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너무 속 보이지 않냐?”
때마침 키리오스가 들으란 듯이 빈정거렸다.
“내가 라키어스 편을 들려고 하는 건 아닌데, 솔직히 폐하께서 하시는 행동이 너무 치졸하잖아.”
으음, 그래도 상대는 황제인데.
너무 거침없이 막말을 쏟아내는 거 아냐?
하지만 그런 우려와는 별개로, 나는 키리오스를 만류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나도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누가 우리 아빠들을 건드리겠어?’
키리오스가 재차 열을 냈다.
“카를로가 웬만큼 안정화되고, 그 덕택에 라키어스의 명성이 높아지니까 그게 아니꼽다는 거 아냐?”
“……역시 그런 거겠죠?”
“당연하지. 카를로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땐 본척만척하다가, 이제 카를로를 다시 황제 폐하의 직할로 넣어 두겠다니.”
키리오스는 혐오감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완전,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먹는 꼴이잖아?”
……솔직히 그렇기는 하지.
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4년 전, 세자르가 신성결계를 펼쳤던 그때 이후로.
카를로는 단 한 번도 마수들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성물 일을 계기로, 신전에서도 믿을 만한 사제를 가려 뽑아서 보냈고.
마수를 쫓는 약초도 재배에 성공하여 각 마을에 보급했다고.
특히 라키어스는 수비 병력을 보강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서, 이제는 성물이나 약초의 도움이 없이도 자체적으로 국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제국 내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형성되었는데.
‘그 낙후됐던 카를로가 저렇게 성공적으로 안정화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1황자 전하께서 큰일을 하셨죠.’
‘맞아요. 아직 나이도 어리신데 저렇게 유능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일단은 라키어스를 향한 호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솔직히…… 현 황실에서는 카를로를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럼 현 황족들 중, 황족의 의무를 다하신 분은 결국 1황자 전하밖에 안 계신 거네요.’
그에 반하여 데카르트 황실에 대한 호감은 계속해서 깎여 나가고 있었다.
사실 그건 당연했다.
카롤링거가 데카르트에게 편입된 지도 시간이 한참 흘렀으니, 옛 카롤링거의 국민들은 결국 데카르트 국민이었다.
또한 황실에게는 국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황실은 옛 카롤링거 지역을 외면하며 그 의무를 방기한 것이다.
게다가.
‘옛 카롤링거 왕족들은 마지막까지 왕국민들을 지키다가 산화했다지 않아요?’
‘으음…… 역시 현 황실과는 여러모로 비교가 되네요.’
카롤링거에게는 끝까지 마족들과 맞섰다는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쇠락한 카롤링거를, 옛 카롤링거 왕족의 유일한 후손이자 현 데카르트 황실의 적장자인 라키어스가 다시 부흥시켰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라키어스가 이번에 제도로 올라오게 된다면…….’
슬쩍 키리오스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라키도 이번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할까요?”
제국의 어린 귀족 레이디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가 있다.
그건 바로 데뷔탕트 파티.
그 해의 성년이 되거나, 성년이 예정된 소녀들이 사교계에 진입하는 행사다.
각 지역에서는 지역의 최고 유력자가 데뷔탕트 파티를 열지만, 가장 크고 유명한 행사는 역시 황실에서 직접 여는 데뷔탕트 파티였다.
특히 황실 주최 데뷔탕트는, 황실에서 직접 참석할 인물들을 선별하여 초대장을 보냈기에.
그 파티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루돌프가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하던 해에는, 연회장을 엄청나게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고 했었지.’
라키어스에게는 데뷔탕트의 데 자도 말조차 꺼내지 않았으면서.
정말 치사하지 않아?!
……여하간,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데뷔탕트 파티는 한 달 뒤잖아요.”
“그래서?”
키리오스가 뚱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게, 그때쯤이면 라키도 귀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자 누군가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라키어스랑 데뷔탕트 파트너를 하고 싶어서 그러나?”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온 지크프리트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뇨!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
동시에 내 뇌리에 어떠한 이미지가 스쳐 지났다.
데뷔탕트 파티를 위해 화려한 정장을 차려입은 라키어스가, 내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었다.
‘아니, 왜 내 상상력은 이런 때에만 열심히 일하는 건데?!’
어쩐지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나는 괜히 내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세 아빠들은 그런 나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도 꼬마 파트너 할 수 있는데?”
“은근슬쩍 끼어들지 마라, 키리오스.”
키리오스의 말에,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핀잔을 주었다.
“법적으로 타티아나는 오를레앙 가문의 사람이니, 파트너는 당연히 내가 해야지.”
“야, 웃기지 마. 그딴 식으로 나올 거면 처음부터 꼬맹이를 에르하르트 가문에 넣었지!”
그렇게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와중.
세자르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때까지 라키어스 생각밖에 안 하다니.”
“세, 셋째 아빠?”
“정말, 자식을 애지중지 키워 봤자 다 소용없다니까요?”
나는 그만 질색하고 말았다.
“아, 다들 적당히 좀 해요!”
그런데 그때.
“음?”
키리오스가 갑자기 슬쩍 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흘끗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편으로는 커다란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다.
빛의 신이 인간들에게 진리를 설법하는 모습이 그려진 성화였는데.
“왜 그래요?”
세자르가 미심쩍은 얼굴로 키리오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리오스는 성화 앞에 바짝 다가설 따름이었다.
한참을 유심히 그림을 살펴보던 키리오스가 세자르를 불쑥 불렀다.
“야, 세자르.”
“뭔데요.”
“이 그림 한 번 뜯어 봐도 되냐?”
“…….”
잠시 침묵하던 세자르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군요. 감히 대사제 앞에서 성화를 훼손하겠다고 선언을 해요? 비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죠?”
“아니, 그림을 훼손하겠다는 게 아니라!”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비난에, 키리오스가 질색을 하며 항변했다.
“그냥 한 번 떼어 보면 안 되냐고!”
그러자 세자르가 비딱하게 대꾸했다.
“아, 성화를 훔쳐 가시겠다? 키리오스 당신이 대도의 꿈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내가 성화를 훔쳐 가서 어디다 쓰는데? 빛의 신 따위 관심도 없어! 우리 꼬맹이 초상화라면 모를까!”
“오, 대사제 앞에서 신성모독까지? ……하지만 저도 티티 양의 초상화는 갖고 싶군요.”
……이 아빠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한 끝에.
키리오스는 간신히 왜 그림을 들어내 보려고 하는지 이유를 말할 수 있었다.
“이 그림 뒤편에서 뭔가가 느껴진단 말이야.”
“뭔가가 느껴진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마력?”
미심쩍은 어조로 대꾸한 키리오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기운이 느껴진다고. 마력이라고 확신하기에는 다소 이질적이지만.”
“…….”
세자르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키리오스를 흘겨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키리오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할 수 없네요.”
어깨를 으쓱인 세자르가 성큼성큼 그림 쪽으로 다가갔다.
“확인은 해 봐야죠.”
그리하여 세자르가 직접 그림을 들어냈다.
그 후.
“……이건?”
세자르가 미간을 구겼다.
겉보기로는 평범한 벽처럼 보였으나, 벽돌 일부분에서 특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 기운은 도대체 뭐지?’
내 눈에도 보일 정도이니, 이미 아빠들도 모조리 눈치챘을 터.
“…….”
세자르가 손에 신성력을 휘감고 조심스럽게 벽돌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쨍!
기운이 커다랗게 흔들리며 기운이 흔들렸다.
이 장소가 평범하게 보일 수 있도록, 감각을 속이는 술식이 파훼된 것이다.
드륵, 드르륵-.
벽돌이 진동하며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더니.
벽돌들이 움직여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 후.
“이게 도대체…….”
세자르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림 뒤편에는 조그만 비밀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처음에 이 박물관을 지을 적부터 미리 만들어진 곳인지,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졌다.
“봐 봐, 내가 뭔가 느껴진다고 했지?!”
키리오스가 자신만만하게 비밀 공간 쪽으로 삿대질을 했다.
동시에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