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그 시각.
루돌프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타티아나가 라키어스와 춤추는 모습을 노려보았다.
‘……오를레앙 공녀.’
빠드득.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이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나를 거절해?’
그도 그럴 것이, 루돌프는 여성을 대할 때에 단 한 번도 거절을 당한 적 없었으니까.
수많은 여자들과 퍼뜨린 염문설이 그 증거였다.
그 말은 즉.
루돌프를 거절한 여자는 타티아나가 최초라는 뜻이었다.
‘이 나를 거절하고, 라키어스 저 자식과 춤을 춰?!’
게다가.
“두 분, 무척 잘 어울리시네요.”
“그러게요. 어렸을 적부터 두 분께서 친하게 지내셨죠?”
“맞아요, 세 용사께서 1황자 전하를 제자로 삼으셔서 자주 마주치셨다고 들었어요.”
묘하게 주변 분위기가 두 사람에게 호의적이었다.
사실 루돌프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오를레앙 공녀와 완전히 틀어져서는 안 된다. 알겠니?’
황비가 몇 번이나 신신당부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뒤늦게나마 세 용사들과 접점을 만들려면, 타티아나와 친분을 쌓아 두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을.
또한 그 모든 점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타티아나는 제도에서 가장 신분이 높고 아름다운 레이디였다.
곁에 둘 트로피로 삼기에 제격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타티아나는 지금, 라키어스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제기랄!”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루돌프가, 쿵쿵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마침내 춤이 끝나고.
세 아빠들과 할아버지가 득달같이 라키어스 곁으로 다가왔다.
“야, 너! ……가 아니라 1황자 전하!”
키리오스가 두 눈을 부라리며 라키어스에게 삿대질을 했다.
“누가 우리 꼬마랑 춤을 추랍니까? 나도 아직 못 춰 봤는데!!”
“글쎄요, 아까 공녀께서는 저 아니면 2황자와 춤을 추실 상황이셨잖습니까.”
라키어스가 얄밉게 대꾸했다.
“키리오스 스승님께서는, 귀한 따님의 춤 상대로 못난 제자보다는 2황자가 나으신가 봅니다?”
“……누, 누가 그렇대?!”
키리오스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 틈을 타, 지크프리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제 딸과 첫 춤을 추신 기분은 어떠셨습니까?”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하면, 당장이라도 목을 쳐 버릴 기세였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여름의 쾌청한 하늘처럼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좋았죠. 왜요, 부러우십니까?”
“…….”
오, 키리오스에 이어 지크프리트까지 패배시킬 줄이야.
나는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동시에 세자르가 라키어스를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어째 1황자 전하께서는 매번 볼 때마다 피로해 보이십니다?”
“그야, 오를레앙 공녀를 만나러 오는 길인데 늦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리 좀 했습니다.”
“쳇.”
차마 ‘타티아나를 만나러 오느라 무리 좀 했다’라는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는지.
세자르가 불만스럽게 혀를 차며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그나마 정상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무척 고생하셨겠습니다. 카를로는 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노공작께서 오를레앙의 상단과 연결해 주신 덕택이지요.”
“그래요. 그렇단 말이지요…….”
잠시 말끝을 흐리던 할아버지가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오를레앙의 도움을 받으신 분께서, 우리 손녀의 첫 춤을 홀랑 가져가셨다고요?”
“…….”
“저도 손녀와 첫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만?”
“…….”
라키어스가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니, 유일하게 이성적이라 믿었던 할아버지께서도 저런 반응이라니…….
“다들 정말 너무해요.”
보다 못한 내가 정색을 했다.
“다들 오랜만에 1황자 전하를 뵌 거잖아요. 그런데 그새 또 구박하시는 거예요?”
아무래도 이 사람들과 좀 떼어 놔야겠어.
그러한 판단으로, 나는 라키어스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리 와, 라키.”
“으, 응?”
“나 바람 쐬러 갈 거야. 에스코트해 줘.”
그러자 키리오스가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꼬마, 에스코트는 나도 할 수 있는데!”
“……동감이다.”
동의를 표하는 지크프리트와,
“그런 에스코트는 굳이 라키어스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요?”
좀 더 이성적으로 파고드는 세자르와,
“아가, 오늘 난 네 파트너 아니냐!”
오늘 데뷔탕트 파티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피력하는 할아버지까지.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됐네요.”
그야말로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의 네 사람을 뒤에 남겨 둔 채.
나는 라키어스를 끌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나는 라키어스의 손목을 붙든 채, 씩씩거리며 어둠이 내린 정원으로 나아갔다.
그 후.
“정말 미안해 라키!”
나는 울상이 되어 사과했다.
“아빠들이랑 할아버지께서 오랜만에 만나서 짓궂게 구신 거야. 나쁜 마음이 있으셨던 건 아니니까…….”
“알아, 너무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으니까.”
라키어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달랬다.
나는 입술만 잘근거렸다.
‘아니, 할아버지까지 그러실 줄이야…….’
우리 할아버지는 그래도 그럭저럭 이성적이신 분인 줄 알았는데!
나는 배신감까지 느꼈다.
동시에 라키어스가 해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저분들께서 저러시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어쩐지 웃는 얼굴이 피곤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나는 슬그머니 라키어스의 눈치를 살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라키어스가 내게 팔을 내밀었다.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신사의 자세였다.
“이왕 정원까지 나왔으니 좀 걸을까?”
“좋아.”
나는 라키어스의 팔에 손을 얹고, 잘 정리된 산책로를 천천히 거닐었다.
비록 밤이었지만 정원은 그리 어두운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도 새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달빛과, 그 아래로 활짝 피어난 백목련 덕택일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카를로에서는 복숭아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는데.’
난 약간 추억에 젖었다.
새파란 하늘, 팔랑거리며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분홍색 꽃잎들.
그때만 떠올리면 가슴 깊은 곳이 술렁거린다.
간질거리고, 아련하며, 이상하게 조금은 서러워져서.
……어쩐지 왈칵 울어 버리고 싶은 느낌.
“그러고 보니, 티티는 카를로까지 찾아와서 내 성년을 챙겨 줬는데.”
때마침 라키어스가 입을 열었다.
“난 어째 별로 해 준 게 없는 것 같아.”
“아냐, 내 첫 춤을 같이 춰 줬잖아. 그거로도 충분해.”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라키어스가 때맞춰 내게 오지 않았더라면, 난 꼼짝없이 루돌프 자식과 첫 춤을 춰야만 했겠지.
그 자식이 내 허리에 손을 올린다고 생각하니까…….
‘으으.’
난 나도 모르게 질색을 했다.
그런 날 유심히 바라보던 라키어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실은 네 성년을 위해 미리 주문해 둔 게 있는데.”
“우와, 진짜?”
나는 두 눈을 빛내며 라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라키어스가 난처하게 미소 지었다.
“응, 네 성년식 때에 맞춰서 주고 싶었는데, 아직 완성이 됐다는 연락을 못 받았어. 미안.”
“괜찮아. 정말 기뻐, 고마워!”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를 감추기 위하여, 나는 일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
‘쓸데없는 기대하지 마.’
라키어스는 오랫동안 제도를 비웠고, 나 외에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친구는 전혀 없다.
나도 라키어스의 성년을 챙겨 주고 싶어서, 직접 카를로까지 가지 않았나.
……그것과 똑같은 마음일 거야.
‘라키는 그저 친구로서 날 챙겨 주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나는, 자꾸만 들뜨려는 기분을 애써 억눌렀다.
그런데 그때.
“티티 양!”
“타티아나!”
“꼬마!”
익숙한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세 아빠들과 할아버지께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계셨다.
‘아니, 언제 또 따라 나오신 거람?’
나는 뜨악한 시선으로 네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록 첫 춤은 라키어스 저 자식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지만, 다음 춤은 내가 출 거야.”
키리오스가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내게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당신이 춤 순서를 정하나요?”
“맞다. 이런 건 공평하게 정해야지.”
세자르와 지크프리트가 잇따라 항의하고,
“이런 건 연장자순으로 하는 거라네.”
……심지어는 할아버지까지.
“…….”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네 사람을 흘겨보다 말고, 선언했다.
“안 춰요.”
“뭐?”
“안 춘다고요.”
네 사람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새침하게 뒤돌아섰다.
모처럼 라키어스랑 분위기가 좋았는데.
정말 너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