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실은 나, 오늘 라키어스가 선물로 준 향수를 처음으로 뿌리고 와 봤거든.
라키어스가 재차 내게 속삭였다.
“어때, 향기는 마음에 들어?”
“응!”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이자, 라키어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다행이야.”
“라키는 이제 다른 신사들과 합류해야겠네.”
“뭐, 그래야지.”
사냥회의 식순은 대충 이렇다.
레이디들은 오후까지 뱃놀이를 하고, 신사들은 몰이꾼들과 함께 사냥을 하러 사냥 숲으로 들어간다.
그 후.
신사들이 잡은 사냥감을 가지고 귀환하여, 마음에 품은 레이디에게 사냥감을 바친다.
가장 뛰어난 사냥 실력을 가진 신사와, 신사들에게 가장 많은 사냥감을 받은 레이디를 가려 뽑기에.
사냥회가 마칠 때쯤에는 분위기가 꽤 떠들썩해진다고 들었다.
나는 흘끗 천막 하나를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사냥 숲에 들어갈 신사들이 대기하는 천막이…… 저쪽이었지?’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던 신사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웃어 보였다.
그 순간.
라키어스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티티.”
“응?”
나는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
묘하게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라키어스가, 빤한 시선으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라?’
난 어리둥절해져서 두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라키어스가 말끔하게 표정을 정돈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이따 봐.”
으음, 내 착각이었나?
나는 라키어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몸조심해.”
내 말에, 막 걸음을 옮기려던 라키어스가 멈칫했다.
“사냥감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어? 네 몸이 제일 중요하지.”
“응?”
“다치면 혼날 줄 알아. 알았어?”
나는 일부러 더 두 눈을 부라리며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미묘하게 굳어 보였던 라키어스의 눈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명심할게. 그래도 무언가를 잡게 된다면, 티티에게 주고 싶은데.”
라키어스가 달콤하게 내게 물었다.
“받아 줄 거지?”
“…….”
순간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안 돼.
이러다가 내 심장 소리가 라키어스에게 들리면 어떡해!
“생각해 보고.”
일부러 더 새침하게 대답하자, 라키어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공녀님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잡아 오려면, 노력 좀 해야겠는걸.”
“빠, 빨리 가기나 해.”
“알겠습니다. 누구 명령인데 어기겠습니까?”
씩 눈웃음을 지은 라키어스가 신사들의 천막들로 향했다.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무슨 병 걸린 거 아냐?’
그러지 않고서야 라키어스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렇게까지 일희일비할 리가 없잖아!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통에.
나는 한참 바람을 쐬며 얼굴을 식힌 후에야, 레이디들이 모여 앉은 천막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요새 공녀님을 자주 뵐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레이디들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환대했다.
다만 단 한 명.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지금은 에릭슨 자작부인이 된 기베르티 백작영애였다.
‘뭐,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자작부인에게 신경을 꺼 버렸다.
그런데 그때.
“황비 전하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대기하고 있던 레이디들이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를 갖추었다.
“황비 마마를 뵙습니다.”
“황비 마마를 뵙습니다.”
황비가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다들 이렇게 사냥회에 참석해 줘서 고맙네.”
순간 레이디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황비 곁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레이디가 한 명 서 있었으니까.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아마빛 머리카락, 그리고 밤하늘을 조각해 넣은 양 새카만 눈동자.
나는 순간 멈칫했다.
묘하게 익숙한 미모인데…….
‘그럴 수밖에.’
나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소설 속에서 몇 번이나 공들여 묘사됐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여자의 이름은…….
“이쪽은 모네 클로비스. 클로비스 자작가의 레이디로, 내 먼 친척이랍니다.”
맞구나.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원작에서는 모네와 황비 사이의 접점이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황비의 소개로 제도 사교계에 진출하는 모네라니.
솔직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건 다, 내가 원작을 비틀어서 그런 건가.
“모네 클로비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레이디, 모네가 우아하게 예를 갖춰 보였다.
“일정이 맞지 않아 데뷔탕트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앞으로는 쭉 제도에 머무를 거야.”
황비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레이디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레이디 클로비스를 잘 부탁하네.”
황비의 신신당부에, 레이디들은 제각기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세상에,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황비 마마께서 직접 소개하실 정도라니…….”
“황비께서 저 레이디를 꽤 아끼시나 봐요. 그렇죠?”
“솔직히 그럴 만도 해요.”
레이디 중 한 명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저렇게 아름다우신 분은 처음 봤는걸요?”
모네는 삽시간에 레이디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레이디 클로비스께서는 제도에 계실 적에 어디에 머무르시나요?”
한 레이디의 열띤 질문에, 모네가 수줍게 웃었다.
“황비 마마께서 배려해 주셔서 계속 황궁에 머무를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어머나.”
“그럴 수가…….”
레이디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개 귀족 레이디가 황궁에서 머무르는 건 엄연히 특혜였으니까.
반면 난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라키어스와 모네가, 앞으로도 황궁에서 마주칠 수도 있는 거잖아?’
원작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려나 봐.
나는 침울해지려는 기분을 애써 달랬다.
‘괜찮아, 알고 있었잖아.’
라키어스와 모네는 이 세계의 주인공들이었고, 또한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이렇게 진행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더 우울해하지 말자.’
나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레이디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레이디 클로비스께서는 취미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 제 취미요?”
모네가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 모습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조금 서투르기는 하지만…… 원예랑 꽃꽂이에 관심이 좀 있어요.”
“세상에, 꽃을 다루시는 건가요? 어쩜, 취미까지 고상하시네요.”
에릭슨 자작부인이 과장되게 모네의 말에 동조했다.
모네가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 외로는 고대어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이런저런 서적을 보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고대어라고?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고 보면 모네는 원작에서 성녀라고 일컬어질 정도였잖은가.
사실 모네의 명성은 고통 받는 민초에게 헌신하는 것만으로 형성된 게 아니었다.
마계로 진격할 적, 모네는 특유의 박학다식함으로 라키어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고대어는 상대적으로 인간계보다 마계에서 더 많이 사용되는 편이었는데, 모네가 고대어를 해석함으로써 여러 함정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대신전에서 고서적이 발견된 일도 있고 하니…….
‘고서적을 해석하는 데에도, 모네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머나, 그게 정말이세요?”
동시에 에릭슨 자작부인이 두 눈을 반짝였다.
“고대어는 익히기 무척 어렵다고 하던데요.”
“대단한 실력은 아니에요. 복잡하지 않은 문장만 더듬더듬 해석할 줄 아는 정도인걸요.”
모네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레이디들이 은밀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아마도 모네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현재 발견된 고서적만 해도, 제국의 학자들이 잔뜩 달라붙었는데도 해석에 난항을 겪고 있으니까.
‘하지만 모네의 실력은 진짜야.’
무려 원작이 보증했으니 말이다.
“네? 그렇다면 더 대단한 것 아닌가요? 고대어는 유수의 석학들도 제대로 해석해내는 일이 드물다고 들었어요.”
한편 자작부인이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훌륭하세요. 여러모로 교양을 쌓는 데에 소홀하지 않으시네요.”
“과찬이세요.”
“어머나, 과찬이라니요.”
모네의 겸양에, 자작부인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레이디는 이런저런 교양을 쌓아서, 장차 안주인으로서 한 가문을 훌륭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책무가 있잖아요?”
에릭슨 자작부인이 흘끗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아, 물론 요새는 레이디들도 사회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지만…….”
그러고는 그대로 생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열한 미소였다.
“일을 해서 수입을 얻는 일은, 귀족의 품위에는 다소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요. 그렇죠?”
명백히 나를 저격하는 말이었다.
레이디들 중에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번창시킨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하기야 내가 볼프렌의 청혼을 거절한 후, 기베르티 백작가가 이래저래 어려운 처지에 처했으니까.
내가 좋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면…….
‘밟아 주고 싶어지잖아?’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저조한데 말이야.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에릭슨 자작부인, 자작부인의 친정은 제게 빚을 하나 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