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13. 타티아나
나는 멍하니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시 여기는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새카만 침엽수림이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이곳은 바로, 바르톨로아 영지였다.
마왕성으로 옮겨지기 전.
잠시 이곳에 머무르며 마기를 추출당한 적이 있었다.
바르톨로아 본성만큼 실험실이 완벽하게 구비된 곳이 없어서였는데.
‘……아팠었지.’
붉은 알약을 삼킨 후, 면도날로 속을 난도질당하는 것 같던 육체적 통증과.
바르톨로아 가주가 강제로 보여 줬던, ‘나 때문에 희생당한’ 실험체들을 마주할 때의 심적인 고통 중.
어느 쪽이 더 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던 고통보다도 더 괴로웠던 건…….
‘내가, 저 실험체들이 왜 실험을 당하는 건지…… 명확한 이유조차 알려 주지 않았지.’
그 어떤 질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저들은 너 때문에 희생당하는 거다’라고 몇 번이고 못을 박을 뿐.
왜 희생당해야 하는지는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가주와 연구원들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개처럼 바닥을 기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일뿐이었다.
“…….”
나는 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현재 내가 머무는 방은 눈이 아릴 정도로 화려했다.
금사로 무늬를 넣은 벽지, 하늘거리는 캐노피, 방 곳곳을 장식한 그림과 화병들, 그리고 고급스러운 가구들까지.
한때 내가 세 용사들의 귀한 딸로서, 오를레앙 타운하우스에서 살고 있을 때에도.
이렇게 화려한 방에 머무르지는 않았는데…….
‘돌아가고 싶어.’
나는 송곳처럼 불쑥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을 애써 억눌렀다.
아빠들이,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라키어스는 잘 있을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라키어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떠나는 나를 어떻게든 붙들려 했던 손끝과.
절망에 차 일그러지던 그 얼굴이.
‘……그만하자.’
어차피 아빠들과 라키어스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면…… 참 우습네.’
마계에 있을 적에는 내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었는데.
이렇게 끌려온 후에야 겉으로나마 마왕 대접을 받게 되다니.
‘아마도, 내가 도망치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서 겉으로나마 이렇게 정중하게 대하는 거겠지.’
똑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나는 차게 조소했다.
어차피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들어올 거면서, 저 노크에 도대체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고.
방으로 들어온 하녀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바르톨로아 가주께서 폐하를 알현하기를 청하십니다.”
“알현?”
나는 비딱하게 대꾸했다.
“알현이라. 내게 그 잘난 알현을 거절할 권리가 있기는 한가?”
“…….”
하녀는 더더욱 고개를 조아릴 뿐, 내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들으란 듯이 빈정거렸다.
“없나 보군. 그걸 어떻게 알현이라고 부를 수가 있지?”
“…….”
“강제로 찾아오는 거라면 모를까.”
“…….”
하녀는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화를 참지 못하고 쏘아붙인 것도 잠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저 하녀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어차피 원흉은 바르톨로아 가주인 것을.
나는 당장이라도 고함을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르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언제 보자고 하던가?”
“정확히는 만찬을 청하셨습니다.”
“……만찬?”
“예. 저희 바르톨로아 본성에 오신 이래로, 마왕께서 제대로 식사를 챙기지 않는 것이 저어되신다고요.”
하.
난 기가 막히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와 바르톨로아 가주가 나란히 얼굴을 마주하며 식사를 한다고?
물만 마셔도 체할 것 같은데.
하지만 하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래서…….”
하녀가 흘끗 시선을 뒤로 돌렸다.
동시에 다른 하녀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고급스러운 드레스와 갖가지 장신구들이 담긴 상자들이 들려 있었다.
물건들이 어찌나 화려한지, 저것들을 몸에 걸치자마자 당장 연회장에 나서도 될 것 같다.
“……저건 도대체 뭐야?”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해졌다.
하녀가 차분하게 답했다.
“바르톨로아 가주께서는 예의를 중시하시니까요.”
“…….”
“상황에 어울리도록 적절한 의복을 갖추는 것도, 예의범절의 일종이잖아요?”
하녀가 부드럽게 나를 채근했다.
“그러니 치장을 하셔야 합니다.”
비록 목소리는 상냥했으나, 기이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지금도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하하.”
동시에, 내 입술에서 메마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가주의 입맛에 맞도록 잘 차려입은 후.”
한참을 키득거리던 내가, 무심한 시선으로 값진 물건이 가득 찬 상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가주가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최대한 빠르게 만찬장으로 내려가서.”
“폐하, 그건…….”
“가주와 함께 식사를 하라, 이거지?”
아마 저들이 나를 고의로 무시하려 함은 아닐 것이다.
그저 바르톨로아 가주가 너무나도 두려운 거겠지.
하지만, 그 자체가.
‘결국 나를 무시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적어도 저들이 나와 바르톨로아 가주를 동등하게 생각한다면, 내게 가주의 입장을 배려하라며 일방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을 터.
오로지 가주만을 중시하는 그 태도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도무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가셔야 합니다, 폐하.”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하녀가 재차 나를 독촉했다.
“가주님께서는 기다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시지 않아요. 오래 지체하셨다가는 분명 진노하실 겁니다.”
“하, 그래.”
나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 잘난 가주께서 펄펄 날뛰신다는데, 당연히 마왕인 내가 찾아뵈어야지. 안 그래?”
* * *
몸치장을 마친 후.
나는 하녀의 에스코트를 받아서 1층으로 내려갔다.
거대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호화로운 만찬장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 안으로 들어서던 내가 멈칫 발을 멈추었다.
‘이 향기는?’
은은한 향기가 만찬장에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향기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으니.
무료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바르톨로아 가주가, 마침 내 쪽을 돌아본 것이다.
가주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 폐하.”
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예를 갖추었다.
“폐하, 이렇게 폐하와 만찬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
나는 적의에 찬 눈으로 가주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주는 과장된 동작으로 의자를 빼 줄 따름이었다.
“이쪽으로 와 앉으시지요.”
“…….”
“어서요.”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록 하녀들이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 봐, 일단 내려오기는 했지만.
가주의 말에 순순히 따라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자.
“너.”
가주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 곁에 선 하녀를 노려보았다.
하녀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도대체 폐하의 시중을 어떻게 든 거지?”
“가, 가주님? 저는…….”
하녀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가주를 올려다보았다.
바짝 얼어붙어 그 어떤 움직임조차 보이지 못하는 그 모습이, 흡사 맹수 앞에 선 쥐새끼 같았다.
털썩!
하녀는 그대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나는 순간 망연해졌다.
“폐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하나…… 그, 그래도 살려만 주십시오!”
하녀는 오들오들 떨며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가주는 짜증스레 고개를 내저을 따름이었다.
“아니, 아니지.”
가주가 손을 뻗었다.
“무엇 때문에 폐하께서 이리도 기분이 상하셨느냐, 묻고 있지 않느냐.”
“컥!”
하녀가 거센 숨을 토해내며 목을 붙들었다.
두 눈에 바짝 핏발이 섰다.
“뭐 하는 짓이야?!”
기절할 것처럼 놀란 내가 언성을 높였다.
가주가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별것 아닙니다. 그냥 저 시종의 호흡 기능을 멈춰 버렸을 뿐이지요.”
“허억, 허억, 헉……!”
하녀는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손톱을 세워 목을 긁어 내는 통에, 목에 핏방울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하지만 가주는 무감정한 시선으로 바닥을 기는 하녀를 내려다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멈춰!”
보다 못한 내가 가주의 팔에 매달렸다.
“당장 멈추라고!”
“하지만…… 폐하께서 기분이 상하셨잖습니까?”
가주는 정말로 의아하다는 것처럼 나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