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오를레앙 공녀님?”
“아,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나는 나를 부르는 레이디를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바람도 쐴 겸 잠시 걸으려고요.”
그 말을 끝으로.
목에 맨 스카프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내며,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웃기지 마, 난 지금 모네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니야.’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냥, 이 서로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그래서 움직이는 것뿐이라고!
* * *
‘……아니, 그래서 모네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건데?’
나는 모네가 떠난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모네는커녕 모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도 않는다.
“하아,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얄미운 모네를 신경 쓰다 못해, 결국 모네를 찾으러 뛰쳐나오기까지 하다니.
나는 왜 이렇게 사람이 무른 거야?
뭐, 솔직히 모네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라키어스가 ‘모네가 날 일부러 호수에 빠뜨린 거다’라고 증언해 주었던 그때부터.
나는 원작의 여자주인공에 대한 호감을 싹 정리해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까 루돌프 그 자식, 너무 심했잖아.’
모네의 어둑한 눈동자가 눈에 선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상처 받은 티라도 내면 좀 나았을 텐데.
모네는 아예 감정이라고는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아아…….”
나는 다시 한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때.
“티티, 땅 꺼지겠다.”
웃음기 섞인 다정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붙여 왔다.
깜짝 놀란 내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키?”
라키어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뭐야, 너 왜 여기에 있어? 오늘은 카를로에 인수인계할 자료를 만든다고…….”
“네가 오늘 입궁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잠깐 네 얼굴이나 보러 가려고 한 건데.”
라키어스가 괜히 시무룩한 표정을 꾸며내며 내게 되물었다.
“그래서 내가 널 만나러 온 게 싫어?”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지레 놀라 대답했다.
라키어스가 일부러 날 놀리기 위해 서운한 척하고 있다는 것쯤, 다 아는데.
그런데 왜…….
‘괜히 내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하지만 이건 내 입장도 이해해 줘야 한다.
그야말로 조각 같은 미남이, 나비 같은 속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서러운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는 상황인걸.
뭐든 간에, ‘일단 내가 잘못했다’라고 나오게 되지 않아?
……아닌가? 내가 너무 얼굴을 중시하는 건가?
동시에 라키어스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티티 넌 왜 혼자 있어? 당연히 다른 레이디들과 정원에 있을 줄 알았는데.”
헉.
순간 난 헛숨을 삼켰다.
“레이디 클로비스!”
맞아, 나 모네를 찾으러 나온 거였지!
순간 라키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레이디 클로비스는 왜?”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말투였다.
“아, 그게…….”
난 아까 전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나에 대한 소문이 이상하게 퍼져서, 일부러 그를 되갚아 줄 겸 스카프를 두르고 갔던 것.
그랬더니 루돌프가 모네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었던 것.
모네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질책하는 게 아니라, 마치 모네가 자신의 액세서리라도 되는 양 말했던 것까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물을 준 값어치는 해야 한다는 말은 심하잖아.”
“……루돌프가 그렇게까지 말했어?”
라키어스도 루돌프의 폭언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랬다니까? 솔직히 레이디 클로비스가 거기서 화내기 어려운 입장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당겨 물었다.
“2황자 전하께서 그렇게 막말을 하시는데도, 그저 무표정하더라고. 아예 아무런 불만조차 없어 보였어.”
“…….”
“남이 나를 함부로 대하면 반발하는 게 당연한데, 레이디 클로비스는…….”
무어라 더 말하려던 내가 순간 말끝을 흐렸다.
라키어스가 드물게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래도, 티티 네가 그렇게까지 레이디 클로비스를 신경 써 줄 필요가 있어?”
라키어스는 드물게 날 선 어조로 되물었다.
“레이디 클로비스가 네게 저지른 짓이 있는데.”
“……그건 나도 알지만.”
나는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모네가 이 세계의 여자주인공이어서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런 취급은 받아서는 안 되는 건데.’
그런 모네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아빠들에게 구원받기 전의 내가 떠올라서.
자꾸만 내가 겹쳐 보여서…….
동시에 라키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티티, 난 솔직히 네가 너무 무르다고 생각해.”
“그래서? 마음에 안 든다 이거야?”
조금 샐쭉해져서 그렇게 되물었더니, 라키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 반대야.”
“응?”
“네가 무르고 다정한 사람이라서 좋아.”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따스했다.
“네가 그렇게 다정하지 않았더라면,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주지도 않았을 거고.”
“……어?”
“우리가 이렇게 친해질 수도 없었을 거 아냐?”
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라키어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넌 이대로 있어도 돼. 너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그 순간.
붉은 눈동자가 내 뒤편의 아름드리나무를 흘끗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대신 신경 쓰면 되니까.”
또, 또!
시도 때도 없이 사람 설레게 만드네!
양 뺨이 화끈거리는 기분에, 나는 괜히 새침하게 라키어스를 향해 손을 불쑥 내밀었다.
“나 산책하고 싶어. 에스코트나 해 줘.”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라키어스가 싱긋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 * *
그렇게 라키어스와 타티아나가 사라지고.
무성하게 드리워진 나무 뒤편에서 모네가 걸어 나왔다.
“…….”
모네가 두 눈에 날을 세우며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기분 나빠.’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1황자는 자리를 뜨기 전, 모네가 숨어 있는 나무 그늘 쪽을 명확히 바라보았었다.
그건 분명히 그녀의 기척을 느낀 자의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넌 이대로 있어도 돼. 너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내가 대신 신경 쓰면 되니까.’
그 말은 아마 모네를 향한 경고일 터.
“미천한 인간 주제에…….”
모네는 까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솔직히 루돌프의 태도 자체는 별생각 없었다.
하찮은 벌레가 제가 뭐라도 되는 양 행동한다 한들, 벌레는 그저 벌레일 뿐이다.
미천한 인간 주제에, 정말로 자신이 주도권을 쥐기라도 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꼴이 아주 우스울 따름이었다.
다만 모네를 가장 돌아 버리게 만드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마왕…….’
타티아나.
운 좋게 마신의 선택을 받아 마왕이 되었고.
그 이유만으로도 모네가 평생을 원했던 가주님의 관심을 독차지한 계집.
제가 움켜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조차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계집.
그녀의 존재 자체가 거슬렸다.
하지만…….
‘정말로 거슬리기만 한 걸까?’
불현듯 그런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물을 준 값어치는 해야 한다는 말은 심하잖아.’
‘2황자 전하께서 그렇게 막말을 하시는데도, 그저 무표정하더라고. 아예 아무런 불만조차 없어 보였어.’
‘남이 나를 함부로 대하면 반발하는 게 당연한데, 레이디 클로비스는…….’
처음이었다.
모네의 입장을 고려하고 생각해 주는 사람은.
타티아나 그 계집이 정말 미운데.
그런데도…….
자꾸만 그 말을 곱씹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치 모네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누군가가 툭툭 건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모네의 사지를 꽁꽁 얽어맨 무언가를, 누군가가 갉작거리며 조금씩 갉아내는 듯한…….
기이하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느낌.
‘도대체 이 느낌은 뭘까.’
혼란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네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모네는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네가 평생 살아왔던 환경이 그러했으니까.
누군가가 무심하게 내리는 명령 한 마디만으로, 당장 폐기처분당할 수도 있는 삶.
살아남기 위해 평생을 갈고 닦아 온 예민한 감각이, 모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계집이 나를 싫어하는 건 확실한데.’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모네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모네가 받는 부당한 대우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검은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