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뭐,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죠. 전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가히 제 삶 전체를 바친 거대한 계획이었죠.”
“…….”
“제 계산으로는, 폐하의 마기를 흡수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시기는 폐하께서 성인이 된 직후였습니다.”
가주가 짧게 혀를 찼다.
“그전까지는 몸도 너무 약하셨을 뿐더러, 더러운 인간 혈통 때문에 마기 또한 너무 혼탁했거든요. 마기가 조금 더 정결해지도록 기다릴 필요가 있었지요.”
“…….”
“그래서 폐하를 마왕성에 숨겨 두고, 감시자를 다섯이나 붙여서 애지중지 돌보고 있었는데…….”
애지중지?
나는 두려운 와중에도 어이가 없었다.
가주를 빤히 바라보자, 가주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고는 들으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쉰다.
“글쎄, 변수가 생겼지 뭡니까?”
변수.
나는 어깨를 굳혔다.
바르톨로아 가주가 말하는 변수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건 바로…….
“폐하께서 깜찍하게도, 세 초월자를 아비 삼아서 인간계로 도망가셨더군요.”
그래, 내 돌발행동이었다.
“처음에는 당장에 폐하를 모셔 올까 고민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습니다.”
“…….”
“세 초월자가 직접 폐하를 보호하고 있잖습니까? 그 이상의 안전망도 없지요. 무엇보다도 그 초월자들은 의외로 무른 성격이어서, 폐하를 저 이상으로 잘 보살펴 줄 것 같았고요.”
“…….”
“그래서 저는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바르톨로아 가주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너무 지루했습니다. 하루에도 백 번씩 차라리 인간계를 짓밟아 버리고 싶었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주의 입술에 나른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끈질기게 기다린 끝에, 마침내 폐하께서 제 앞에 앉아 계시는 날이 오지 않았습니까?”
“……가주.”
“아무래도 기다리는 자에게 영광이 온다는 말은 사실인가 봅니다.”
가주가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아 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식탁에 놓인 나이프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럼 여기서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
“호오.”
순간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나는 독기 서린 눈으로 가주를 노려보았다.
“제물이 사라지면, 그 마왕이 되는 의식인지 뭔지도 치를 수 없을 거 아냐?”
내 협박에, 가주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 마왕께서는 그러실 수 없을 겁니다.”
“……자신만만하네.”
나는 칼날을 고쳐 잡으며 목을 겨누었다.
그러자 가주가 느긋하게 내게 되물었다.
“폐하께서는 혹여, 역대 마왕들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아십니까?”
웬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지?
나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우리 폐하께서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마왕은 마족이라는 종족의 대표자입니다.”
“빙빙 둘러서 말하지 말고 요점만 말해.”
내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말은 즉.”
바르톨로아가 두 눈을 반달처럼 휘며 나를 응시했다.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리는 미물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관대하고도 한심하게.
“마왕에게 생존의 의지가 없으면, 마족이라는 종족은 존속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
“그리고 자살은 ‘생존의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행동이지요.”
탁.
동시에 바르톨로아 가주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파고들었다.
“역대 마왕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암살당해서 죽은 경우가 가장 많다.
그 외로는 사고로 죽거나,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아주 드물게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한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중, 자살은…….
내 표정을 관찰하던 가주가, 다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죠? 단 한 명도 자결한 자가 없지요?”
“…….”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런 나를 조롱하듯, 가주가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보통 마왕으로 각성하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던데, 우리 폐하께서는 반쪽짜리 마왕이어서 아직 모르셨나 봅니다.”
망할.
나는 입 안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다.
비록 가주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정말로 내가 자결함으로써, 마족이라는 종족 전체의 생존에 영향을 준다면…….
‘자살은 할 수 없어.’
나이프를 쥔 손아귀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가주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께서는 쓸데없이 상냥하신 분이지요.”
“닥쳐.”
“우리 마족들은 여태까지 폐하를 학대하기만 했는데, 그런 종족조차 끝내 포기하시지 못해요. 그래서…….”
가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섬뜩한 미소였다.
“폐하께서는 끝내 저를 극복하실 수 없는 겁니다.”
“…….”
나는 가주를 한참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날 제물로 사용해서 네가 마왕으로 각성하는 건? 그건 마족이 존속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이 없어?”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그건 전대 마왕을 살해한 쪽이 아닐까 싶지만…….”
턱을 괴며 느긋하게 대꾸하기를 잠시.
가주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만약 훼손되어 마족이 존속하지 못한다면 또 어떻습니까? 제가 없는 마족이란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는걸요.”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식사가 다 끝난 것 같으니…….”
가주가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소리 없이 내 앞으로 다가온 시종이, 내 앞에 물이 가득 든 잔과 새하얀 그릇을 내려놓았다.
눈처럼 새하얀 그릇 안에는 새빨간 알약이 들어 있었다.
“이 약은…….”
어렸을 적, 수십 수백 번 삼켰던 약이었다.
체내의 마기를 폭주시키는 약.
순간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폐하의 마기를 시료로써 좀 추출해 가야 합니다. 마법진과 폐하의 마기 파장을 맞추는 작업이 남아 있거든요.”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바르톨로아 가주와 눈이 마주쳤다.
가주가 빙긋 웃어 보였다.
“폐하께서는 상냥하신 분이시니, 당연히 제게 협조해 주시겠지요?”
“…….”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머나먼 과거, 바르톨로아 본성에 처음으로 갇혔던 그날로 되돌아간 느낌.
“싫어.”
나는 이를 악물며 쏘아붙였다.
가주가 아쉽다는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는 참 착한 아이이신데, 단 하나 나쁜 버릇이 있으시더군요. 매번 결정적일 때마다 제 속을 썩이십니다.”
“……그게 무슨.”
“다만 이번에는…… 못된 아이를 다루는 방법도 미리 마련해 놓은지라.”
가주의 푸른 눈동자가 흘끗 나를 향했다.
‘잠깐.’
순간 나는 멈칫했다.
아까 전, 만찬장에 들어왔던 당시 느꼈던 은은한 향기.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도 않던 그 향기가 돌연 강렬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동시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 이게 무슨 짓……!”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도무지 몸이 내 마음대로 가누어지지가 않았다.
젖은 빨래처럼 팔다리가 축축 늘어진다.
나는 헛손질을 하며 간신히 식탁 모서리를 붙들었다.
와장창!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식기며 그릇들이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졌다.
“너…….”
흐린 시야 안쪽으로, 바르톨로아 가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쪽으로 다가온 가주가 알약을 집어 들었다.
“싫어, 싫……!”
얼음처럼 차가운 손길이 내 입을 강제로 벌렸다.
나는 어떻게든 그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전혀 소용 없었다.
꿀꺽.
알약이 넘어갔다.
‘아.’
나는 나지막이 숨을 헐떡였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작열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하지만 익숙하다 하여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무서워.’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기에 더더욱 두려웠다.
나를 품 안에 소중하게 안아 들면서, 가주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제가 아까 대답해 드리지 않았죠? 제가 마왕이 된다면 인간들을 어떻게 처분할 건지 말입니다.”
가주 특유의 나른한 미소가 아득하게 멀어 보였다.
“당연히 모두 멸절시켜야지요.”
뭐라고?!
나는 혼미한 와중에도 손을 허우적거리며 가주를 붙들려 했다.
내 팔다리를 능숙하게 억누르며, 가주가 어르듯 말을 이었다.
“폐하, 기뻐해 주시지요.”
“무…… 무슨.”
“폐하께서는 지금, 우리 바르톨로아가 영원한 1인자로 거듭나기 위한 발판이 되어 주시는 겁니다. 세상에 다시없을 영광된 일 아니겠습니까.”
뱀처럼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폐하의 희생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깜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