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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13)화 (114/163)

<121화>

……세상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저 재수 없는 루돌프가, 정말로 내게 춤을 신청한 거야?

나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내게 내밀어진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얘가 미쳤나?’

하지만 루돌프는 버터를 백 개는 집어먹은 것 같은 느끼한 목소리로, 나를 재차 채근할 따름이었다.

“얼른 제 손을 잡아 주시지요.”

“…….”

아무래도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루돌프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하지만 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는데.

“자, 잠깐만요. 저분……!”

“아직 카를로에 계시는 게 아니었나요?!”

사람들이 느닷없이 술렁거리는가 싶더니, 그들의 시선이 연회장의 입구로 쏠린 것이다.

나 또한 반사적으로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금실을 뽑아 낸 듯 반짝거리는 결 고운 금발.

그리고 질 좋은 루비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만을 모아 빚은 듯한, 늘씬한 미청년이 서 있었다.

‘라키?!’

나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로 라키어스가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한 거야?!’

당당한 걸음걸이로 내 앞으로 다다른 라키어스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살짝 숙여 예를 갖추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예법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를레앙 공녀.”

4년 전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보다, 조금 더 톤이 낮고 풍성해진 그 목소리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음악보다도 감미롭게 울렸다.

“아니, 이게 무슨……!”

뒤늦게 루돌프가 분통을 터뜨리려 했으나, 라키어스는 그저 매끄럽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저도 2황자를 이렇게 만나서 무척 반갑습니다. 다만 해후의 기쁨을 나누는 건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무, 뭐야?!”

“지금은 오를레앙 공녀께 인사를 먼저 드리고 싶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라키어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루돌프에게서 신경을 꺼 버렸다.

선명한 붉은 눈동자 안으로는 오롯이 나만이 담겨 있었다.

“……1황자 전하.”

나는 신음처럼 라키어스를 불렀다.

그러자 라키어스의 입술 위로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게 공녀와 첫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나는 멍하니 라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완전히 달라.’

라키어스는 루돌프와 춤을 권유하는 방식부터 달랐다.

루돌프는 ‘네까짓 게 당연히 내 요청을 거절할 리 있겠어?’라는 느낌이라면.

라키어스는 내게 춤을 출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을 주지 않는가.

‘이렇게 다정한 너를, 어떻게 내가 거절할 수 있겠어.’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에.

나는 괜히 더 활짝 미소 지으며 라키어스의 손을 맞잡았다.

“기꺼이요.”

* * *

나와 라키어스는 손을 마주 잡고 댄스 홀로 나아갔다.

서로 맞절을 한 후, 춤을 추기 전 준비 자세를 취한다.

‘아.’

순간 나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크고 단단한 손이 내 허리에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이상해.’

온 신경이 허리에 닿은 라키어스의 손으로 쏠렸다.

전신의 솜털이 낱낱이 곤두서고, 짜릿한 긴장감이 등을 쓸고 지나간다.

‘정식으로 연회에서 춤을 추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아빠들과 몇 번이나 춤 연습을 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힐끔 라키어스를 곁눈질하던 중.

‘아, 눈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는 시종일관 나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에, 나는 일부러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질문했다.

“라키 네가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할 줄은 몰랐어. 도대체 언제 온 거야?”

그러자 라키어스가 씩 눈웃음을 지었다.

반달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와, 시원한 호선을 그리는 입매까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나는 홀린 듯이 그 미소를 응시했다.

“놀랐어?”

“다, 당연하지!”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라키어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다행이네.”

“뭐가?”

그러자 라키어스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말해 주기라도 하는 양, 내 쪽으로 기웃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숨을 삼켰다.

상쾌한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저번에 티티가 날 놀라게 했으니까, 이번에는 나도 티티를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

짓궂게 속삭인 라키어스가 미련 없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빳빳하게 굳은 채 라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나, 나만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거야?’

라키어스의 평온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억울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나는 설레는 와중에도 입술을 앙다물었다.

‘정말 얄미워 죽겠어!’

동시에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나와 라키어스는 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아 나갔다.

그리고.

‘뭐야?’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왜 이렇게까지 춤을 잘 추는 건데?!’

어찌나 춤에 능숙한지, 사교댄스 교습을 철저하게 받은 나를 능숙하게 리드할 정도였다.

‘얜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때마침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라키어스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춤 말이야.”

나는 조금 뾰로통해져서 물어보았다.

“너무 잘 추는 거 아니야?”

그렇잖아, 카를로를 다스리느라 엄청 바빴을 텐데.

춤은 도대체 언제 배운 거야?

‘차라리…… 춤을 못 추는 편이 훨씬 더 나을 텐데.’

순간 못된 생각이 불쑥 튀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라키어스를 향한 레이디들의 선망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이면 라키어스의 인기가 더 높아질 텐데.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괜히 라키어스의 어깨만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어깨가…….

‘엄청 넓네?’

나는 나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넓은 어깨, 딱 벌어진 가슴, 날씬하게 떨어지는 허리까지.

그야말로 우리 아빠들에게나 볼 수 있을 법한 완벽한 체형이어서…….

‘하, 나야. 제발 이런 생각 좀 그만하자.’

도대체 이게 뭐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그래? 다행이네.”

한편 내 복잡한 속도 모르고, 라키어스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춤 말이야, 이번 데뷔탕트 파티 때문에 급하게 배웠거든. 그래서 조금 자신이 없었어.”

“하지만 넌 이런 행사에는 관심 없어 했잖아.”

“물론 데뷔탕트 파티 자체는 별로 의미 없기는 한데.”

어깨를 으쓱인 라키어스가, 아주 당연하다는 양 대답했다.

“그래도 티티의 첫 춤은 중요하니까.”

“…….”

순간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라키어스는 다소 멋쩍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너와 첫 춤을 추는 기회는,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

“……라키.”

“그래서, 데뷔탕트 파티에 늦을까 봐 말까지 바꿔 가면서 부랴부랴 달려왔는데.”

라키어스가 정색을 했다.

“글쎄 루돌프가 네게 춤을 신청하고 있지 뭐야?”

뭐야, 나 왜 이러지?

라키어스가 나와 첫 춤을 추기 위해, 이렇게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자꾸만 기분이 들뜨게 돼.

나는 라키어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라키는 내가 2황자 전하랑 춤을 추는 게 그렇게나 싫어?”

“…….”

착각일까?

붉은 눈동자가 순간 새카맣게 가라앉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약간의 침묵 후.

라키어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응, 싫어.”

“그, 그렇구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할 정도로 루돌프가 싫은 건가?

물론 나도 싫지만 말이야.

하지만 아직 라키어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는…….”

다만 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다음 차례가, 파트너와 거리를 벌리는 동작이었으니까.

머리 위로 맞잡은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라키어스의 리드에 따라 몸이 빙글 돌아갔다.

드레스자락이 동그랗게 말리며 부드럽게 라키어스의 다리를 감쌌다가 떨어진다.

다시 거리를 좁힌 후.

나는 라키어스에게 물었다.

“정확히는, 뭐?”

“…….”

그새 예전처럼 태연한 얼굴로 돌아간 라키어스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아니야.”

매끄럽게 미소 짓는다.

‘뭐야, 실없긴.’

나는 라키어스를 따라 피식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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