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47)화 (148/163)

<155화>

세자르가 시큰둥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성벽에 얹은 그의 손에서 쉴 새 없이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뭐 하긴요, 성벽에 신성마법 부여하고 있죠.”

“신성 마법? 아.”

순간 키리오스가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세자르가 뚱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티티 양 데리러 가려면 여길 비워야 하잖아요? 그럼 신성 마법이라도 많이 걸어놔야 병사들이 버티기 쉽죠.”

“아, 그럼 나도 보호 마법 걸어 둬야겠다.”

키리오스도 나란히 성벽에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지크프리트가 머쓱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하면…….”

키리오스가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능한 소드마스터는 얌전히 뒤에 빠져 있기나 해.”

“맞아요. 그게 도와주는 거랍니다.”

“…….”

기가 막힌 얼굴로 제 악우들을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그래, 무능한 소드마스터는 이만 아버지께 연락이나 넣으러 가도록 하지.”

* * *

“후우.”

통신을 끊은 라키어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나마 제도가 완전히 혼란에 빠지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현 제도는 지도자를 잃은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 그리고 필로멜 후작가는 제도에 게이트가 열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쳤으니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황비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 그럴 리 없어. 내 아들이 죽었을 리 없어…….’

‘가셔야 합니다, 황비 마마!’

필로멜 후작의 손에 힘없이 끌려가면서도, 황비는 계속해서 반미치광이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나 아꼈던 아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으니, 아마도 온전한 정신으로 되돌아오기는 어려울 테지.

그리하여 현재 제도를 지키고 있는 황족은 라키어스가 유일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어제 일이 터지자마자 바로 스승님들께 연락을 드리고 싶었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느라 간밤을 꼬박 새웠던 것이다.

‘제도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을 강화해! 너는 황자잖아! 네게 주어진 의무를 행하란 말이다!!’

키리오스의 고함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라키어스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이를 악물었다.

‘누가…… 아버지와 딸 아니랄까 봐.’

타티아나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갔던 그 말.

‘너도, 너를 믿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줘.’

‘너는 황족이고, 이 나라의 국민들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니까.’

두 사람 모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라키어스는 최선을 다했다.

가용할 수 있는 치안대를 모조리 차출해 배치했고,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진정시켰다.

그래서 제도는 고위 귀족들이 대부분 빠져나갔음에도 그리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국난이 닥쳤음에도 유례없이 안정적이었다고 평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일단 세 용사들의 세력들이 라키어스에게 협조적이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비상상황에는 1황자 전하께 협력하라고, 마탑주께서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습니다.’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가 긴장된 얼굴로 협력 의사를 표했고,

‘대사제께서는 평소, 국난을 맞이했을 때에는 무조건 국가에 협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저희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대신전에서 도착한 사제도 진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는 오를레앙 타운하우스에 배치되어 있던 공작가의 기사들이 찾아왔다.

‘공작님께서 미리 명령을 내려 두셨습니다. 혹시라도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조건 1황자 전하의 명을 받들라고 말입니다.’

라키어스와도 안면이 있던 공작가의 부기사단장은, 절도 있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라키어스는 마탑과 대신전, 오를레앙 기사단, 황실 기사단까지 모조리 가용하여, 적재적소에 투입했다.

특히 마탑과 대신전, 오를레앙 기사단에는 마족들을 실제로 경험했던 인재들이 풍부했기에.

위기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오를레앙 노공작께서도 와 주신다고 하셨지.’

그러니, 객관적으로 라키어스가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라키어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를 계속해서 괴롭히는 질문이 하나 있어서였다.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에는…… 정말로 타티아나가 포함되지 않는 건가?’

라키어스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황자.

제국의 적장자.

그 모든 이름들 때문에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진심.

“…….”

라키어스는 어둑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상자가 놓여 있었다.

타티아나가 건네고 간 초콜릿이었다.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은.’

새카맣게 죽어 있던 붉은 눈동자 위로 천천히 빛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타티아나야.’

스승님들께서는, 타티아나는.

그더러 황자의 의무를 이행하라 했다.

그 의무는 바로, 제국민들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어제는 타티아나를 잃었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작자, 레이디 클로비스를 ‘제작’했다고 했지.’

생명을 실험하여 제멋대로 조작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마족 천 명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켜서 게이트를 열었다.

그런 작자가…… 타티아나를 이용하여 또 다른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대사제, 세자르가 빛의 신의 대리자이듯.

마왕은 마신의 대리자였다.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품은 마왕의 힘이, 그 미치광이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결국 답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타티아나를 구해내야만 해.’

자기합리화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라키어스는 타티아나를 되찾아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는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고 벌컥 문이 열렸다.

“누구…….”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라키어스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네였다.

“죽은 줄 알았는데.”

싸늘하게 중얼거린 라키어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검과 검집이 마찰하는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라키어스는 그대로 모네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래서, 왜 내 앞에 기어 들어왔지?”

희고 가느다란 목에 칼날이 닿았다.

목 위로 붉은 실선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핏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왜, 새로이 자살하는 방법을 찾고 있기라도 한 건가?”

“…….”

하지만 모네는 그저 무표정했다.

제 목에 칼날이 닿았음에도,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당신.”

모네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그 동작 하나에, 여린 살 안쪽으로 칼날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혹시 마왕을 찾으러 갈 생각이 있어?”

순간 라키어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만약 그럴 생각이 있다면.”

모네가 빙긋 눈매를 접어 내렸다.

평소 모네가 버릇처럼 짓곤 하던 화사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누군가에 대한 적의가 선명히 드러나는.

잘 갈린 칼날 같은 미소였다.

“내가 당신을 도울 생각이 있어.”

“네가 나를 돕는다고?”

라키어스가 이를 악물며 모네를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눈초리를 마주하고서도, 모네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그래.”

“어떻게?”

“내가 게이트를 열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설마!

라키어스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바르톨로아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어 줄 수 있어.”

“그게 진짜야?”

“내가 거짓말 하는 것 같아?”

모네가 담담하게 되물었다.

라키어스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차라리 모네가 라키어스를 농락하기 위해 찾아온 거였더라면,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눈앞의 모네는 정말로 라키어스를 도우려는 것 같았으므로.

“뭐, 그래 봤자 단 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는 소규모 게이트이긴 해. 난 가주님처럼 수많은 제물들을 끌어올 능력이 없으니까.”

모네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또한 곧바로 바르톨로아 영지로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 지금은 게이트를 열 제물 자체가 없으니…….”

보내줄 수 있다, 라는 말을 해 놓은 주제에.

모네는 계속해서 추후 라키어스가 맞이할 난관에 대해서만 늘어놓았다.

‘이런데도 갈 거야? 정말로?’

그렇게 묻기라도 하듯이.

“자칫 잘못했다가는 게이트 너머의 이공간에 영원히 갇혀 버릴 수도 있다는 소리야.”

모네의 차분한 시선 안에, 라키어스의 얼굴이 맺혔다.

라키어스는 그저 무표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

“바르톨로아 영지에 도착한다 한들…… 마왕을 찾아내는 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하고.”

“그래서?”

그런데 그때.

모네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내며, 라키어스가 되물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그딴 이유는 다 집어치우고.”

붉은 눈동자가 태양처럼 불타올랐다.

“티티가 간 곳으로 날 보내줄 수 있다는 거. 그건 확실해?”

“…….”

순간 모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수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어쩌면 영원히 이공간에 갇혀 떠도는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음에도.

‘1황자는…… 정말로 갈 생각이구나.’

아마도 그만큼 마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 터.

모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