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저 정도의 재능이었다면 예전부터 두각을 드러내야 하는데, 레이디 클로비스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뭐…… 그건 그렇지.”
키리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똑똑한 사람은 꽤 있지. 수재들도 찾으려 하면 찾아낼 수 있어. 다만 그 애의 능력은 그 범주를 넘어선 것 같기는 하네.”
“물론 레이디 클로비스가, 우리처럼 몇백 년 만에 태어난 천재일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세자르가 슬쩍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건 너무 희귀한 확률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자르는 표정을 풀며 피식 웃었다.
“뭐, 그래서 조금 의아하게 여겼을 뿐이랍니다.”
“…….”
“그래도 레이디 클로비스가 합류함으로써, 해석 작업이 유의미한 진척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세자르가 말을 맺었다.
“다들 이번 성과로 무척 기뻐하고 있으니, 굳이 제가 나서서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는 해요.”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더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키리오스와 지크프리트는 각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했으나, 모네에 대한 화제를 더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학계에서 밝히기를, 고서적의 정체는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서로…….>
각 언론사를 통해, 마침내 고서적의 내용을 완벽하게 해석했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 * *
고서적의 전문을 해석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던 위대한 업적이었다.
세 용사들은 해석본 발표회에 초대받았고, 나 또한 아빠들의 일행으로서 발표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다만 키리오스는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죽상이었는데.
“그 고대 마법의 정체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고서적의 내용 해석과는 달리, 고대 마법의 해석 작업은 영 지지부진했기 때문이었다.
마탑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탑주인 키리오스까지 고대 마법의 조사에 합류했지만.
아직까지도 고대 마법의 해석은 그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마력인 것 같기는 한데, 또 완벽하게 마력이라기에는 이질적이고…….”
“…….”
나는 복잡한 시선으로 키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키리오스가 고민하는 부분의 해답을 알 것 같아서였다.
‘그거, 마기와 마력이 뒤섞인 기운이었지.’
하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키리오스에게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날.’
모네에게 밀쳐져, 호수에 빠졌던 그날.
내 몸속의 마기가 나를 구하기 위해 강제로 각성했었다.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마기를 강제로 억누르면서,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인간이 아니야.’
인간에게도, 마족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반인반마.
그게 바로 나였다.
비록 아빠들은 내가 반인반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나 또한 아빠들이 내게 보여 주는 애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내게는 끝내 밝히지 못한 비밀이 있었으니까.
‘나는, 마왕이야.’
인간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존재.
인류를, 더 나아가 세상을 멸망시킬 끔찍한 괴물.
물론 아빠들은 반인반마인 나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다.
그에 정말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아빠들이…… 내가 마왕임을 알게 된다면.’
그때도 날 받아들여 줄까?
지금처럼 내게 환하게 웃어 줄까?
마왕이라는 커다란 비밀을 숨긴 나를.
아빠들을 기만하며, 오로지 나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했던 나를…….
지금까지처럼 소중한 딸로 대해 줄까?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빠들이 내 몸에 흐르는 마족의 피를 최대한 의식하지 못하도록.
마족에 관한 화제에 대해서는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이었다.
“응? 꼬마, 왜 그렇게 쳐다봐?”
때마침 키리오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나를 응시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웃어 보였다.
키리오스가 수상하다는 것처럼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더 궁금한데?”
“도착했다. 내릴 준비 하도록.”
다행스럽게도 지크프리트가 적절히 대화에 끼어들어 주었다.
저 멀리 대신전의 전경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해석본 발표회를 위해 대신전에서 중앙 홀을 개방했다지.’
중앙 홀은 빛의 신을 위한 미사를 집전할 때에만 사용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그러니, 그만큼…….
‘대신전에서도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겠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그저 고서적을 하나 해석한 것뿐인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 * *
중앙 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취재진들이 가득 몰려 있었고, 심지어는 황족들도 몇몇 모습을 보였다.
비록 황제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라키어스는 물론이고 황비와 2황자 루돌프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루돌프는 마치 제가 고서적을 해석해 내기라도 한 것처럼 거드름을 피워 댔다.
“어마마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고서적을 해석하다니요!”
“……그래.”
반면 황비는 그리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왜 저런 표정이지?’
황비는 직접 모네를 데려왔고, 그녀가 제도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후원자까지 되어 준 사람 아닌가.
모네의 성취는 곧, 황비의 명성과도 직결된다.
그러니 당연히 모네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다지 기뻐하는 것 같지 않네.’
오히려 못마땅해 보이는데.
내 기분 탓인가?
‘뭐,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
나는 그쯤에서 신경을 끊고,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그것보다는 세자르를 찾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이번 발표회가 대신전 중앙 홀에서 열렸기에, 세자르는 행사를 총괄하러 먼저 대신전에 와 있었다.
때마침 우리를 발견한 라키어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스승님들, 잘 지내셨습니까?”
먼저 두 아빠를 향해 인사를 건넨 라키어스가, 이내 나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티티도 잘 있었어?”
“오랜만이야, 라키.”
나도 라키어스를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원예 모임에 참석했던 이래로, 라키어스는 처음 보는 것 같지?
“혹시 셋째 아빠 못 봤어?”
“세자르 스승님? 아, 마지막으로 중앙 홀을 둘러보시겠다면서 가셨어. 곧 오실 거야.”
“티티 양!”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라키어스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세자르가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기다리다가 눈 빠지는 줄 알았어요. 오느라 힘들지는 않았고요?”
세자르는 오로지 내게만 관심을 쏟았고.
그를 보다 못한 키리오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핀잔을 주었다.
“야, 우리들도 왔거든?”
물론 세자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쩌라고요?”
“…….”
울컥한 키리오스가 무어라 한 마디 쏘아붙이려던 바로 그때.
“발표자, 레이디 클로비스를 모시겠습니다.”
단상 위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레이디가 걸어 들어왔다.
모네였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커다랗게 둘러본 모네가, 이내 수줍게 웃어 보였다.
“이 자리를 찾아 주신 귀빈 여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단상 주변에 자리 잡은 학자들을 향해서도, 꾸벅 묵례를 해 보였다.
“또한 제게 발표자의 자리를 주신 동료 학자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려요.”
듣기로는 이번 해석 작업에 가장 지대한 공로를 세웠기에, 그녀에게 직접 발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했다.
아마 모네를 해석 작업에 꽂아 넣은 황비와, 황비 뒤에 있는 필로멜 후작가의 눈치를 본 탓도 있겠지만.
“거두절미하고, 저희가 해석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모네는 기다란 지휘봉을 들어, 제 등 뒤에 걸린 커다란 종이를 가리켰다.
종이 위로는 고서적의 고대어 해석본을 써 놓았다.
<하늘이 찢어지고, 검은빛이 내릴 때.
만물이 공포에 젖어 들 것이다.
최후에 약속의 사람이 돌아와서, 모두에게 평화를 선사하리라.>
딱 보아도 그리 긍정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하늘이 찢어지고, 만물이 공포에 젖어 든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검은빛이 내리고, 만물이 공포에 젖어 들다. 이 말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잔뜩 긴장한 사람들 앞에서, 모네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마왕의 강림이죠.”
“…….”
“…….”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이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마족들과 혈투를 벌인 지도 거의 16년이 흘렀다.
하지만 제국민들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왕의 이름 아래에 모인 마족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말이다.
“저희는 여기서 언급된 ‘약속의 사람’, 그리고 ‘평화를 선사한다’라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잠시 숨을 들이쉰 모네가, 극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긴 토론 끝에, 저희는 약속의 사람을 마왕으로 보았습니다.”
순간 사람들이 커다랗게 술렁였다.
“세상에, 마왕이라고요?”
“말도 안 돼요!”
“다섯 마왕을 토벌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는데, 새로운 마왕이 또 나타난단 말입니까!”
그 소란 속에서.
모네는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음험한 빛을 품고 반짝였다.
……그 눈빛은 마치, 내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