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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01)화 (102/163)

<109화>

“멈춰.”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

“…….”

온 세상에서 소리를 말끔히 지워 버린 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털썩!

먼저 쓰러진 쪽은 라키어스였다.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까 전부터 전신의 마력이 뒤틀려 있었으니, 몸도 정신도 한계였을 터.

라키어스에게 잠시 바라보던 나는, 그 앞에 서 있던 마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게 복종해.’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쏟아지고, 강물이 바다로 흐르며,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듯이.

저 마족은 내게 복종하는 게 당연하다는, 그러한 감각.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한 마족은…….

“…….”

두 눈이 멍해지더니,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곧장 호흡이 끊어진다.

마치 태엽 인형이 작동을 멈추기라도 하듯이.

기이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죽음에 대한 의문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키? 라키!!”

몇 번이고 라키어스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비틀거리며 라키어스 곁으로 달려갔다.

“아, 안 돼.”

고요히 눈을 감은 라키어스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호흡이 미약했고,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피, 피를 멈춰야 해.”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무언가 천 조각이 손에 잡혀서 끄집어냈더니, 손수건이었다.

“…….”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아까 목초지에서 약초를 찾던 때, 라키어스가 혀를 차며 내게 건넸던 손수건.

그리 먼 과거도 아닌데.

그때가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라키.”

나는 이를 악물며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등의 상처를 세게 눌러 지혈하자, 금세 손수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상처보다도 더 큰 문제는…….

‘마력이 너무 엉켜 있어.’

차라리 신체적인 상처는 괜찮았다.

라키어스는 세 용사들이 인정한 강자였고, 신체 능력 또한 압도적이었다.

비록 큰 부상이긴 하지만, 이 정도 상처는 적절한 치료와 함께 안정을 취하면 나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마력은 다른 문제였다.

진탕이 된 마력이 라키어스의 내부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순간 커다란 얼음 조각을 삼킨 것처럼 심장이 싸늘해졌다.

‘아냐, 할 수 있어.’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주 어렸을 때에도, 아빠들의 목숨을 갉아먹던 마기를 회수했었잖아. 괜찮아.’

그때의 마기는 내 것이었고, 마기와 마력은 다른 종류의 힘이었으며.

인간과 마족 혼혈인 나는 마력이 아니라 마기를 다루지만.

나는 그 사실들은 애써 무시하며, 라키어스의 몸에 손을 올렸다.

엉망이 된 마력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폭주할 것 같은 마력들을 정리하고, 가다듬는다.

“흣…….”

내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미리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마기를 운용하여 엉킨 마력을 정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인의 마력에 간섭하여 폭주를 가라앉히는 것 자체가 고난도의 일인데.

나는 지금 엄연히 다른 종류의 힘인 마기를 운용하여, 들끓는 마력을 진정시키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서 마기를 움직이던 나는, 문득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아.’

온몸을 꽁꽁 묶고 있던 무언가가 풀려나가는 듯한, 그런 상쾌한 감각.

가끔 고삐가 풀린 성난 말처럼 제멋대로 날뛰던 마기는 이제 고요하기만 하다.

‘……마기가, 제어가 돼?’

그 순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사위가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키어스.’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던 나는, 반사적으로 라키어스를 내려다보았다.

라키어스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호흡은 고르고, 피도 얼추 멎은 듯하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저, 정말 다행이야…….”

때마침 저 멀리서 일렁거리는 불꽃들이 나타났다.

횃불을 든 기사들이었다.

“오를레앙 공녀님?”

미심쩍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이내 경악했다.

“여, 영주님!”

다행이다.

드디어, 라키어스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왔어…….

강렬한 안도감이 온몸을 적셨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호화로운 방 안.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멈칫 어깨를 굳혔다.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서리는가 싶더니,

“죽었군.”

이내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미소 짓는다.

“우리 폐하께서 드디어 조금이나마 각성의 실마리를 잡으셨나 보지?”

이 일의 전말을 되짚어 보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느 날.

그가 새로이 포섭했던 인간 제국의 황비에게서 연락이 왔다.

‘라키어스를 죽이는 데에 힘을 보태 주십시오.’

황비는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고.

‘어려울 건 없지.’

때마침 무료했던 가주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황비를 위하여 황자를 암살하는 데에 동참한 건 아니었다.

사실 인간들의 황자 따위, 바르톨로아에게 있어 벌레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가주의 진짜 목적은 바로.

‘마침 잘 됐지, 우리 마왕께서 어디까지 각성하셨는지 궁금했는데 말이야.’

그건 바로 타티아나의 현 성취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여태까지 타티아나는 계속 세 용사들과 붙어 있거나, 최소 용사 한 명과 같이 있었다.

그래서 도무지 타티아나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것.

그러던 중, 타티아나가 약초를 찾겠노라며 자발적으로 세자르 곁에서 떨어져 나왔다.

바르톨로아 가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곧장 하급 마족에게 갖가지 술식을 걸어서 내보냈다.

술식은 총 세 가지.

첫째, 신체 능력을 한계까지 이끌어 내는 것.

단기적으로는 중급 마족 이상의 신체적인 능력을 뽑아낼 수 있다.

이 술식을 통해 하급 마족은 신성 결계를 통과하고, 라키어스와도 대등하게 맞붙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술식은, 귀찮은 것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벼운 결계를 형성하는 것.

물론 여기까지만 술식을 걸어도, 술식이 걸린 마족의 목숨은 거의 경각에 달할 테지만…….

‘뭐, 쓸모없는 목숨을 이렇게라도 사용해 주는 걸 감사히 여겨야지.’

바르톨로아 가주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 세 번째 술식은 타티아나가 마왕의 힘을 일부라도 각성할 경우 발동하는 종류였다.

마왕은 마족이라는 종족의 대표자로, 마왕으로 각성하는 그 순간 모든 마족들에게 절대적으로 군림한다.

그리하여 타티아나가 마왕으로서 마족에게 간섭한다면, 곧바로 목숨을 잃는 술식이었다.

정보를 탈취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우리 폐하께서…… 일부나마 마왕으로 각성을 하셨을 줄이야.”

가주가 두 눈을 빛냈다.

마족은 세 번째 술식이 발동하여 죽었다.

그 말은 즉, 여전히 마신은 타티아나만을 자신의 대리자이자 마왕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미약하게나마 타티아나도 마왕의 힘을 각성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재미있군.”

가주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비릿한 미소였다.

* * *

타티아나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동안 세자르는 한시도 딸아이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티티 양.”

딸아이의 얼굴은 그저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세자르는 막막한 얼굴로 딸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다섯 마왕을 처단하고, 온 인류를 구했으며, 역대 대사제 중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타고났다고 칭송받는 그는.

이 가냘픈 소녀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다.

‘분명…… 몸에는 이상이 없는데.’

타티아나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자르는 어째서 타티아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 그 이유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사제며 용사며, 그 이름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지.”

뜨거운 무언가가 목 위로 울컥 치받아 올랐다.

그 모든 이름은 타티아나를 깨우는 데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타티아나가 쓰러져서 실려 온 이래로.

세자르는 항상 현실에서 반쯤 발을 떼고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간신히 붙든 가느다란 이성을 누군가가 면도날로 갉작거리는 듯하다.

‘이래도? 이래도 미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물으며, 그를 자꾸만 절벽 끝으로 밀어낸다.

어떻게 하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내 목이라도 내어 주면 괜찮아질까?

그렇게, 세자르가 미친 듯이 고함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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