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20)화 (121/163)

<128화>

* * *

캐릭터 상품 가게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여기, 셰필드 향수 공방 아니야?”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

원하는 향료를 직접 골라 향수를 맞춤 제작해 주는 곳으로, 제도에서도 유명한 향수 공방이었다.

나도 몇 번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다.

워낙에 인기가 높아서, 예약을 잡는 것조차 하늘의 별따기인 곳인데…….

“들어가자.”

라키어스가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십시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우리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직원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고급스러운 공방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장 인상 깊은 건 벽면을 따라 전시된 갖가지 향료들이었다.

직원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시향을 준비해 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인 라키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일단 너에게 줄 향수는 맞춤 제작을 해 놨는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너도 네 마음에 드는 향수를 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렇구나, 향수가 성년 선물이었구나!

너무 좋아!

나는 당장이라도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잠깐. 라키가 나를 위해 향수를 미리 맞춤 제작을 해 놨다고 했지?’

그 말은 즉…….

“고마워. 정말 기뻐.”

일단 고맙다는 인사부터 한 후.

나는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질문을 던졌다.

“있지, 나한테 줄 향수를 미리 맞춤제작 했다고 했잖아. 그럼 네가 직접 향료들을 고른 거야?”

“그렇지?”

그 덤덤한 대답에, 순간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은 즉.

라키가 나한테 주는 향수는, 라키가 나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시향 했다는 거 아냐?

카를로의 일을 처리하는 데만 해도 바빴을 텐데!

‘어떡해, 감동이야!’

나는 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내 말을 무슨 의미로 해석한 건지, 라키어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 네게 어울릴 만한 항료들을 고른다고 골랐는데. 혹시 내가 임의로 골라 둔 게 마음에 안 든다면…….”

“아냐, 그게 아니고!”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은 내가 배시시 눈매를 접어 내렸다.

“기뻐서.”

“…….”

라키어스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또다.

가끔 라키어스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응시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난 라키어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라키?”

“아, 응.”

동시에 라키어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티티가 기뻐해 주니 나도 기쁘네. 그럼 시향부터 해 볼까?”

* * *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나와 라키어스는 마침내 향수 공방에서 빠져나왔다.

“아, 재밌었다.”

세상에 이렇게 갖가지 향료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원하는 향기를 시향하고 고를 수 있도록, 갖가지 향료들을 유리병에 담아서 쭉 늘어놓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그 후, 내가 마음에 드는 향을 골라서 조합했다.

뭐, 정확히는 조합은 조향사가 도와주었지만 말이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

나는 라키어스를 향해 빙글 돌아서며 활짝 웃었다.

“카를로 일도 바빴을 텐데, 나를 위해서 이렇게 신경을 쓸 줄이야. 나 좀 감동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티티인데, 당연히 챙겨야지.”

피식 웃은 라키어스가, 내 품 안에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안겨 주었다.

“자, 받아.”

그러고는 빙그레 웃어 준다.

“늦었지만 성년이 된 거 정말 축하해.”

“……응.”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통에, 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선물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소중하게 간직할게.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 그럼 타운하우스로 데려다줄게.”

“벌써?”

반사적으로 그렇게 되물은 내가, 아차 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뭐, 솔직히 벌써는 아니긴 하지.

오전부터 계속 라키어스와 함께 돌아다녔으니까.

그래도…….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선물상자 끄트머리만을 만지작거렸다.

라키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나도 저녁 식사까지 함께한 후에 헤어지고 싶은데, 그러면 타운하우스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아…… 그랬었지.

나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타운하우스를 나오기 전, 세 아빠들이랑 할아버지가 신신당부를 한 게 있었다.

‘라키어스, 저는 라키어스를 믿는답니다.’

화사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라키어스를 압박하던 세자르를 시작으로,

‘너, 은근슬쩍 꼬마를 저녁까지 독점할 생각은 아니지?’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는 타티아나를 돌려보내도록 해라. 알았나?’

키리오스와 지크프리트가 두 눈을 부라렸고,

‘1황자 전하, 우리 손녀는 아직 남자와 단둘이 저녁까지 외출하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할아버지마저도 깐깐한 얼굴로 한 마디 거들었다.

‘저기요, 저 이제 성년이거든요?!’

기가 막힌 내가 분통을 터뜨렸으나,

‘예, 꼭 들여보내겠습니다.’

라키어스는 이미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노을이 드리워진 하늘을 흘끗 곁눈질한 라키어스가, 아쉬운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 하지만.”

나는 무어라 말하려 말하려 입을 벌렸으나,

“약속을 어겼다가는, 스승님들과 오를레앙 노공작님께서 나를 땅에 묻어 버리실 것 같기도 하고…….”

“…….”

한숨 섞인 그 목소리에,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냐, 우리 아빠들이랑 할아버지가 그렇게까지 유치하시지는 않아!’

……그렇게 항변할 수 없는 내 처지가 슬펐다.

‘그래도 역시 아쉬워.’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자니, 그를 눈치챈 라키어스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다음에 또 놀면 되니까.”

그 말에, 나는 두 눈을 빛내며 라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당연하지. 내가 이런 걸로 약속 어기는 거 봤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제야 꽁해졌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아서.

나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때.

‘어?’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향수 공방의 맞은편.

황실로 향하는 커다란 대로변을 달리는 마차가 눈에 띈 것이다.

그 모양새부터가 무척 화려했으나,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마차의 외관이 아니었다.

“저 마차, 황실의 문양을 걸고 있는데?”

“그러게. 황실 직계 가족이 타는 마차는 아닌데, 누구지?”

의아한 시선으로 마차를 바라보던 라키어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황궁에 돌어가면 알게 되겠지.”

그러고는 흘끗 나를 돌아본다.

“오늘은 티티랑 외출한 날이니까. 티티에게만 집중할 거야.”

“…….”

나는 다시 한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 내 심장아.

이렇게 일일이 설레는 것 좀 그만하면 안 되겠니?!

* * *

황비궁 앞에 마차가 미끄러지듯이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디 클로비스이십니까?”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여인을 맞이하다 말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어깨에서부터 부드럽게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아마 빛깔 고수머리.

흑요석을 박은 듯 선명한 검은 눈동자.

고작해야 스무 살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엄청난 미인이었다.

시녀는 여태까지 황비의 최측근으로 황궁에 머물면서, 수많은 미인들을 봐 왔었다.

그런 그녀까지 놀라게 할 정도로, 여인의 미모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네, 제가 레이디 클로비스입니다.”

꾀꼬리 같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시녀가 황급히 표정을 고치며 허리를 숙였다.

“황비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감사합니다.”

여인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따스한지, 시녀는 저도 모르게 여인을 따라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 후.

여인은 황비궁의 심처로 안내되었다.

응접실 문을 열어 준 시녀가, 여인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마워요.”

여인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소리 없이 응접실 문이 닫히고.

동시에, 여인의 얼굴에 걸려 있던 따스한 미소는 말끔히 사라졌다.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비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의 네 이름은 모네 클로비스.”

황비는 여인에게 자리를 권하기는커녕, 최소한의 인사조차 생략한 채 용건만을 입에 담았다.

“외부에는 내 먼 친척으로 소개될 것이야. 신분은 내가 미리 만들어 두었으니…….”

탁.

황비는 성마른 손길로 탁자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서류 안의 내용은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도록.”

“그러도록 하지.”

“…….”

불쑥 튀어나온 반말에, 황비가 눈썹을 꿈틀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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