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
거실에 다시 한번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 레이디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기세등등한 사람은 볼프렌과 백작대부인뿐.
때마침 백작대부인이 볼프렌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맞아요, 우리 손주는 저에게 오를레앙 공작가의 피를 물려받았잖아요?”
“…….”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공녀께서는 혈통에 다소 문제가 있으시지만, 우리 손주가 그 단점을 메워 드릴 수 있는걸요.”
백작대부인은 정말로 제 말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었다.
‘하, 정말.’
나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이렇게 화가 나는 건 오랜만이네?’
두어 번 심호흡을 해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약간이나마 진정시킨 후.
“그러니까.”
나는 날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제가 양녀라서 오를레앙 공작가를 잇기에는 부적합하니, 저와 기베르티 소백작이 결혼하여 기베르티 일가가 공작가를 물려받겠다고 하시는 거네요. 그렇죠?”
순간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뒤늦게나마 내 기분이 저조해진 것을 눈치챈 듯하다.
하지만 소백작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 뭐,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렇기는 합니다만. 윽!”
기겁한 백작대부인이 손주의 옆구리를 쿡 찔러 입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은 상태.
“이건…… 너무 무례하지 않나요?”
참다못한 레이디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양녀네 뭐네, 저런 말을 대놓고 떠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심지어는 청혼을 하러 온 거잖아요.”
“솔직히, 친척들끼리 결혼하겠답시고 찾아오는 것 자체가 영 이상하지 않아요?”
분위기는 이제 싸하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였다.
나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두 분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저와의 혼약보다는 공작가에 대한 욕심 때문인 것 같은데.”
“그, 그런 것이 아니라……!”
허겁지겁 변명하려는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에게, 나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제 아버지이신 오를레앙 공작께서는, 다섯 마왕을 토벌한 초월자임을 잊으셨나요?”
초월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월성을 획득한 존재들이었다.
초월자들은 강력한 무력과 더불어, 수명 또한 일반인에 비해 훨씬 늘어난다.
우리 아빠들도 못해도 200년은 가뿐히 살걸?
“두 분이 세상을 떠나시고 백 년은 흘러도, 제 아버지께서는 멀쩡히 살아 계실 텐데요.”
“…….”
“…….”
나는 말문이 막힌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오를레앙의 방계조차 못 되는 다른 가문이.”
“고, 공녀!”
“벌써부터 공작가의 후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지나치게 오만방자한 일 아닐까요?”
“…….”
“…….”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이쯤에서 이 쓸데없는 언쟁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청혼은 거절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오를레앙의 타운하우스에, 기베르티 백작가의 일원이 출입하는 것을 금합니다.”
“뭐, 뭐라고요?!”
순간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발끈했다.
“나는 오를레앙의 적녀예요! 아무리 공녀라 한들, 내 출입을 금할 수는 없……!”
“그렇죠. 백작대부인께서 직접 말씀하셨듯이, 지금 오를레앙의 공녀는 백작대부인이 아니라 저예요.”
백작대부인이 분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오를레앙의 단 하나뿐인 공녀가, 기베르티 백작가에 대해 출입금지령조차 내릴 수 없다는 말은.”
“…….”
“오를레앙 공작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거든요.”
“이, 이봐요! 난……!”
백작대부인은 무어라 항변하려 언성을 높였으나, 내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노라, 기베르티 백작 일가께서 돌아가신다고 하시네. 정중히 배웅해 드려.”
“네, 아가씨.”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노라가, 기베르티 일가에게로 다가갔다.
“두 분,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하, 할머니.”
볼프렌이 어찌할 바 몰라 하며 백작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노라가 웃는 얼굴로 못을 박았다.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시지 않으면, 가문의 기사들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흥!”
백작대부인이 살벌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는, 홱 돌아서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볼프렌은 황급히 제 할머니의 꽁무니를 따랐다.
한심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부드럽게 레이디들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저 때문에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것 같네요. 죄송해요.”
그러자 레이디들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녜요, 공녀님께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기베르티 백작가가 저렇게까지 예의가 없는 줄은 몰랐어요.”
“공녀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우아하게 처신하셨나요? 저라면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줬을 텐데요.”
음, 아주 듣기 좋아.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기베르티 백작가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다.
* * *
그 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일단 전후 사정을 전해 들은 지크프리트와 할아버지가 아예 기베르티 백작가로 쫓아갔다.
‘감히 내가 없을 때 내 딸에게 접촉하다니. 목을 내놓을 준비는 된 거겠지?’
‘우리 손녀더러 그런 무례한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다들 죽고 싶나?’
그렇게 기베르티 백작가를 완전히 뒤집어 놨다고 하던데.
내가 어렸을 적에도, 지크프리트가 기베르티 백작가를 탈탈 털었던 적이 있지 않나?
백작가는 아무래도 학습능력이 떨어지나 보다.
심지어는 세자르와 키리오스도 기베르티 백작가에게 보복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는데, 그 방식은…….
‘앞으로 기베르티의 일원은 대신전에 출입 금지입니다.’
‘예? 어째서요?’
‘대사제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입니다. 아, 그리고 이렇게 전해 달라고 하셨는데.’
신전 입구를 가로막은 경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친척 레이디에게 강압적으로 청혼을 한 더러운 작자는, 신께서도 굳이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거라고요.’
‘뭐, 뭐라고요?!’
‘발이 닿는 순간 신성한 신전이 오염되니, 앞으로는 절대로 걸음 하지 말라고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랬다.
세자르는 경비들에게 말을 모조리 외우게 한 후, 직접 들려 줄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오를레앙 공작가에 뒤이어, 대신전까지 출입 금지 당했다.
그 사실은 백작가의 평판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마탑에서는 금일부로 기베르티 백작가에게 마탑의 저작권을 활용한 물건들을 판매 금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탑과의 거래도 막혀 버렸다.
귀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갖가지 사치품들은, 대부분 마탑의 저작권하에 있었기에.
기베르티 백작가는 정말 생활이 곤란해졌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또한 대리 구매를 해 주는 사람, 혹은 가문에게도 영구적으로 판매를 금지하겠습니다.’
아예 탈출구까지 막아 버렸다.
……여기까지 듣자, ‘우리가 좀 심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기베르티 백작가 따위는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린 상태였는데.
<친애하는 티티에게.>
라키어스에게 마침내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잘 지냈어?
데뷔탕트 파티 이후 연락을 하는 건 처음이네.
다름이 아니라, 마침내 공방에서 연락이 왔어.
뒤늦게나마 너의 성년을 축하해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시간은 내가 맞출 테니 편하게 말해 줘.
애정을 담아, 라키어스.>
나는 라키어스의 편지를 꼭 끌어안은 채,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공방이라니, 도대체 뭘 준비한 걸까?’
솔직히 어떤 선물이든 전혀 상관없었다.
애초에 받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는걸.
그보다는.
‘라키어스가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 써 주는 게…… 기뻐.’
나는 편지를 다시 펼쳤다.
몇 번이고 읽다 못해, 외울 것만 같은 문장을 다시 읽어 본다.
‘아, 얼른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야 라키어스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