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세 아빠들이 서운한 눈빛으로 나를 홱 돌아보았다.
“티티 양!”
“꼬마, 어째서!”
“왜 굳이 아버지와 파트너를……!”
하지만 내게는 저 원성을 막아 낼 합리적인 대답이 있었으니.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빠들이 제 파트너가 된다면, 너무 번잡스러울 것 같아요.”
“들었지?”
할아버지가 세 아빠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콧대를 세웠다.
그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 잡거라.”
“아, 감사합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맞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세 아빠가 억울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파트너 선정에 외부 요인이 개입하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맞아, 공평하게 정해야지!”
“이런 문제는 저희가 어쩔 수 없잖습니까!”
그러자 할아버지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어쩌겠나, 자네들의 인기가 너무 높은 탓이지. 그게 불만이면 예전부터 인기 관리를 했어야지?”
세 아빠는 드물게 말문이 막힌 얼굴이 되었다.
말 한 마디로 세 아빠의 입을 다물게 한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나를 돌아보셨다.
“가자꾸나, 얘야.”
그렇게 할아버지는 나를 에스코트하여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 걸음걸이가 가히 위풍당당했다.
* * *
난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동시에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진귀하고도 내키지 않는 경험을 했다.
“오를레앙 공녀님께서 오셨어요!”
이름 모를 어린 레이디의 숨죽인 속삭임을 시작으로,
“에스코트하시는 분은…… 세상에, 오를레앙 노공작님이시네요.”
“노공작께서는 거의 공작령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설마 이번에 공녀님의 데뷔탕트를 위해 올라오신 걸까요?”
어린 레이디들의 보호자로 따라온 귀부인이며 귀족들까지.
모두들 나와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였다.
‘음, 아빠들과 거리를 두면 그럭저럭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그러던 중.
나는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헬렌!”
일마즈 남작영애, 헬렌이었다.
다소 긴장한 것 같았던 헬렌은, 나를 마주하자 표정이 확 풀렸다.
“공녀님!”
헬렌이 종종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할아버지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춘다.
“오를레앙 노공작님을 뵙습니다. 헬렌 일마즈입니다.”
“반갑소.”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난 그럼 지크프리트 녀석들과 함께 있을 테니, 친구와 시간 보내거라.”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자리를 떠나고.
나는 헬렌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헬렌이랑 같이 데뷔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저도요.”
나를 따라 조금 미소 짓던 헬렌이, 이내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 연회장에 입장했을 때, 얼마나 긴장됐는지 몰라요.”
뭐, 그럴 수밖에.
이 데뷔탕트 파티를 기점으로, 레이디들은 처음으로 성인 사교계에 발을 내딛게 되니까.
갓 사교계에 데뷔하는 어린 레이디들, 그리고 레이디들 또래의 신사들.
두 그룹 사이에서 감도는 희미한 긴장감과 열기가, 피부 위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으, 헬렌이 저렇게 말하니까 나도 더 긴장되는 거 같잖아?!’
내심 마른침을 삼키는 내게, 헬렌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건 그렇고, 세 용사님들과 노공작님께서는 공녀님을 무척 아끼시나 봐요.”
“……갑자기 그런 말은 왜?”
“그야.”
헬렌이 눈짓으로 벽면에 기대선 우리 아빠들과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네 분 모두, 한시도 공녀님께서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걸요.”
“…….”
아니,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담?
나는 미간을 좁히며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네 사람은 두 눈에 날을 세우고 내 근처의 신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살벌한지, 신사들이 움찔거리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정말 내가 못 살아!!’
때마침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빠들과 할아버지가 날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씩 웃어 보인다.
‘이래서야 나, 제대로 춤을 출 수나 있을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편 헬렌은 어느새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성년식도 대신전에서 치르셨다면서요? 게다가 대사제님께서 집전하셨다고 들었어요.”
“아, 그게…….”
“황족들에게조차 전례가 없던 일이라던데…… 정말 부러워요, 공녀님!”
헬렌이 양 뺨을 손으로 감싸며 들뜬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런데 그때.
“황비 마마, 그리고 2황자 전하 드십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황실 가족이 입장했다.
그리고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왜 루돌프가 여기서 나와?!’
황비야 뭐, 내가 황비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황실 여성 중에서 제일 신분이 높은 황비가, 이번 데뷔탕트 파티의 주최자가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루돌프는 왜?
루돌프는 성년이 된 지도 한참 지났고, 이미 수많은 파티에 참석한 전적도 있으니.
굳이 데뷔탕트 파티까지 얼굴을 들이밀 이유가 없잖아!
황비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표정을 고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오늘 이렇게 황실의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어서 정말 고맙네.”
황비가 허리를 곧게 펴며 말을 이었다.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며, 이제 사교계의 일원으로서 품위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길 바라.”
그 후.
루돌프를 살짝 눈짓으로 가리킨다.
“또한, 레이디들이 데뷔를 축하하는 의미로 내 아들을 데려왔네.”
설마?
황비의 말에, 레이디들의 두 눈에 기대감이 가득 들어찼다.
드물게 미혼의 직계 황족이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하여, 레이디에게 첫 춤을 신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황족과의 첫 춤은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며.
춤을 신청 받은 레이디는, 그 해의 사교계의 꽃으로 추앙받고는 하는데.
“그럼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기를 바라며.”
황비는 그렇게 한 발 물러나고.
대신 루돌프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연회장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레이디들이 저도 모르게 발그레하게 뺨을 붉혔다.
“세상에, 2황자 전하께서 이번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하실 줄은 몰랐어요!”
“2황자께서는 어떤 레이디에게 춤을 신청하실까요?”
“하아, 2황자 전하와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봤으면…….”
주변에서 울리는 탄성 속에서, 나는 다소 심술궂은 시선으로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역시 황자가 좋긴 좋아.’
반반한 낯짝, 그리고 제국에 단둘뿐인 황자의 신분.
그 두 가지 요소만 갖췄을 뿐인데, 레이디들에게 저렇게 쓸데없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인성은 쓰레기인데도 말이야.’
라키어스처럼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아도, 저렇게 선망의 시선을 받을 수 있다니.
쟤는 인생 편해서 참 좋겠다.
다만 내 취향은 절대 아니었는데, 특유의 야비한 인상이 재수 없기도 했거니와.
‘역시 잘생긴 남자 하면 라키어스 쪽이…….’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하던 내가 흠칫했다.
‘아니, 왜 나는 또 라키어스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다른 생각 하자, 다른 생각.
그러고 보면 몇 년 전부터 루돌프가 날 대하는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
어렸을 적에는 내게 당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나를 꺼려하며 무시하는 편이었는데.
‘요새는 꽤 친절하게 군단 말이지?’
아무래도 요새 라키어스가 용사들의 제자로서 주가를 올리고 있으니, 뒤늦게나마 용사들에게 다리를 놓을 겸 내게 친한 척을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웃겨.’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네가 그런다고 내가 너랑 친하게 지낼 줄 알고?
네가 여태까지 라키를 괴롭힌 게 얼만데!
그렇게 속으로 루돌프에 대한 온갖 험담을 늘어놓던 난,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어라?’
그도 그럴 것이, 루돌프가 이쪽으로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뭐야, 누구한테 춤을 신청하려고?’
나는 경계 가득한 눈초리로 루돌프를 마주 보다가, 헬렌 곁으로 바짝 붙어 섰다.
‘우리 헬렌은 안 돼. 루돌프 저 자식에게 아깝단 말이야.’
그러던 중.
난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어째……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어, 어째서 헬렌까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동시에 루돌프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오를레앙 공녀.”
……설마?
나는 간신히 표정을 정돈하며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어머나, 2황자 전하께서 공녀님께 춤을 신청하시려나 봐요!”
“정말 멋져요!”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탄성을 배경음악 삼아서.
“저와 첫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내게 손을 내민 루돌프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