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저 시선이 마치, 향기로운 늪 같다.
섣불리 발을 디디면…….
꼼짝없이 빠져 죽고 말 거야.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홀린 듯 그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네가…….”
라키어스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의미로 내게 이 초콜릿을 줬으면 좋겠어.”
진흙이 진득하게 내 발목을 휘감았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조금 더 진해졌다.
“그럼?”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내가 준 초콜릿에 어떤 의미가 담겼으면 좋겠는데?”
알고 싶어.
네 아름다운 눈동자 깊은 곳에, 어떤 감정이 가라앉아 있는지.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너를 남자로 느끼고 있는 그만큼, 너도 날 여자로 느끼고 있는지.
너를 향한 이 강렬한 독점욕을.
너도 느끼고 있는지…….
“나를…… 친구가 아니라 남자로 느끼고 있어서.”
동시에 라키어스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단순히 우정이 아니라,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어서.”
“…….”
“그래서 이 초콜릿을 주는 거라면 좋겠어. 왜냐하면…….”
라키어스의 목소리 끝이 이지러졌다.
뭉그러진 그 목소리는 마치, 꿀을 함빡 머금은 꽃송이를 짓이긴 양 향기로웠다.
입술을 꾹 말아 물던 라키어스가 힘겹게 말을 맺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 순간.
내 전신을 늪이 집어삼켰다.
향기로운 진흙이 내 눈으로, 코로, 입으로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내 온몸을 가득 채워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래도 좋아.’
나는 기꺼이 그 압박감에 몸을 맡겼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온 세상의 색깔이 사라지고, 오로지 눈앞의 라키어스만이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어쩌지. 너무 기뻐.’
가슴이 부풀어 오르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나 행복해질 수 있다니…….
그런데 그때.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아주 끔찍한 무언가를 목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처절한 비명이었다.
‘뭐지?’
화들짝 놀란 나와 라키어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도,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방금 비명 들었어?”
“무슨 일이야?”
동시에 한 남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한쪽 방향을 삿대질했다.
“저, 저기! 저기 좀 봐!”
저 멀리,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마치 맹수를 마주한 초식동물처럼 무력해 보였다.
나와 라키어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이럴 수가.”
가장 먼저 눈에 띈 사람은 바로 모네였다.
사실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아한 아마빛 머리카락은 갖가지 보석으로 단장했고, 몸에 꼭 맞는 화사한 레이스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다만 그 드레스 위로 붉은 피가 점점이 흩어져 있고.
꽃송이와 부채 이상의 무거운 물건은 들지도 않던 가냘픈 손에는…….
피로 흠뻑 젖은 단검을 움켜쥐고 있을 뿐.
“…….”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모네의 발아래로, 피투성이가 된 루돌프가 쓰러져 있었다.
목을 찔렸는지, 목에서부터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비록 간헐적으로 움찔거리고는 있었으나, 채 감지 못한 눈에서는 이미 생기가 빠져나갔다.
그 누가 보아도 회생 불가능한 상태.
2황자가 죽었다.
그것도 황비의 친척으로, 황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레이디에게.
“이, 이게 무슨…….”
“정말로…… 정말로 죽은 거예요? 네?”
“치, 치안대. 치안대는 어디 있지요?!”
주변에 몰려든 군중 사이에서 공포에 질린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그 중 몇몇은 치안대를 부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모네는 그런 소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광기에 가득 찬 눈빛으로, 어둑한 하늘을 뚫어져라 올려다볼 뿐.
“……이제 시작이야.”
모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온통 소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그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귓속에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솨아-
바람이 밀려들었다.
불길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만발해 있던 장미들이 순식간에 시들어 쓰러졌다.
마치 생명력을 강제로 뽑히기라도 한 것처럼.
“자, 장미들은 왜 저래?!”
“시들고 있어……!”
사람들은 경악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장미들이 점차 메마르고, 쪼그라들며, 꽃잎 끝부터 검게 타들어 갔다.
그리하여 새카만 가루로 화하여 파스스 허공에 날렸다.
가루들이 빨려 들어가듯 하늘로 향하는 그 순간.
하늘이 일그러졌다.
“아, 가주님!”
동시에 모네가 큰 소리로 환희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드디어 가주님을 뵐 수 있어!”
가주님이라고?!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쿠르릉, 쿠릉-.
거대한 짐승이 몸을 뒤채기라도 하듯.
기이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빳빳하게 얼어붙은 채, 두려움에 떨며 허공을 응시했다.
일그러진 하늘 안쪽으로 빛과 어둠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그리고.
“…….”
“…….”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한 중년 남자가 하늘을 짓밟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말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카락.
우아한 정장.
하지만 가장 압도적인 건, 얼음을 조각해 넣은 양 새파란 눈동자였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그 눈동자.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난 저 남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바르톨로아, 가주.”
그랬다.
마계의 영원한 2인자.
내가 몇 번이고 삼켰던 붉은 알약의 주인.
평생을 두려워하고, 도망치고자 했던 그 남자가…….
다시 한번 내 앞에 나타났다.
“아.”
오만한 눈빛으로 깔아보듯 주변을 내려다보던 중년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러고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마치 상대를 조롱하는 듯한 과장된 동작.
그럼에도 고귀한 자를 대하는 극상의 예인 건 맞았다.
“마왕 폐하를 뵈옵니다.”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양, 사위가 고요해졌다.
군중들이 하나둘씩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응시하는 수십 쌍의 눈동자에 선명한 의구심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티티?”
라키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혼란에 가득 차, 거세게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라키.’
나는 심장을 송곳으로 푹 찔린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저 마족은.”
라키어스가 아득 이를 갈아붙였다.
“도대체 누구고?”
동시에 가주의 붉은 입술이 요사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폐하, 폐하를 모시기 위하여 약 천 명의 마족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쳤나이다.”
“…….”
나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인간과 마족들은 온갖 마법과 주술을 통해 수많은 한계를 뛰어넘지만.
여태껏 그 누구도 극복하지 못한 개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생명에 직접적으로 마력, 혹은 마기를 개입시키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니까.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은 그 누구도 닿지 못한 영역으로, 오로지 신만이 다룰 수 있다고 일컬어졌는데.
‘……그걸, 목숨을 희생시켜 대체했구나.’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떠들어 대기는.”
나는 날 선 시선으로 바르톨로아 가주를 노려보았다.
“저 공간이동 게이트 하나를 열기 위해, 마족 천 명을 희생시켰다는 말 아냐?”
“그런 셈이죠.”
바르톨로아 가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를 모시는 고귀한 일에 목숨을 바쳤으니, 오히려 죽은 자들이 감사해야 할 일이긴 합니다.”
“…….”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아무리 마족이라 할지라도, 인간보다 감정의 파고가 조금 낮을지라도.
‘최소한의 죄책감은 느껴야 하지 않아?’
가주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럼 가실까요?”
내가 거절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양.
그저 여상한 말투였다.
치받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나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내가 왜 너와 같이 가야 하지?”
“그야…….”
가주는 그대로, 발밑에 모여 서 있는 군중들을 까닥 눈짓하여 가리켰다.
“마왕께서는 버러지 같은 인간을 꽤나 아끼시지 않습니까.”
“…….”
“솔직히 초월자들도 그렇고, 폐하께서도 그렇고…… 저 무능한 버러지들을 왜 그리도 소중히 여기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만약 폐하께서 저와 함께 가 주시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 게이트를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해 볼 생각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간단한 말씀입니다. 이왕 한 번 게이트를 열었으니…….”
가주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폐하께 충성을 바치는 마족들을 조금 더 불러들일 수도 있잖습니까?”
“…….”
순간 나는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