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2층짜리 건물을 통으로 사용한 캐릭터 상품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앙증맞게 꾸며진 가게 안으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아이들부터.
캐릭터가 그려진 종이 쇼핑백을 양손에 가득 든 동성 친구들.
품에 커다란 봉제인형을 끌어안은 채,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연인들까지.
‘흠, 내가 세우긴 했지만.’
나는 뿌듯하게 가게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가히 제도의 명물이라고 불릴 만하지.’
심지어 우리 가게, 제도의 관광코스 안내 책자에도 3년째 실렸다니까?
“……예전부터 네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었는데.”
한편 라키어스는 무척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사업이 번창했을 줄은 몰랐어. 정말 멋진데?”
으음, 온갖 재능을 타고난 원작의 남자주인공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좀 민망한걸.
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너도 알겠지만, 실무를 처리하는 직원들은 따로 있어. 나는 그냥 자금이나 지원한 것뿐…….”
그러자 라키어스의 표정이 조금 엄격해졌다.
“그러지 마.”
“응?”
“네가 해낸 일은 대단한 거야. 자꾸만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마.”
라키어스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너 스스로를 깎아 내리면, 너를 존경했던 나까지도 초라해지잖아?”
“조, 존경이라고?”
“진짜야. 어렸을 적에는, 네 발끝에라도 어떻게든 닿고 싶어서 아등바등했는걸.”
그렇게 열변을 토하던 중.
문득 라키어스의 시선이 입구에 전시된 인형들에게 닿았다.
올망졸망하게 모인 인형들 사이로, 근엄한 표정에 망토를 두른 인형이 끼어 앉아 있었다.
순간 라키어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저 인형, 시어도어 대왕이야?”
“응, 귀엽지? 인형들 중에서 꽤 인기가 높아.”
내친 김에 난 다른 인형을 집어 들었다.
솜을 채운 커다란 대검을 양손으로 들고 있는 인형이었다.
“아, 이건 알렉산드로 3세의 인형이야. 어때?”
“…….”
라키어스는 한참을 물끄러미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응, 귀엽네.”
낮게 억눌린 대답이 들려왔다.
마치 목이 메기라도 한 것처럼.
나 또한 라키어스의 복잡한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자, 선물이야.”
나는 일부러 라키어스의 품 안에 두 인형을 안겨 주었다.
얼떨결에 인형을 받아든 라키어스가 민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년을 축하해 줘야 하는 건 나인데, 오히려 선물을 받네.”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어깨를 으쓱인 내가 라키어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구경하러.”
“…….”
나를 빤히 바라보던 라키어스가 싱긋 웃었다.
“응.”
* * *
그렇게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우리는 조금 쉴 겸, 2층에 마련된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진열장에 늘어선 케이크를 구경하던 라키어스가, 순간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설마……?”
“응, 그 설마가 맞아.”
나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열장 안, 가장 잘 보이는 중앙.
세 용사 캐릭터를 형상화한 케이크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거 우리 디저트 가게의 명물이야. 다들 먹고 간다고.”
“…….”
“개발할 때 내가 직접 시식해 봤는데, 맛있어.”
참고로 지크프리트는 초콜릿, 키리오스는 라즈베리 무스, 세자르는 생크림 케이크다.
오묘한 시선으로 진열장 안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라키어스가, 문득 두 눈을 빛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거 다 주문하자.”
“응? 전체 다?”
아무리 조각 케이크라지만, 두 명이서 세 조각을 먹는 건 좀 과하지 않나?
하지만 라키어스는 완고했다.
“아니, 무조건 세 개 다 맛을 봐야겠어.”
“그, 그래?”
뭐, 본인이 그렇다면야…….
그렇게 우리는 케이크 세 조각과 음료 두 잔을 주문해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점원이 케이크와 음료를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음료와 케이크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아, 고마워요.”
내 인사에, 미소를 남긴 점원이 자리를 떴다.
그와 동시에 라키어스는 두 눈을 희번뜩 빛내며 포크와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당황한 내가 라키어스를 불렀다.
“라, 라키?”
그리고.
푹!
라키어스는 지크프리트 케이크의 중앙에, 망설임 없이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콰직!
케이크 전면을 덮고 있던 초콜릿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 후로도 라키어스의 매서운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키리오스의 붉은 머리카락을 형상화한 라즈베리 잼은, 라키어스의 칼질 한 번에 점점이 흩어진 붉은 핏방울이 되었고.
환하게 웃는 세자르의 케이크는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후, 한 번쯤 꼭 해 보고 싶었어.”
사심을 담아 케이크를 조각 낸 라키어스가, 그야말로 상쾌한 표정이 되어 혼잣말을 했다.
‘도대체 뭘 해 보고 싶었던 건데?’
나는 뜨악하게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라키어스가 케이크 조각을 내 앞에 밀어주다 말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여태까지 난, 정상인 라키어스가 광기에 찬 세 아빠와 할아버지 사이에 끼어서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중에서 라키어스가 가장 돌아 버린 사람일지도 몰라…….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던 라키어스가, 지크프리트의 머리 귀퉁이를 커다랗게 잘라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흡족하게 중얼거린다.
“맛있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나도 라키어스를 따라 세자르, 아니지, 생크림 케이크를 맛을 보았다.
‘음, 맛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 같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그보다, 티티.”
방금까지의 홀가분한 표정은 간데없이, 라키어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진중한지, 마주 앉은 나까지 조금 긴장될 정도였다.
“응? 왜?”
“그…… 있잖아.”
라키어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인담?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라키어스를 채근했다.
“뭐야, 빨리 말해.”
그러자 라키어스가 결연한 목소리로 불쑥 질문을 던졌다.
“너, 최근에 청혼 받았다면서?”
“……청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라키어스가 급히 부연설명을 했다.
“그, 기베르티 소백작 말이야.”
“…….”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 그 기베르티 백작대부인이 대리 청혼해주던 그거?
그걸 청혼이라고 부르는 건, 어찌 보면 청혼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하지만 라키어스는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이었다.
“물론 거절했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네 마음은 어떤가 싶어서…….”
“아니, 라키. 너 제정신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정색하고 말았다.
“나도 눈 있어.”
“눈?”
“그래! 매일 우리 아빠들이랑 널 보면서 살았는데, 그 인간이 내 눈에 차겠어?!”
나는 열변을 토했다.
천 년에 걸친 제국 역사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월자답게, 젊은 시절의 찬란한 미모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우리 아빠들.
그리고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답게 어마어마하게 잘생긴 라키어스까지.
그런 사람들만 보고 살았는데, 어떻게 볼프렌 그 녀석을 나에게 갖다 붙일 수가 있어?!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 말에,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라키어스가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기베르티 소백작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소리지?”
“안 써, 안 쓴다고!”
나는 와락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홀가분한 얼굴이 되어 쌕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그렇구나.”
순간 나는 움찔했다.
뭐야, 저거?
마치 세상을 통째로 가지기라도 한 양, 저 흡족한 표정은 도대체 무슨 의미지?
동시에 라키어스가 은근슬쩍 내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티티, 방금 그 말은 뭐야?”
“무, 무슨 말?”
“‘우리 아빠들이랑 널 보면서 살아 왔다’고 했잖아.”
“…….”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라키어스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며 재차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은 즉, 내 외모가 네 눈에 그럭저럭 괜찮다는…….”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순간 확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키어스는 냉큼 내 뒤를 따랐다.
“티티? 대답 좀 해 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