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09)화 (110/163)

<117화>

“내가 왜?”

“그것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환대하겠습니까?”

“저, 저런! 저 못된 녀석이!”

할아버지께서 기가 막힌 얼굴로 지크프리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숨을 푹 내쉰 지크프리트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키리오스와 세자르 녀석들로도 머리가 아픈데, 아버지까지 끼어드실 줄이야…….”

“설마 나를 빼놓고 네 녀석들끼리 손녀의 파트너를 정할 생각이었느냐?”

한편, 그 혼잣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정색을 하셨다.

그러자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애초에 영지 일로 바쁘신 분께서 이리 제도에 올라오셔도 되는 겁니까?”

“흥, 그건 왜 안 물어보나 했다.”

할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던 수행하인에게 자신만만하게 명령을 내리신다.

“가주께 자료를 드리거라.”

공작령에서부터 함께 따라왔던 수행하인이, 공손하게 지크프리트에게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지크프리트는 얼떨결에 서류를 받아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확인해 보거라.”

할아버지가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며 권유했다.

“…….”

서류를 팔랑팔랑 넘겨보던 지크프리트는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어떠하냐? 할 말 없지?”

할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아니, 도대체 뭐기에 그래?’

나는 슬쩍 고개를 빼어, 지크프리트의 손에 들린 서류를 살펴봄.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와, 세상에.’

공작령의 살림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알 수밖에 없었다.

저 서류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예산과 지출은 물론이고, 구체적으로 예산이 어느 곳에 집행되었는지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니,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런데 그때.

“가, 가주님!”

집사가 기겁하여 거실로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그, 짐마차가 들어왔습니다!”

“짐마차라고? 갑자기 짐마차는 왜?”

지크프리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꿀꺽 마른침을 삼킨 집사가 나를 돌아보았다.

‘……저기요, 왜 저를 쳐다보시죠?’

나는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집사가 짧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 일단 물건들을 직접 좀 살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석이며 비단 같은 귀중품들이 많아서…….”

“그래, 아가. 내가 선물을 좀 준비했는데, 함께 구경하러 가 보자꾸나.”

그 말을 받아서, 할아버지께서 냉큼 입을 여셨다.

‘서, 설마?’

나는 삐걱거리며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우리 손녀가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한다는데, 할아버지가 되어서 빈손으로 올라올 수는 없지 않겠느냐?”

“…….”

나는 침묵했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다.

아무래도 제도의 고급품 상점들은, 때 아닌 ‘오를레앙 공녀의 데뷔탕트’ 특수를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 * *

짐마차에 실린 선물들을 모조리 내리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하여 선물들을 확인한 내 소감은 어땠느냐면.

‘데뷔탕트를 두 번 치르면, 할아버지의 개인 내탕금이 모조리 털리게 생겼네…….’

나는 흐린 눈으로 손에 들린 보석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과장을 좀 보태서, 내 엄지만 한 크기의 사파이어 귀걸이 한 쌍이 번쩍번쩍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사파이어, 우리 손녀의 눈동자 색깔과 꼭 닮지 않았느냐? 그래서 샀단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께서 흡족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이셨다.

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한 일이긴 하다.

물질적인 것을 떠나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시기에 이렇게 선물도 주시는 거니까.

하지만…….

‘뭐든지 정도라는 게 있잖아?’

나는 힐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때마침 지크프리트가 흘끗 사파이어 귀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뭐, 타티아나가 착용할 물건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겠지요.”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할아버지와 지크프리트는 극적인 의견 합치를 보았다.

……두 분이 더 이상 티격태격하지 않기를 원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때.

“저, 아가씨.”

노라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아가씨 앞으로 선물이 왔어요.”

“내게?”

일단 지크프리트는 내 곁에 있으니 제외하고.

‘설마 키리오스와 세자르가 또 제도의 상점들을 털어먹은 건 아니겠지?’

나는 뱁새눈을 뜨고 노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아빠가 보낸 선물이라면, 노라가 저렇게 아리송한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동시에 노라가 내 앞에 길쭉한 선물상자를 내려놓았다.

“기베르티 소백작이 보낸 선물이에요.”

“으잉?”

뜻밖의 이름에 나는 당황했다.

아니, 기베르티 소백작이 여기서 왜 나와?

그 이름에 나보다도 먼저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기베르티 소백작이라고?”

지크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고,

“볼프렌 녀석이 왜 내 손녀에게 선물을 보낸단 말이냐?”

할아버지도 정색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러고 보니 아직 볼프렌이 결혼을 못 했다고 했지? 설마 내 손녀에게 흑심을 품고……?”

할아버지가 음산하게 중얼거리셨다.

“에이, 그럴 리가 있어요?”

나는 질겁하여 손사래를 쳤다.

그랬다.

기베르티 소백작, 볼프렌은 아직까지도 미혼이었다…….

볼프렌의 여동생인 리즈벳조차, 한참 전에 결혼해서 에릭슨 자작부인이 되었는데.

기베르티 백작가 정도면 꽤나 이름 있는 가문임에도, 여태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볼프렌이 얼마나 답이 없는 인간인지를 증명한다.

다만.

“저랑 소백작님은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는걸요. 너무 과한 걱정이세요.”

“……하기야 그렇기는 하다만.”

그제야 할아버지는 다소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재차 다독여 드렸다.

“게다가 소백작님과 저는 친척 관계인걸요. 설마하니 제게 청혼하시겠어요?”

“그래도 제국법상 사촌부터는 혼인이 가능하지 않느냐.”

으음, 저렇게 말하니까 할 말은 없지만.

나는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제국법상은 그렇기는 하지만, 보통 친척끼리 혼사를 맺는 일은 아주 드물다.

대부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니까 말이다.

때마침 할아버지가 불퉁한 시선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

“일단 저게 뭔지나 보자꾸나.”

“아, 그럴까요?”

그리하여 선물 상자를 열어 본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상자 안에는 엄청난 구식 디자인의 비단 장갑이 한 켤레 들어 있었다.

뭐랄까, 나보다 스무 살은 많은 귀부인들이 젊었을 적에 착용했을 법한 모양이랄까?

하지만 가장 기분 나쁜 건.

‘……도대체 내 손 크기는 어떻게 안 거야?’

눈어림으로 봤을 때, 내 손과 비단 장갑의 크기가 얼추 들어맞는다는 거였다.

그것부터가 조금 꺼림칙한데, 동봉된 카드의 내용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친애하는 오를레앙 공녀님께.

처음 공녀님을 뵈었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리도 훌륭히 자라셔서 성년을 맞이하셨군요.

이번에 사교계에 데뷔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축하의 의미로 가벼운 선물을 보냅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레이디에게 어울릴 만한 디자인으로 손수 골라 주신 장갑입니다.

이 장갑을 끼고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하신다면, 공녀님께서 제 손을 잡고 데뷔하신 기분이 나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공녀님을 위하는 제 진심이 닿기를 바라며.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언제나 공녀님을 마음 깊이 생각하는,

볼프렌 기베르티.>

“……미친 거 아닌가?”

나는 내가 실수로 내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저 사나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지크프리트였다.

“감히 내 딸에게 저따위 편지를 보내?”

아드득 어금니를 갈아 붙인 지크프리트가, 흉험한 기세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콰직!

상자가 구겨지는 걸로도 모자라, 산산조각이 났다…….

그, 상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장갑까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뭐 하는 게냐?”

할아버지가 정색을 했다.

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성의가 있으니까.

선물을 저렇게 함부로 다루는 건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동시에 할아버지께서 지크프리트에게 핀잔을 주셨다.

“그렇게 감정 조절을 못 하고 선물을 찢어 버렸다가, 그 더러운 파편들이 우리 손녀에게 닿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하, 그 부분에서 정색하시는 거였구나.

동시에 할아버지가 분기탱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그보다 당장 기베르티 백작가에게 연락을 넣자꾸나. 어딜 우리 손녀에게 저런 수작질을!”

“옳은 말씀이십니다. 다시는 이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오를레앙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항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부자는, 내게 말릴 기회조차 주지 않고 거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홀로 남겨진 나는 해탈한 얼굴이 되었다.

아, 이제 나도 모르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