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정원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로는 갖가지 꽃들을 늘어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활짝 핀 꽃밭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말이에요…….”
“이번 사교 시즌에는 레이디 브리트니가 처음으로 약혼했다던데…….”
테이블에 둘러앉은 레이디들이 재잘거리며 바쁘게 손을 놀렸다.
꽃을 다듬는다, 꽃다발을 만든다, 꽃꽂이를 한다…….
무척 분주해 보였다.
그중.
나는 반갑지 않은 얼굴을 발견했다.
‘으, 루돌프는 왜 레이디들의 모임에 끼어 앉아 있는 건데?’
그랬다.
루돌프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었다…….
‘라키는 오늘도 집무실에 틀어박혔던데.’
카를로의 새로운 영주에게 인수인계를 제대로 해 주지 못했다면서, 부족한 자료를 다시 보강하여 보내 준다고 말이다.
‘이건 뭐, 일하는 놈과 놀고먹는 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도끼눈을 뜨며 루돌프를 흘겨보던 중.
그 곁에 앉아 있는 귀부인을 발견하자, 나는 그냥 한숨을 쉬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에릭슨 자작부인까지…… 어째 싫은 사람들만 다 모여 있네.’
보통 결혼한 부인들은 부인들끼리 교류하고, 미혼 영애들은 미혼끼리 교류하는 게 관례였다.
물론 어렸을 적부터 친분을 가졌다면 예외지만…….
‘에릭슨 자작부인은 친구가 거의 없지.’
미혼 시절에 개판으로 살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막상 결혼하게 되자, 어렸을 적처럼 부인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기 어렵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모네가 사교계에서 인기가 높아지니, 일부러 그 곁에 딱 붙은 거지.
‘한심하기는.’
내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던 차.
때마침 레이디들이 나를 발견하고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나, 오를레앙 공녀님!”
“감기에 걸리셨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완쾌하셨…….”
순간 레이디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아니, 공녀님께서 왜 저런 스카프를 하셨죠?’
‘드레스랑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요.’
‘저 스카프 하나 때문에, 옷차림이 완전히 망쳐진 것 같은데요.’
레이디들이 제각기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리에 앉은 루돌프에게 예를 갖추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 오를레앙 공녀.”
아무래도 내 옷차림이 상당히 파격적이었나 보다.
저 루돌프조차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때마침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아, 오를레앙 공녀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모네가 서 있었다.
“…….”
나를, 정확히는 내가 목에 두르고 있는 스카프를 발견한 모네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네는 매끄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녀님께서 제 원예 모임에 참석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영광이에요.”
아하, 이 스카프에 대해서는 일단 모른 척하시겠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레이디 클로비스께서 초대장을 보내 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그러고는 일부러 더 해사하게 눈매를 휘어 보인다.
“모처럼 레이디 클로비스가 제게 주신 선물을 자랑할 기회인걸요.”
“…….”
“…….”
순간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때요, 저와 잘 어울리나요?”
나는 스카프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좋은 선물을 해 줘서 정말 감사해요.”
“공녀님. 그…….”
모네가 내게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나는 해맑은 목소리로 말을 가로막았다.
“언제라도 좋으니 편할 때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네?”
“별 건 아니고, 이 스카프에 대한 답례를 해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함께 의상점에 가요. 네?”
겉으로는 천진한 얼굴을 꾸며 내며, 나는 슬쩍 레이디들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레이디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마 내가 일부러 이 자리에 스카프를 매고 왔다는 것도, 그리고 의상점 운운하며 모네에게 눈치를 주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도 남겠지.
그런데도 레이디들의 분위기가 내 쪽으로 기울어진 이유는.
“설마, 저 스카프를 공녀님께 선물로 드린 거예요?”
“옷감의 질이며 무늬까지…… 저건 너무하잖아요.”
“아니, 저런 선물을 줘 놓고 상대가 기분 나빠했다며 화를 냈다고요?”
정말로 스카프의 꼴이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런 형편없는 선물을 보고 있자니, 레이디들은 또 한 번 의심하게 되었다.
‘혹시 황비 마마께서 레이디 클로비스를 홀대하시는 건 아닐까요?’
‘그러지 않고서야, 무려 오를레앙 공녀님께 저런 선물을 드린다는 데 허락하실 리가요.’
순간 모네가 살벌한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
왜, 뭐, 왜?
나는 여유롭게 모네의 시선을 맞받았다.
그런데 그때.
“레이디 클로비스!!”
루돌프가 테이블을 양손으로 탕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스카프는 도대체 뭐야?!”
어찌나 기세가 살벌한지, 자리에 앉아 있던 레이디들이 움찔 어깨를 굳힐 정도였다.
아니, 평소에는 모네와 무슨 평생의 연인이라도 된 양, 저 좋을 대로 매번 이곳저곳 끌고 다녔잖아.
겸사겸사 신사들에게 모네의 미모를 과시하며,
‘오늘도 레이디 클로비스는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사교계의 샛별은 결국 2황자 전하께서 차지하신 겁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신사들의 부러움과 시샘의 눈빛을 즐긴 건 덤이었고 말이다.
그래 놓고서는,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건 도대체 뭐야?
모네를 그렇게 알뜰하게 이용해 먹었으면, 최소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질책하는 배려는 보여 줄 수 있잖아.
“레이디라면 마땅히 물건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지! 레이디를 꽤 좋게 봤었는데, 정말 실망이야!!”
루돌프가 모네를 노려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저런 쓰레기를 선물하면, 당신을 후원하는 어마마마의 명예까지 깎여 나가는 거 몰라?!”
“죄송해요.”
모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루돌프를 바라보다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루돌프는 계속해서 언성을 높일 따름이었다.
“레이디 클로비스의 선물 하나 때문에, 오를레앙과 황가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그건 그쪽이 할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여태까지 루돌프가 한 가지각색의 진상 짓을 떠올리던 난, 그만 흐린 눈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루돌프는 계속 기세등등하게 모네를 질책할 따름이었다.
“내가 여태까지 귀한 선물을 얼마나 많이 안겨다줬어?! 최소한 선물을 준 값어치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정색했다.
‘아니, 저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루돌프는 지금, 모네에게.
‘내가 너에게 투자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 값을 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 태도에서, 루돌프가 모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훤히 드러났다.
루돌프는 모네를 자신의 가치를 높여 줄 액세서리로 여길 뿐.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보는 눈이 많은 이 자리에서 모네에게 저렇게까지 대놓고 면박을 주지는 않을 것이리라.
하지만 더 답답한 건.
“죄송합니다.”
재차 그렇게 사죄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모네의 태도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솔직히 당사자인 나도 모네를 저렇게 심하게 질책하지는 않았는데.
루돌프가 뭐라고 모네에게 저렇게까지…….
‘아니, 난 왜 모네의 편을 들고 있는 거람?’
나는 치솟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와락 미간을 구겼다.
모네가 재차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2황자 전하, 그리고 황비 마마께 누를 끼친 점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무감정한 검은 눈동자가 흘끗 나를 돌아보았다.
“즐거운 자리에 저 때문에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아 마음이 쓰이고, 공녀님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면구스러우니…….”
모네가 우아하게 예를 갖췄다.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사라진다.
“…….”
“…….”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하, 정말. 레이디 클로비스가 내 얼굴에 이렇게나 흙칠을 할 줄이야!”
루돌프는 여전히 씩씩거렸고.
“레, 레이디 클로비스를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건가요?”
“그래도 누구라도 쫓아가 보셔야 하는 게 아닌지…….”
레이디들은 조금 껄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으로만 그렇게 떠들어 댈 뿐,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평소 모네의 옆에 착 붙어서, 입속의 혀처럼 굴던 에릭슨 자작부인마저도.
이번에는 가만히 앉은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살필 따름이었다.
“…….”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입맛이 좀 씁쓸해졌다.
모두에게 투명인간 취급받으며 외면당하는 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나는 잘 아니까.’
어렸을 적, 마왕성에 갇혀 있었을 때.
질리도록 겪었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