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 사물을 분간하기도 다소 어려워질 정도.
하지만 한참을 목초지를 뒤져 봐도 약초는 도무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키어스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붙였다.
“해가 거의 다 졌어.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편이…….”
“아냐, 조금만 더 찾아볼게.”
그러자 라키어스의 목소리가 조금 엄격해졌다.
“티티, 넌 이만 쉬어야 돼. 그렇지 않아도 몸이 건강하지는 않잖아.”
“……그건.”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기 발작은 아직도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비록 어렸을 때보다는 발작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한 번 발작이 일어나면 몇 날 며칠을 침대에서 앓아야만 했다.
또한 발작은 보통 몸이 무리할 때마다 오고는 했다.
라키어스는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승님들은 차치하더라도, 나도 네가 무리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라키, 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온 것도 나는 많이 양보한 거야.”
나는 망연한 시선으로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라키어스는 복잡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자꾸 고집을 부리면 돌아가라고 할 수밖에 없어.”
“…….”
알고 있었다.
라키어스가 이미 나를 많이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쯤은.
‘하지만.’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해?’
적어도 약초에 대한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머릿속이 온통 혼란했다.
‘아니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실 그런 약초는 없었던 거라면.
나 때문에 라키어스가, 기사들이, 모두 헛고생을 하고 있었던 거라면…….
“…….”
누군가가 목을 조이는 듯 초조했다.
“티티.”
라키어스가 다시 나를 채근했다.
그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윽.”
몸을 일으키던 내가 커다랗게 휘청거렸다.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 있어서, 다리에 힘이 빠진 탓이다.
“티티, 괜찮아?!”
라키어스가 황급히 손을 뻗어 나를 부축했다.
“그러게 너무 무리하고 있다고 했잖아.”
“…….”
“혹시 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무슨 낯으로 스승님들을 뵐 수 있겠어?”
라키어스는 계속 무어라고 계속 떠들어 댔으나, 나는 그 말에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홀린 듯이 내 발아래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라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고…….”
“라키!!”
나는 그의 옷자락을 마구 잡아당기며 라키어스를 불렀다.
화들짝 놀란 라키어스가 내게 되물었다.
“왜 그래?”
“이, 이거. 이것 좀 봐.”
온통 재를 뒤집어쓴 풀숲 사이로, 내 손바닥만 한 풀 한 포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가지 위로 초록색 잎이 빽빽하게 뻗어 나왔다.
그 밑으로, 빨갛고 조그마한 열매들이 조롱조롱 맺혀 있었다.
라키어스가 경악하여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거야?”
“응.”
나는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을 뻗어 약초를 뜯어 낸다.
가지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가느다란 잎사귀, 빨갛고 조그만 열매들, 코를 찌르는 쌉싸름한 향기까지.
모조리 기억 속 그대로였다.
동시에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찾았어…….”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약초를 움켜쥔 채 낮게 흐느꼈다.
* * *
나와 라키어스는 마을로 귀환했다.
늦게까지 마을의 일을 돕던 기사들은, 우리를 보며 기함했다.
“아니, 도대체 무엇을 하시다가 온 겁니까?”
“꼴은 그게 뭐고요?”
하기야 그럴 법도 하다.
옷에는 온통 풀물이 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투성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후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의 수확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 약초를 시작으로 약초들을 몇 포기 더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무어라 한들, 오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한편 라키어스는 당장 기사부터 한 명 불러들였다.
“트루도 경.”
그러고는 기사의 품에 약초가 든 가방부터 안긴다.
“이걸 들고 당장 영주관으로 귀환하도록 해.”
“예? 이 풀은 도대체 뭡니까?”
“그 식물에 마수를 쫓는 효능이 있을 수도 있어.”
순간 트루도 경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내가 이런 문제로 농담하는 거 봤나? 빨리 가.”
“예!”
트루도 경은 가타부타 말조차 없이, 당장 마구간으로 떠났다.
나는 흘끔 라키어스를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이 늦은 시간에 이동하면 위험하지 않을까? 차라리 아침 일찍 보내는 편이…….”
“티티, 넌 내 기사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라키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내 기사들이, 고작해야 밤에 말을 좀 달리는 정도로 위험해진다고?”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나는 내 기사들을 그렇게 연약하게 키우지 않았어.”
……뭔가 기시감이 드는 발언인데?
마치 세 용사들이 라키어스를 두고 하는 입버릇 같은…….
“일단은 약초를 최대한 빨리 조사해 보는 게 중요하니까.”
어깨를 으쓱인 라키어스가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 끌어당겼다.
“됐고, 너는 좀 쉬어야 해. 이리 와.”
“으, 응?”
“아무래도 마을 상황이 이래서, 욕실을 빌리기는 어려울 것 같고.”
주변을 돌아보던 라키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얼굴이라도 좀 씻자. 얼굴에 온통 재가 묻었어.”
서, 설마?!
황급히 손가락으로 뺨을 더듬어 보니, 얼룩덜룩한 재가 잔뜩 묻어 나왔다.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른다.
“나, 여태까지 이 꼴로 돌아다녔던 거야?!”
“응. 설마 몰랐어?”
라키어스가 장난기로 두 눈을 빛내더니,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아, 못 살아!”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로 양손을 감쌌다.
오를레앙 공녀, 아니, 마왕님 체면이……!
그런데 그때.
“그래도 뭐 어때. 세상에서 너보다 예쁜 애는 없는데.”
뭐?
나는 창피한 것조차 잊어버리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라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라키어스는 도리어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는 표정이었다.
“왜?”
“그, 지금 뭐라고……?”
“아, 너보고 예쁘다고 한 거?”
라키어스가 아주 당연하게 대꾸했다.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뭐라고 해?”
“…….”
그 담백한 태도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 건 이쪽이었다.
‘이건 이것대로 억울한데.’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어째 나만 라키어스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잖아?’
때마침 다른 기사가 큰 소리로 라키어스를 불렀다.
“영주님! 잠깐 이리 좀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미안. 나 가 봐야겠다. 그럼 이따 봐!”
라키어스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자리를 떴다.
“…….”
홀로 남겨진 나는, 다시 한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라키어스는 분명 아무런 사심도 없는 게 분명하다.
그런 거라면, 말 한마디로 사람을 설레게도 만들지 말았어야지!
나는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억울해! 이건 라키어스 잘못이라고!
* * *
기사들에게 향하던 라키어스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뾰로통한 얼굴이 된 타티아나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왜 갑자기 저렇게 기분이 저조해진 거지?’
라키어스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그래도.
‘차라리 지금이 나아.’
약초를 찾아낸 후, 땅을 그러쥔 채 펑펑 흐느껴 울던 타티아나의 모습이 아직도 눈 안에 선했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그때의 라키어스는 차마 제대로 위로조차 하지 못했다.
‘하기야, 전 카를로 전역에 걸친 신성 결계라니.’
아침 햇살을 머금고 은빛으로 퍼져 나가던 신성 결계.
그리고 말을 달리면서도, 차마 그 결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타티아나.
‘얼마나 두려웠을까.’
타티아나가 세 용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기에.
그녀가 겪어야 할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어서.
‘……티티는 언제나 웃기만 했으면 좋겠어.’
라키어스는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려면 내가 좀 더 강해져야겠지.’
세상에서 가장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것만 모아 빚어낸 듯한 소녀.
그 소녀가 환하게 웃어 주기만 한다면.
그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 * *
여차저차 간신히 물을 조금 얻어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기사들이 대충 끓인 스튜도 한 그릇 얻어먹은 후.
나는 일찍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내일도 강행군이 이어질 테니, 일찍 잠드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잠이 안 오네.’
난 자리에 누운 채, 말똥말똥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밤하늘 위로 사금파리 같은 별들이 흩어져 반짝거렸다.
하릴없이 별들을 노려보던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산책이라도 조금 하고 올 요량이었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