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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21)화 (122/163)

<129화>

“나는 이 제국의 황비야. 예의를 지켜.”

그 말에 여인, 모네가 피식 비웃음을 머금었다.

“주제넘네.”

“뭐, 뭐야?!”

황비가 기가 찬 얼굴을 했다.

하지만 모네는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황비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내가 모시는 분은 오로지 바르톨로아의 가주님 단 한 분뿐.”

모네가 비딱하게 말을 이었다.

“고작해야 미천한 인간에게 지킬 예의는 없어.”

“너, 그게 무슨……!”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황비로서 최대한 대우해 줄 테니, 걱정 말고.”

또각, 또각.

구두 굽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허리를 숙여 서류를 집어든 모네가 무심한 시선으로 황비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나?”

“…….”

“없나 보군.”

어깨를 으쓱인 모네가 재차 말을 이었다.

“먼 길을 와서 피곤해. 쉴 곳을 안내해 줄래?”

“…….”

황비는 분한 시선으로 모네를 노려보다 말고,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게 밖에 누구 있느냐!”

그 부름에, 금세 응접실 문이 열리고.

시녀가 황급히 허리를 조아렸다.

“찾으셨습니까, 황비 마마.”

“레이디 클로비스를 침실로 안내해 주거라.”

“예, 마마. 가시지요.”

그러자 모네는 안면을 싹 바꾸며,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하게 웃어 보였다.

“황비 마마, 이리도 저를 배려해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를.”

나붓하게 예를 갖춰 보인 모네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하, 기가 막혀서!!”

황비는 닫힌 응접실 문을 바라보며 노성을 터뜨렸다.

마음 같아서는 저 오만방자한 계집의 멱살이라도 움켜쥐고,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잘 부탁한다고 했었지.’

황비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음

바르톨로아 가주가 직접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황비가 거절할 수 있는 방안은 없었다.

“미치겠군, 정말…….”

막막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황비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깜깜해진 시야가 흡사 제 미래 같았다.

* * *

“그럼 편히 쉬십시오, 레이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시녀가 침실에서 물러 나왔다.

달칵.

침실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모네의 얼굴에서 싹 미소가 걷혀 나갔다.

“아무리 가주님의 명령이라지만, 미천한 인간들과 부대끼며 지내야 한다니…….”

순간 모네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바르톨로아 가주.

그를 떠올린 탓이다.

모네는 양손으로 양 뺨을 감싸며, 황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가주님.”

그녀를 탄생케 한, 아버지와도 같은 자.

바르톨로아 가주는 그녀의 삶의 이유였고, 주군이었으며, 그녀의 몸과 영혼을 모조리 소유한 주인이었다.

‘너를 믿는다.’

모네가 미천한 인간들의 땅에 발을 딛기 전.

그렇게 말씀하시던 때의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했던가.

“하필이면 세 초월자들의 영향권이어서, 가주님과 연락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모네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시바삐 가주님의 곁에 돌아가야만 했다.

가주님이 계시지 않는 이 천박한 땅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마왕을 가주님께 바쳐야 해.”

모네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게 내가 가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바르톨로아 가주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

그게 모네의 지상 목표였다.

“그분께 인정받고 싶어. 아니, 인정받아야만 해. 그래야만…….”

시시각각 온몸을 갉아먹는 공허함이 채워질 것 같았다.

동시에 모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가주님께서는 언제나 마왕의 이야기만 하시잖아!”

모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어여쁜 손등 위로 새하얗게 뼈가 도드라졌다.

“가주님의 대업에 마왕이 꼭 필요하다는 건 알아, 그래도!”

격렬한 감정에 휩쓸렸던 것도 잠시.

모네는 흡사 스스로를 세뇌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내가 잘하면 될 거야.”

나직하게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기괴하게 울렸다.

“마왕을 가주님께 바치기만 하면…… 그분께서도 나를 좀 더 중히 여겨 주실 거야.”

검은 눈동자에 바짝 날이 섰다.

“분명히 그럴 거야.”

알에서 깨어난 새끼 새가, 처음으로 마주한 천적을 자신의 어미로 착각하듯.

그야말로 맹목적인 충성이며 애정이었다.

* * *

타티아나를 오를레앙 타운하우스까지 바래다준 후.

라키어스는 느지막이 황궁으로 귀환했다.

“환궁하셨습니까, 1황자 전하.”

시종이 라키어스를 정중하게 맞아들였다.

그런 시종을 마주하며, 라키어스는 어렸던 때를 문득 떠올렸다.

그때는 그 누구도 라키어스를 기다렸다 맞이하지 않았다.

홀로 오가는 1황자궁이 어찌나 적막한지, 차라리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령이라도 나와 주기를 바랐다.

그 누구라도 좋으니, 내게 말이라도 붙여 줬으면 하고 원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라키. 뭐 해?’

타티아나의 활기찬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여, 라키어스는 저도 모르게 엷게 미소 지었다.

‘티티가 향수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나름대로 타티아나에게 어울리는 향기를 고른다고 골랐는데.

은근히 긴장이 된다.

‘그만 생각하자.’

라키어스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다가는 하루 종일 타티아나 생각만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성큼성큼 1황자궁 안으로 발을 들이며, 라키어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황실 마차를 내보낸 것 같은데. 귀빈이라도 오신 건가?”

“아, 황비궁에 손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황비궁?”

라키어스가 멈칫했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그 이상으로는 잘 모릅니다. 황비궁에서 함구령을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고개를 끄덕인 라키어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비록 그 귀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비가 저 손님을 꽤 중요하게 여기는 건 사실인 듯하다.

황실 마차를 직접 보내서 데려오고, 황비궁에 꽁꽁 숨겨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저렇게 싸고도는 거지?’

라키어스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어렸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냥회 당일.

사냥회가 열리는 장소는, 제도 외곽에 위치한 황실 소유의 사냥 숲이었다.

숲이 울창하고 동물들이 다채로우며,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호수까지 딸려 있었기에.

갖가지 사교 행사가 자주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와, 날씨 좋네.”

막 사냥 숲에 도착한 내가 짧게 감탄했다.

맑은 햇볕이 내리쪼이는 화창한 날씨.

새파란 하늘 아래, 각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들이 바람을 머금어 펄럭거렸다.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은 천막들 또한 무척 호화로웠다.

‘뭐랄까, 꽤 힘을 준 모양새네.’

나는 주변 풍경을 유심히 살폈다.

음, 듣기로는 이번 사냥회에는 루돌프도 참석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이렇게 신경을 써서 준비한 건가?

“오를레앙 공녀.”

때마침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한껏 위로 치솟아 오르려는 입꼬리에 애써 힘을 주었다.

몸을 돌리자, 라키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라키어스는 오늘도 아주아주 잘생겼다!

‘맵시 좋게 사냥복을 차려입은 라키어스라니, 이 모습은 정말 귀하네요…….’

나는 속으로도 주접을 떨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히 라키어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런, 우리 사이에 너무 정중하게 구시면 상처받습니다.”

너스레를 떤 라키어스가 내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오를레앙 노공작님과 스승님들께서는 오늘 참석하시지 않는 겁니까?”

“네, 그럴 것 같아요. 아까 나오면서 살짝 봤는데, 할아버지와 첫째 아빠가 나란히 집무실에 감금되어 계시더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둘째 아빠랑 셋째 아빠도 아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고요.”

“하기야.”

납득한 라키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번에 아빠들이 내 데뷔탕트 파티에 참석한 것만 해도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들은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 중 하나였으니까.

제국 유일 공작가인 오를레앙의 수장, 마탑의 수장, 대신전의 수장.

아랫사람들이 아빠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리는 이유가 있다니까?

“그건 그렇고, 오를레앙 공녀.”

“네?”

나는 무심결에 라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라키어스가 살짝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나직한 속삭임이 내 귓바퀴를 쓸어내렸다.

“향기 좋네. 잘 어울려.”

“…….”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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