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 *
그날 저녁.
기베르티 백작 일가는 볼프렌을 사이에 두고 다 함께 둘러앉았다.
“그래서 선물은 잘 보냈니?”
“아, 보냈다니까요!”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의 질문에, 볼프렌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백작대부인이 가슴 위로 손을 모으며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공녀께서 부디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는데요.”
“뭐? 공녀는 무슨 공녀?”
그러자 백작대부인이 휙 소리가 나도록 제 며느리를 돌아보았다.
“그래 봤자 어디서 굴러먹다 왔을지도 모를 천한 계집애잖아?”
“어, 어머님.”
“우리 귀한 손주가 결혼해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 아니야?”
제 며느리를 노려보는 시선이 어찌나 살벌한지, 백작대부인은 찍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꼴에 공녀랍시고 콧대를 세우는 게 어찌나 꼴 보기 싫은지 몰라. 다들 그 계집애를 도대체 언제까지 싸고돌 셈인지 원…….”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구기던 백작대부인이,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와락 언성을 높였다.
“아니, 선물을 보냈으면 그에 대한 답신을 해야 할 거 아냐!”
“어머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보다 못한 기베르티 백작이 제 어머니를 달랬다.
“선물을 보낸 게 오늘 낮입니다. 적어도 하루 이틀은 기다려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내 귀한 손주가 직접 선물을 보냈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그래도 뭐, 막상 타티아나와 결혼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때마침 볼프렌이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록 출신이 명확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일단 젊은 게 마음에 들어요. 제도에서 손꼽히는 미인이라는 것도 좋고요.”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인다.
“무려 기베르티 백작가의 안주인 될 사람인데, 그 정도 여자는 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얼른 손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는 애틋한 시선으로 손주를 바라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주이자, 기베르티 백작가의 차기 백작.
‘도대체 왜 여태까지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우리 손주가 이렇게 잘났는데 말이야.
백작대부인이 속으로 혀를 차고 있던 그때.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거실로 들어온 하인이 깊숙하게 허리를 조아려 보였다.
백작대부인이 두 눈을 희번덕대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얼른 이리 다오!”
하인의 손에서 뺏다시피 편지를 낚아 챈 백작대부인이, 자신만만하게 편지를 펼쳤다.
‘흥, 천한 계집이 눈은 높군.’
이렇게나 회신이 빠른 것을 보아하니, 타티아나 그 계집애도 우리 애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한 게야.
희희낙락 편지를 내려다보던 백작대부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이게 무슨?”
<항의서.
금일 기베르티 소백작이 오를레앙 공녀에게 보낸 서신 중, ‘선물한 장갑을 착용했을 시, 손을 잡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라는 말은 엄연히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발언인 바.
이에 오를레앙 공작가는 기베르티 백작가에게 엄중한 항의의 뜻을 전합니다.
또한 오를레앙 공녀의 데뷔탕트 파트너에 관하여, 이 항의서에서 확고하게 말씀드리기를.
공녀의 파트너는 가족이 맡을 예정이니, 타 가문에게 혼동을 줄 만한 행동은 자제해 주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추후 이런 일이 또 한 번 발생할 시에는, 법적인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오를레앙 공작,
지크프리트 폰 오를레앙.>
“……할머니?”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을 보며, 볼프렌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동시에 백작대부인이 항의서를 콰직 구겨 버렸다.
“이 오만방자한 계집이!!”
굳이 따지자면 항의서는 지크프리트의 이름으로 전달되었으니, 1차적인 분노는 지크프리트에게 향해야 할 텐데도.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의 분노는 철저하게 타티아나에게로 향했다.
“이건 우리 기베르티 백작가를 무시하는 처사야!”
……도대체 편지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었기에, 어머니께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거지?
기베르티 백작은 의아한 얼굴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동시에 백작은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 항의서라고?!”
그것도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기베르티 백작가에게, 직접 가문 대 가문으로 보낸 항의서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말로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몰라……!’
백작이 다급하게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이쯤에서 그만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작가에서 항의서까지 보냈잖아요!”
그 말에 백작대부인이 경악을 했다.
“네? 오를레앙 공작가에서 항의서를 보냈다고요?”
“다들 시끄러워!”
와락 고함을 내지른 백작대부인이, 쌔근쌔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꺾여서는 안 돼.”
잠시 후.
약간 진정한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에서 볼프렌에게 가장 좋은 방향은 바로, 타티아나 그 계집애와 혼사를 맺는 거야.”
“그,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잖아? 그 계집과 무사히 결혼만 진행한다면, 장차 오를레앙 공작가는 우리 것이 되는 거잖니.”
그렇게 운을 뗀 백작대부인은,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혼사가, 타티아나 그것에게도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닐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막상 정식으로 청혼이 들어간다면, 그 계집애의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어려울걸?”
백작대부인이 깔보듯 말을 덧붙였다.
“그 계집애는 양녀잖니.”
“……하기야 그건 그렇죠.”
“아예 피가 이어지지 않은 그 계집애가 공작가를 잇느니, 우리 손주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서 공작가를 잇게 하는 편이 훨씬 낫지.”
백작대부인이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볼프렌은 내게서 오를레앙 공작가의 피를 이어받았잖니?”
그래봤자 기베르티 백작대부인과 볼프렌은 조모와 손자 사이였고, 따라서 볼프렌이 물려받은 공작가의 피는 아주 미미했지만.
백작대부인은 타티아나보다는 제 손주가 훨씬 우월하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마침 볼프렌도 콧대를 세우며 우쭐거렸다.
“정말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 하시네요. 제가 이래서 할머님을 존경하는 겁니다.”
“…….”
“…….”
기베르티 백작 부부는 슬쩍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서로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정말로 이래도 되나?’
그런 의심이 짙게 서린 표정.
‘그래도 볼프렌이 정말로 오를레앙 공녀와 결혼하게 된다면, 우리도 좋은 거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편이 낫겠지.’
찰나의 고민 끝에.
백작부부는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 * *
마침내 데뷔탕트 파티 당일.
노라가 꼭두새벽부터 나를 깨웠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으, 응? 뭐야, 무슨 일 있어?”
화들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난 내게, 노라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야 오늘은 데뷔탕트 파티 날이잖아요?”
“……그게 왜?”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셔야죠!”
노라가 양 허리에 손을 얹으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노라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파티는 저녁에 열리잖아. 벌써부터 준비해야 하는 거야?”
“당연하죠. 레이디가 본격적으로 치장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드는지 아세요?”
……그 말 그대로였다.
파티에 한 번 참석하는데,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줄 몰랐다…….
정성들여 씻고, 곡물을 갈아 만든 팩을 바르고, 머리카락에 향유를 발라서 윤이 반짝반짝 나도록 공들여 빗질하고.
이 세 가지만 하는 데에도 오전 시간이 까마득히 흘렀다.
그 후.
“보석은 어떤 걸로 할까요?”
노라가 내 앞에 갖가지 보석들을 늘어놓았다.
‘윽, 눈 부셔.’
난 흐린 눈으로 번쩍거리는 보석들을 내려다보다가, 일단 할아버지께서 선물해 주신 사파이어 귀걸이를 골랐다.
“음, 이 귀걸이는 꼭 착용해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럼 드레스는 귀걸이에 맞춰서 준비할게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는 했지만.
노라가 너무 신이 나 보였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장장 여덟 시간의 고행 끝에 치장이 끝났다.
“오늘 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은 우리 아가씨일 거예요!”
노라가 가슴 위로 손을 꼭 부여잡으며 외쳤다.
나는 힐끗 거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