.

“아, 농기구를 보관하는 조그만 오두막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쪽으로는 마수들이 얼씬도 안 해서…….”

“혹시 그쪽으로 가볼 수 있을까요?”

“예? 아, 알겠습니다.”

내 박력을 이기지 못한 농민이 쭈뼛거리며 움직였다.

마침내 우리 눈에 들어온 곳은, 손톱만큼 남아 있는 푸릇푸릇한 목초지였다.

조그마한 오두막의 지붕 위로도, 오두막 뒤에 세워 놓은 농기구 위로도, 목초지의 풀 위로도.

새하얀 재가 눈처럼 덮여 있었다.

그 재들만 봐도, 한때 이곳을 살라 먹은 화마가 얼마나 거셌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이곳을 모두 뒤져 보려면 한참 시간이 걸리겠지만…….

“티티, 우리 둘이서 약초를 찾아보기에는 너무 넓은데.”

라키어스가 난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게다가 재가 너무 많이 덮였어. 아무래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냐,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고개를 가로저은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한번 찾아보고 싶어.”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라키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났다.

“나도 도울게.”

* * *

나와 라키어스는 본격적으로 목초지를 뒤져 보기 시작했다.

그나마 찾아볼 곳이 그리 넓지는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뭐라고 했었지? 빨간 열매가 달려 있다고 했었나?”

“응, 맞아. 잎사귀는 가늘고 빽빽하게 나 있어.”

나는 쪼그려 앉은 채 수풀을 뒤져보았다.

손으로 수풀을 헤치자, 그 위에 앉았던 재가 확 일어났다.

“콜록, 콜록콜록!”

거센 기침이 터져 나왔다.

어찌나 기침을 세게 했는지, 찔끔 눈물이 날 정도였다.

라키어스가 걱정스럽게 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아, 응, 괜찮…… 콜록!”

“정말, 뭐가 괜찮다는 거야?”

라키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꺼냈다.

“일단 코와 입이라도 가려 봐.”

“아, 고마워.”

손수건을 얼굴에 두르자, 한결 숨 쉬기가 나았다.

라키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승님들께서 네가 이렇게 재투성이 목초지를 뒤지고 있는 것을 아시면, 분명 날 죽이시려 할걸.”

“미안, 미안.”

난감하게 웃은 나는, 재차 매의 눈으로 수풀들을 살폈다.

“그래도…….”

수풀을 헤치는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 약초, 꼭 찾아내고 싶으니까.”

“알지, 왜 모르겠어.”

라키어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수풀을 헤치기 시작했다.

“누가 스승님들 딸 아니랄까 봐, 고집은 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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