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라키어스?”
세자르도 뭔가 심각함을 느꼈는지, 미심쩍은 목소리로 라키어스를 불렀다.
동시에 라키어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차석사제가 사망했습니다.”
뭐라고?!
나와 세자르는 경악했다.
하지만 라키어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 추측하기로, 아무래도 차석사제가 제게 마력이 폭주하는 약을 먹인 것 같습니다.”
라키어스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랬다.
사실 우리가 귀환하기 며칠 전, 차석사제가 실종됐다고 했다.
라키어스와 타티아나가 워낙에 심각한 상태여서, 차석사제에게 누구도 신경을 쓰지 못했었는데.
그 와중에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차석사제의 행방을 찾아보던 중,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애런 평사제가, 차석사제가 기사단의 보급 창고에서 나오는 걸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라키어스와 함께 출정했던 기사들의 보급품을 전수 조사했고.
“……소금 병에 수상한 약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라키어스가 세자르에게 유리병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제가 다른 기사들과 같은 식사를 하는 부분에 착안해서, 소금에 약을 섞어 둔 것 같아요.”
“알겠어요. 일단 이건 제가 성분을 살펴보도록 하고.”
세자르가 심각한 얼굴로 유리병을 받아 들며 물었다.
“함께 식사했던 다른 기사들의 상태는 어떤가요?”
“딱히 이상은 없어 보였습니다.”
“하기야, 라키어스 외의 기사들은 마력을 다룰 줄 모른다고 했죠?”
사실 마력을 다룰 정도의 기사는 제국에서도 아주 희귀하다.
마력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급 장교로 임명받을 정도였다.
그러니 다른 기사들은 그 약물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는 않은 것 같지만…….
때마침 라키어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티티는 괜찮은가요?”
“네? 티티 양이요?”
“일전에 제 마력을 진정시켰지 않습니까. 티티도 저희와 함께 식사를 했으니, 분명 그 약에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서요.”
아차.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난 저 약에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는 반인반마고, 마기를 다루니까.
하지만 라키어스는 내가 인간인 줄 알고 있으니, 당연히 마력을 다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아…… 예, 티티 양의 몸에는 별문제가 없어요.”
세자르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제가 곁에 붙어서 직접 간병했으니까요. 아마 신성력으로 치유하던 도중, 약물이 함께 해독된 게 아닌가 싶어요.”
……너무 얼렁뚱땅 설명이 아닌가?
나는 조금 떨떠름해졌으나, 대사제의 권위란 정말 대단했다.
라키어스가 단박에 납득한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럼 다행입니다만…….”
세자르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 기사들은 내게 보내세요. 몸 상태를 살펴보죠.”
“예, 그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라키어스가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 후, 차석사제가 발견되기는 했는데…….”
라키어스가 말끝을 흐렸다.
차석사제는 도시와 마계가 이어지는 외곽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마수들에게 뜯어 먹혔는지, 시체는 뼈만 남아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고.
또한 시신이 훼손되었으니, 당연히 누가 술식을 써서 조종한 건지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유품이 남아 있어서 간신히 신원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제국 쪽이 아니라 마계 쪽으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마족들이 득실거리는 마계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겠다는 거지?
마치 처음부터 죽기를 작정하고 도망친 게 아니고서야…….
“그래서 일단은 차석사제와 접촉하여 자금을 지원해 주었던 쪽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라키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금방 찾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간이 걸려요.”
“그 정도인가요?”
“예. 이렇게 깔끔하게 흔적을 지운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상당한 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다들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리라.
차석사제와 접촉하여, 성물을 의도적으로 소홀히 관리하도록 유도하고.
그를 통해 영지 내에 마수들이 침입하도록 계획할 수 있을 정도의 거물.
그리하여 카를로의 피해가 커질수록, 라키어스의 목숨이 경각에 달할수록 유리해지는 사람들은…….
‘황비와 루돌프 2황자.’
바로 그들이었다.
* * *
“그래, 차석사제가 죽었다고.”
황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르톨로아가 도움을 주겠다고 하더니, 적어도 꼬리는 확실히 잘라내 준 듯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비는 아드득 이를 갈았다.
‘얻은 게 하나도 없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황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니, 오히려 손해만 보았지.’
이번 일로 신전 쪽에 간신히 잠입시켰던 차석사제를 잃었다.
세자르 몰래 간신히 한 명을 포섭해 둔 것이었고, 앞으로 그런 끄나풀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기에.
차석사제를 잃은 게 못내 뼈가 아팠다.
그에 반해, 바르톨로아의 도움까지 받았음에도 라키어스는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게다가 라키어스 측에서, 여태껏 차석사제가 받아 왔던 각종 혜택과 뇌물을 조사한다면.
역으로 이쪽이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들통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내가 할 일을 해야겠지.”
황비는 두 눈을 서늘하게 빛내는가 싶더니,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 불쑥 질문을 던진다.
“가스파르 남작은 입궁했나?”
“예,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이게.”
가스파르 남작.
이번에 차석사제에게 뇌물을 건네는 연락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크나큰 도박 빚을 진 남작은 여러모로 이용하기 적당했다.
도박 빚 하나를 갚아 주는 것만으로도 좌지우지하기 편했으니까.
한편 평생을 황궁에 발조차 들여 본 적 없던 남작은, 지금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화, 황비 마마를 뵙습니다!”
가스파르 남작은 거의 바닥에 엎드릴 기세였다.
그런 남작을 향해, 황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번에 차석사제에 관해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다는 건 알고 있을 걸세.”
“예, 예…….”
“그래서, 그 불미스러운 일을 정리해야 하는데.”
황비가 무심한 시선으로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어쩌겠나? 내게 충성을 바치겠나, 아니면…….”
겁을 집어먹고 어깨를 움츠리는 남작을 향해, 황비가 나긋하게 질문을 던졌다.
“내 등에 칼을 꽂겠나?”
“화, 황비 마마!”
“그건 자네의 자유일세. 다만.”
황비는 자못 관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후의 책임도 자네가 져야 하겠지.”
그 순간, 가스파르 남작의 뇌리에 필로멜 후작가에서 대신 갚아 주었던 어마어마한 도박 빚이 스쳐 지나갔다.
그 도박 빚을 회수하는 순간, 가스파르 남작가는 완전히 파산한다.
차라리 남작 혼자라면 상관없겠으나, 딸린 식솔들까지 모조리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결국 남작이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걱정하실 일 없도록,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황비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후.
라키어스는 본격적으로 차석사제와 연결된 고리를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고 했다.
차석사제와 접촉한 사람은 가스파르 남작이었는데, 정말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이었다.
그나마 특이사항은 도박 빚이 상당했다는 점인데.
가스파르 남작이 차석사제와 접촉하기 전, 그 빚이 갑자기 유산 상속 형식으로 깔끔하게 청산된 점은 기이했다.
하지만 빚의 청산 과정이 무척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기에, 그 부분을 따로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스파르 남작 본인이 모든 죄를 인정하고 순순히 감옥에 들어갔다.
그 후 심장 발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던데.
‘아마도 황비에게 꼬리 자르기를 당한 게 아닐까.’
그저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어쨌든, 오늘.
나는 세자르와 함께 제도로 돌아왔다.
지크프리트와 키리오스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야, 꼬마!”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키리오스가 날듯이 내게로 달려왔다.
“너 이제 괜찮아졌다며?!”
나를 번쩍 끌어안아 들어 올리고는 자리에서 빙빙 돌기 시작한다…….
아니, 왜 도는 거야?!
“우리 꼬마가 드디어 건강해진 거야? 나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어, 어지러워요!”
나는 비명을 지르며 키리오스의 어깨에 매달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내 몸을 답삭 들어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말, 갓 도착한 애를 데리고 뭐 하는 건가?”
지크프리트였다.
허리를 숙인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타티아나.”
그러고는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