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그 질문에 대답해 드리기에 앞서, 루돌프 2황자께 하나 묻고 싶군요.”
“뭐, 뭡니까?”
바짝 긴장한 루돌프가 루돌프를 향해 두 눈을 부라려 보였다.
라키어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발아래를 기어 다니는 벌레를 흘끗 일별하듯, 일말의 안타까움을 담아서.
“청문회 시작부터 계속 필로멜 후작의 의견에 동의만 하고 계신데, 본인의 의견은 전혀 없으신 겁니까?”
“…….”
“심지어는 중간부터는 동의하는 의사 표현조차 없이, 계속 침묵하고 계시는데.”
라키어스가 재차 쐐기를 박았다.
“제가 듣기로는, 2황자께서 이번 청문회를 개최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다고 하던데요.”
“아, 아니, 저는…….
“그래서 여쭙습니다.”
입술만을 달싹이는 루돌프를 향해, 라키어스가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필로멜 후작께서 제시한 문제에 대해, 2황자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제, 제 생각 말입니까?”
“예. 카를로에 군대를 너무 많이 배치했다는 의견 말입니다.”
“그, 그건.”
루돌프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솔직히 말해서, 아예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어마마마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더라?’
루돌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오늘 루돌프가 청문회에 나서기 전, 황비가 그의 어깨를 붙들며 뭔가를 주의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귀찮아서 거의 흘려들었다.
하지만 청문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루돌프를 향해 있었고.
라키어스의 온기 없는 붉은 눈동자는, 흡사 칼날처럼 루돌프의 목을 짓눌러 왔다.
당장이라도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만 같은 강렬한 압박함.
“국고는…… 중요하지요.”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루돌프는 일단 아무 말이나 꺼냈다.
라키어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게 2황자의 의견입니까?”
“…….”
안 돼!
라키어스의 뒤에 선 필로멜 후작이, 필사적으로 입술을 뻐끔거리며 루돌프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루돌프의 입은 이미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 카를로에 배치된 군을 감축하면, 제도의 신민들에게 더 큰 혜택을 줄 수도 있을 것이고…….”
“아하, 그러시군요.”
라키어스가 빙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2황자께서는, 마계와 국경을 맞댄 카를로의 군대를 빼내어.”
일견 부드럽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루돌프에게 되물었다.
“제국의 중심부, 가장 안전한 곳에 위치한 제도의 신민들에게 좀 더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렇죠?”
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 내용은 루돌프의 심장을 푹 찔러 들었다.
“아니……!”
루돌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라키어스는 루돌프에게 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2황자께서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십니다만.”
라키어스가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귀족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
“…….”
귀족들은 서로 불만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후.
나이가 지긋한 귀족 한 명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마왕을 경계하라는 예언이 나온 지도 얼마 안 된 시점입니다.”
루돌프의 눈동자가 형편없이 흔들렸다.
귀족이 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도의 신민들을 보살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는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고 군사들을 격려하는 게 순리이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카를로가 뚫린다면, 마족들이 제국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도 순식간일 텐데요.”
“마족들이 우리의 땅을 짓밟는다면, 제도의 신민을 보살필 기회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후작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끝났어.’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어 보려고 무리수를 두었던 자신.
그리고 그게 무리수인지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라키어스의 말 몇 마디에 형편없이 휘말려 들어간 루돌프 2황자.
그야말로 최악의 조합이었다.
게다가 2황자는 지금, 무의식적으로 제도가 다른 지역들에 비해 훨씬 더 지원받아야 한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황제는 만민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러니 마땅히 모든 지역을 공평하게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야만 하는데.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저렇게 차별적인 시각을 보인 것 자체가…….
“이번 청문회로, 필로멜 후작과 2황자 전하의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교묘하게 자신과 귀족들을 한편으로, 필로멜 후작과 2황자를 한편으로 묶으면서.
“여태까지의 제 행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키어스가 정중하게 말을 맺었다.
동시에 붉은 눈동자가 딱하다는 양 가늘어졌다.
“또한 이번 기회에, 2황자께서도 황족으로서의 자신의 행적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루돌프가 제 밑바닥을 보인 부분을 꼬집은 것이다.
‘제길!’
루돌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일그러진 낯을 마주하며.
라키어스는 자신이 완벽하게 승리했음을 직감했다.
* * *
청문회가 모두 끝나고.
라키어스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노을이 붉게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1황자 전하!”
“1황자께서 뛰어난 역량을 지니셨다는 건 알았지만, 오늘은 정말 놀랐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시다니, 돌아가신 황후 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라키어스에게 말 한 마디라도 더 붙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모두 여러분 덕택이지요.”
대충 웃으며 몇 마디 말을 섞어 주던 라키어스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인적이 드문 1황자궁의 후원.
그 가운데에 선 라키어스가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러던 중.
라키어스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장미는?’
노랗고 탐스러운 장미 꽃송이가 정원 곳곳에 무리 지어 피어나 있었다.
레이디 클로비스가 가장 좋아한다는 그 장미였다.
바람결에 꽃송이가 한들거릴 때마다, 지독하게 달콤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요새 레이디 클로비스가 장미를 유행시켰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지독하게 피곤한데, 싫어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꽃이라니.
저절로 기분이 저조해졌다.
‘정원사에게 말해서 뽑아 버리던가 해야지.’
그건 그렇고.
라키어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전부터 계속 등 뒤로 살금살금 따라붙는 기척이 있어서였다.
‘도대체 누구기에?’
라키어스가 예고 없이 뒤를 휙 돌아보자.
“으악!”
되레 놀란 상대방이 비명을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어째 익숙하다.
라키어스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티티?”
“아우, 깜짝이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화들짝 어깨를 움츠린 타티아나가 들으란 듯이 툴툴거렸다.
라키어스가 당황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네가 왜 여기에……?”
“왜겠어? 걱정되니까 왔지!”
핀잔을 준 타티아나가 걱정스럽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괜찮아?”
“응?”
잠시 눈을 깜빡이던 라키어스가 버릇처럼 미소 지었다.
“아, 청문회는 잘 끝났어. 그러니까…….”
“아니, 청문회 말고.”
고개를 가로저은 타티아나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너는 괜찮으냐고.”
“…….”
라키어스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유심히 그의 얼굴을 관찰하던 타티아나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너, 지금 엄청 피곤해 보여.”
“이런.”
라키어스가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피식 쓴웃음을 짓는다.
“티티, 넌 정말 대단해.”
“응? 뭐가?”
“내가 피곤한 거 어떻게 알았어? 아무도 모르던데.”
그러고 보면, 타티아나는 그의 이상 반응을 항상 잘 알아채고는 한다.
심지어는 라키어스와 평생을 부대끼며 살아온 세 스승님들조차도, 그가 작정하고 표정을 감추면 눈치를 못 챌 때가 있는데 말이다.
한편 타티아나는 되레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딱 보면 보이는데?”
“……그래?”
“응.”
고개를 끄덕인 타티아나가 그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자, 받아.”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감싸인 사탕이었다.
타티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피곤할 때는 달콤한 걸 먹으면 좀 기운이 나더라고.”
“…….”
라키어스는 손안에 들린 사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새삼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예전에도 스승님과 훈련하고 있을 적, 네가 이렇게 간식을 갖다줄 때가 있었는데.”
“그래, 나밖에 없지?”
타티아나가 보란 듯이 가슴을 쭉 폈다.
라키어스는 그런 타티아나를 한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집요한 시선에, 타티아나는 괜히 제 뺨을 문질러 닦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동시에 라키어스는 피식 웃어 버렸다.
“네 말이 맞다 싶어서.”
“응?”
“너밖에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