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아가씨야말로 앞으로도 저 모른 척하시면 안 돼요. 알았죠?”
그런 노라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져서.
“다, 당연하지.”
나는 눈을 꼭 감으면서 노라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러고는 괜히 칭얼거린다.
“빨리 준비해야 해. 오늘 라키어스가 여섯 시 반에 데리러 온다고 했어.”
“어휴, 알았어요. 제가 어련히 시간에 맞춰 드리려고요?”
노라가 피식 웃으며 나를 달래 주었다.
‘얼굴 전체에 팩을 발라 두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코끝이 새빨개진 모습을 들켰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 *
그리하여 오후 일곱 시.
여름맞이 축제가 열리는 시각이었다.
라키어스와 함께 야시장으로 들어선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하게 떴다.
‘와, 세상에.’
어두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등불들.
그 아래로 길게 늘어선 알록달록한 지붕의 노점상들.
노점상 주변을 오가는 레이디며 신사들까지.
아직 야시장 초입인데도, 축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무엇보다도 다들 무척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오늘 제일 즐거운 사람은 바로 나일걸?’
나는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내 곁에 서 있는 라키어스를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라키랑 같이 축제에 올 수 있다니!’
오늘도 라키어스는 매우, 무지, 엄청나게 잘생겼다!
그렇게 힐끔거리며 라키어스를 관찰하던 중.
‘어라?’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라키어스…… 정말로 옷차림에 신경 쓴 것 같지 않아?’
잘 정돈한 금발.
몸에 꼭 맞도록 재단한 셔츠와 바지, 그리고 편안해 보이는 정장 재킷까지.
비록 화려한 옷차림은 아니었으나, 옷의 재질 자체가 무척 고급스러웠다.
물론 옷걸이가 워낙에 뛰어나니 뭘 입혀 놔도 태가 나지만…….
순간 나와 라키어스의 눈이 딱 마주쳤다.
“티티, 왜?”
“그으…….”
데록데록 눈동자를 굴리던 나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어쩐지 오늘은 유난히 잘생겨 보여서.”
“그래?”
라키어스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신경 쓴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으응?”
신경을 썼다고?
그러니까, 나와의 외출을 위해?
때마침 라키어스가 여상하게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티티랑 같이 외출하는 중요한 날이잖아.”
“…….”
“너에게는 항상 잘 보이고 싶거든.”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다.
“그, 그래?”
안 돼, 라키어스에게 이렇게 빨개진 얼굴은 보여 주고 싶지 않단 말이야!
순간 얼굴이 훅 달아오르는 통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나는 멈칫했다.
‘어라?’
야시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화단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노란 장미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 있었다.
꽃잎이 등불의 빛을 한껏 머금고 매끄럽게 윤이 난다.
그 탐스러운 자태가 눈에 익었다.
‘저 장미는…….’
때마침 나를 따라 시선을 돌린 라키어스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저거, 레이디 클로비스가 키우던 그 장미 아냐?”
라키어스가 질색을 하며 투덜거렸다.
“저 장미들, 이제 지긋지긋해.”
“지긋지긋하다고?”
“그래. 레이디 클로비스가 황비 마마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황궁에 저 장미들이 가득하다고.”
붉은 눈동자가 불만스럽게 장미들을 뜯어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온 제도에 저 장미를 심어 둘 기세잖아?”
“으음…….”
나는 오묘한 기분이 되었다.
최근 모네가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저건 좀 심한 것 같기는 하다.
나만 해도 황궁에 들락거릴 때마다 장미를 몇 번이나 보기도 했고 말이야.
‘심지어는 1황자궁의 정원에도 심어 놨었지?’
순간 난 기분이 저조해졌다.
“…….”
물론 나도, 현재 라키어스와 모네 사이에 아무런 이성적인 기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원작에서 얼마나 절절한 사랑을 했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모네와 라키어스 사이에 일말의 접점이라도 생기는 게 질투 난단 말이야!
그런데 그때.
‘응?’
내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때마침 라키어스가 불쑥 나의 손을 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라, 라키?”
놀란 내가 라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내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라키어스는 뚫어져라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엄청 많잖아.”
평소의 여유로움은 간데없이, 라키어스가 뺨을 붉히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중간에 놓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멍하니 라키어스를 응시하던 내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맞아, 서로 엇갈리기라도 하면 난처해지지.”
오늘은 정말 완벽한 밤이었다!
* * *
나와 라키어스는 손을 맞잡은 채 야시장을 거닐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는데.
‘앗, 이 냄새는?’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돌렸다.
갖가지 간식거리를 파는 노점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철판 위에 한 입 크기로 조그맣게 잘라 낸 스테이크를 볶고 있던 노점상이, 나를 보자마자 싱긋 웃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게 시작이었다.
케첩과 머스터드를 듬뿍 뿌린 핫도그.
막대에 갖가지 과일을 꽂아 달콤한 시럽을 뿌린 과일 꼬치.
종이컵에 수북하게 담아 낸 감자튀김.
속에 달콤한 소를 가득 채워 구워낸, 손바닥만 한 빵까지.
나는 눈에 띄는 모든 간식들을 홀린 듯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 달콤한 간식과 짭짜름한 간식을 똑같은 비중으로 사들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조절했다.
왜냐고?
단것과 짠 것을 번갈아 가면서 먹어야 더 맛있으니까!
“티, 티티. 그걸 어떻게 다 먹으려고…….”
보다 못한 라키어스가 나를 만류하려 했으나,
“다 먹을 수 있어.”
나는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대답했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어렸을 적 하도 골골거렸던 탓에, 우리 아빠들이 길거리 음식을 엄중히 금지했으니까.
그 말은 즉.
내가 길거리 음식을 사 먹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다!
결국 나와 라키어스는 잡았던 손을 놓고, 양손에 간식을 가득 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내 욕심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기에,
“라키, 목마르지 않아? 우리 주스 마실까?”
나는 ‘갓 짜낸 오렌지 주스 있습니다!’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노점상을 곁눈질로 흘끗거렸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아, 티티.”
아무래도 한심하다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았으나, 다 티 난다.
“혹시 간식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
“아니? 근데 달고 짠 간식을 번갈아 먹는 취미는 있어.”
나는 핫도그와 과일 꼬치를 번갈아 한 입씩 먹으며 대답했다.
순간 라키어스의 얼굴에 고뇌가 가득 서렸다.
라키어스가 제 양손에 잔뜩 든 간식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패배감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고작해야 길거리 간식에 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웅? 모라고 해써?”
입 안에 간식을 가득 물고 웅얼거리자, 라키어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 그렇다면야.
나는 과일 꼬치를 하나씩 쏙쏙 빼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키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흘겨보았다.
“너 혼자 먹어?”
“어…….”
나는 떨떠름하게 라키어스를 마주 보다가, 몸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과일 꼬치 더 사러 갈까?”
아니, 근데 왜 저래?
아까 과일 꼬치를 두 개 사는 건 어떠냐고 물었을 때에는 질색을 했으면서.
처음부터 두 개를 샀으면 이렇게 번거로울 일은 없었을 거 아냐?
그러자 라키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 한 입만 먹고 싶은데.”
“응?”
라키어스가 뚱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재차 뻔뻔하게 요구해 왔다.
“과일 꼬치, 딱 한 입만 먹고 싶다고.”
“…….”
순간 나는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내 몫을 한 입 나눠 달라는 거야?’
아니, 나눠 주기 싫다는 건 절대 아닌데.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힐끔 라키어스의 눈치를 살폈다.
‘같은 꼬치를 나눠 먹는 건, 그러니까…… 조금 그렇지 않아?’
보통은 연인, 아니면 가족들이나 그렇게 나눠 먹잖아!
같은 성별의 친구들도 하나의 음식을 같이 먹지는 않는데, 라키어스랑 나는 엄연히 이성이라고!
‘나, 나만 라키어스를 의식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그때.
라키어스가 불쑥 고개를 숙이더니, 설탕을 입힌 딸기 한 알을 입으로 물어서 가져가 버렸다.
“…….”
나는 멍하니 라키어스를 바라보았다.
“으, 달아.”
라키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에 묻은 설탕 시럽을 핥았다.
붉은 혀가 예쁜 입술을 핥아내는 그 모습이, 묘하게 선정적으로 느껴진다면.
……내가 미친 걸까?
“왜 그렇게 봐?”
한편 내 시선을 느낀 라키어스가 예쁘게 눈매를 접어 내렸다.
“내가 너무 잘생겨서?”
“응.”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어, 라키어스가 잘생긴 건 사실인걸!
그 순간.
“…….”
라키어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