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확답을 들었음에도, 라키어스는 여전히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날 돕는 이유는?”
“그건.”
여태껏 막힘없이 대답하던 모네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그건…….”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모네가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내 의지로 살아간 적 없었으니까.”
모네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망설임 없이 모네를 폐기하려 들었던 바르톨로아 가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에게 계속 휘둘리다가 삶을 마감하게 될 뿐이에요.’
모네를 일별하던 고요한 푸른 눈동자.
‘……지금처럼 말이에요.’
검은 눈동자에 회한이 어렸다.
‘어째서 몰랐을까.’
모네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당겨 물었다.
‘가주님께 있어서, 나는…….’
차가운 진실이 칼날처럼 심장에 쑤셔 박혔다.
‘정말로 도구였을 뿐인데.’
눈을 감으면, 차갑고 썰렁한 실험실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모네와 같은 마족들이 아주 많았다.
흰옷을 입은 연구원들이 들락거릴 때마다, 모네와 친구들은 주사를 맞거나 알약을 한 움큼씩 삼켜야만 했다.
가끔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개처럼 구르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은 결국 죽어 나갔다.
그래도.
‘유일한 성공작입니다, 가주님.’
처음 바르톨로아 가주 앞에 섰을 때.
반달처럼 휘어지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저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어.’
기이하리만치 강렬한 욕망이 피어올랐다.
‘잘했다.’
그런 칭찬을 듣고 싶었다.
따스한 눈으로 바라봐 주기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꼭 끌어안아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주님께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내게 애정을 보여 주셨더라면.’
모네의 입술 위로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나는 정말로 내 영혼까지 바칠 수 있었을 텐데…….’
잠시 후.
모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르톨로아 가주의 등에 칼을 꽂고 싶어졌어. 그게 내가 널 도우려는 이유야.”
“…….”
“처음으로 내 의지대로 선택한 거야.”
선명한 검은 눈동자가 라키어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물론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아니, 가겠어.”
“뭐?”
허를 찔린 모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순순히 나를 믿는 것 아냐?”
“설마하니 내가 널 믿을 리가.”
“그런데 왜 가겠다는 거지?”
“그야.”
모네에게서 칼을 거두어 낸 라키어스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가야만 하니까.”
무모하다는 것쯤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살다 보면.
눈앞이 까마득한 절벽임을 알아도 뛰어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티티.’
라키어스는 두 눈에 날을 세웠다.
타티아나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 * *
모네는 라키어스를 데리고, 자신이 머물던 별궁의 정원으로 향했다.
무리지어 피어난 탐스러운 노란 장미를 바라보며, 라키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장미는…….”
밀려드는 바람결에 장미가 살랑거렸다.
그 모습이 흡사 라키어스를 조롱하는 것 같다.
“너……!”
라키어스가 이를 갈면서 모네를 돌아보았다.
“이 장미, 도대체 정체가 뭐야?”
“게이트를 열 때 사용하는 매개체.”
“뭐라고?”
순간 라키어스는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설마, 일부러 제도 전역에 이 장미들을 퍼트린 거였어?!”
“당연한 말을 하네.”
모네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매개체조차 없이, 어떻게 이런 대규모 게이트를 열 수 있겠어?”
“……하.”
라키어스가 사나운 시선으로 모네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네는 다소 아쉬운 얼굴로 주변의 장미들을 돌아보았다.
“이런, 남은 게 이것밖에 없네. 하는 수 없지만…….”
모네가 분필을 집어 들었다.
마력석을 갈아서 만든, 마법진을 그릴 때 쓰는 특수한 분필이었다.
흰 손끝이 돌바닥 위로 익숙하게 마법진을 그려냈다.
그러던 중.
모네가 멈칫 손을 멈추었다.
“아까도 말했듯, 게이트가 안정적으로 열리지 않을 확률이 높아.”
그래서?
그렇게 묻기라도 하듯, 라키어스가 빤히 모네를 바라보았다.
“제물을 바쳐야 게이트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에게는 제물이 없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냥 해.”
라키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쏘아붙였다.
“자꾸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짜증나니까.”
“…….”
모네는 잠시 침묵했다.
그 후.
드물게 복잡한 표정이 되어 말을 잇는다.
“이공간의 미아가 되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로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해. 그래도 갈 거야?”
“아,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만.”
라키어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스승님이 누구인 줄이나 알아? 대마법사 키리오스야.”
“……그건.”
“그분의 유일한 수제자인 내가, 설마하니 그딴 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그걸 알면서도…… 가겠다고?”
“됐고, 빨리 게이트나 열어.”
라키어스가 턱을 까닥이며 게이트를 가리켰다.
“똑같은 대답 두 번 하기 귀찮으니까.”
“…….”
모네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손을 놀렸다.
사각, 사각사각.
분필이 돌과 스치는 소리만이 한참을 울린다.
그리고.
탁.
모네가 분필을 내려놓았다.
정교하게 얽힌 거대한 마법진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웅-.
마법진이 어두운 빛을 머금고 희미하게 진동했다.
그와 함께.
솨아아-.
노란 장미들이 검은 가루로 화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마법진의 빛이 더더욱 강해지더니, 검보랏빛 어둠을 머금고 일렁이기 시작했다.
흡사 어제 밤하늘에 펼쳐졌던 균열을 축소해 놓은 듯한 모양새인데.
“자.”
모네가 무덤덤한 얼굴로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
“열렸어.”
본능이 라키어스에게 속삭였다.
‘이 안에 발을 들이면 정말로 영원히 길을 잃을지도 몰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공간에서 무한히 떠돌 수도 있어.’
‘차라리 죽음이 더 편안할 텐데. 안 그래?’
그럼에도 라키어스는 망설임 없이 마법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강력한 마기가 발끝에서부터 기어올랐다.
벌레가 스멀거리는 것처럼 불쾌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티티.’
마법진에 완전히 삼켜지기 전, 라키어스는 타티아나를 떠올렸다.
베어 물면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
가을 하늘을 닮은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
한 송이 봄꽃처럼 사랑스러운…….
‘조금만 기다려.’
붉은 눈동자에 결기가 어렸다.
내가 널, 데리러 갈 테니까.
그와 동시에.
번쩍!
라키어스가 마법진 안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를 끝까지 확인한 모네가, 스르륵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마법진은…… 그럭저럭 잘 구동된 것 같네.”
만족스럽게 중얼거리던 모네가 거세게 기침을 토했다.
“콜록!”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소용없었다.
새빨간 선혈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모네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조그맣게 몸을 웅크렸다.
어깨가 벌벌 떨리고, 시야가 새빨갛게 물든다.
수백 개의 칼날이 속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게 도구의 말로인가.’
모네는 철저하게 바르톨로아 가주를 위한 도구로 제작되었다.
그 말은 즉.
바르톨로아에게 반하는 행동을 했을 시, 그를 제지하는 주술이 몸속에 심어져 있다는 소리다.
그 주술의 종류는 당연히.
‘완벽한 죽음.’
쓸모없는 도구는 폐기처분하는 게 당연하니까.
그 말은 즉.
지금 모네는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아, 속 시원해.’
마음이 어찌나 홀가분한지.
언젠가 그녀가 목숨을 잃게 된다면, 마땅히 가주님을 떠올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흐릿한 시야 너머로 떠오르는 건 한 레이디의 얼굴였다.
‘타티아나.’
그 애가 너무나도 싫었다.
모네는 평생을 발버둥 쳐도 얻을 수 없을 가주님의 관심을, 그 애는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나는 그 애를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 애의 다정한 성품.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위할 수 있는 마음.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상대의 행복을 빌 수 있는 따스함.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에게조차 진심을 다해 조언을 건넬 수 있는 그 너그러움.
실은 정말로 내가 가지고 싶었던 건…….
‘그 다정한 성품일지도.’
그 순간.
모네의 눈동자에 바짝 날이 섰다.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라면.’
모네는 바들바들 떠는 손끝을 마법진 위에 얹었다.
우우웅-.
다시 한번 마법진이 진동했다.
자신의 생명력이 마법진으로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공간이동 게이트를 운용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제물이지만, 그래도…….
‘아예 제물이 단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 생각을 끝으로.
모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아.”
마지막 숨이 흘러나왔다.
고요히 눈을 감은 그 얼굴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