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52)화 (153/163)

<160화>

* * *

우웅-

검보랏빛 어둠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일렁였다.

그리고.

탁.

그 너머에서 빠져나온 금발의 청년 하나가, 가볍게 복도에 발을 내디뎠다.

“미친.”

청년, 라키어스가 치를 떨었다.

“레이디 클로비스는 이걸 게이트랍시고 열었단 말이야?”

이공간.

하늘도 땅도, 빛과 어둠도 구분되지 않는 기이한 공간.

그저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돌아 버릴 것 같은 그 공간 속에서, 라키어스가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타티아나를 데리러 가야만 한다는 목적 때문이었다.

체감상 한 달은 헤맨 것 같다.

다만 이공간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라키어스가 이공간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흘려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럭저럭 길을 잃지는 않은 것 같네.”

라키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고색창연한 거대한 고성이었다.

성벽을 쌓아 올린 벽돌 하나하나에 오랜 시간이 스며들어 있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어찌나 호화스러운지, 인간계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인 제국의 황성과도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마계의 영원한 2인자, 바르톨로아 일족이 기거하는 바르톨로아 본성.

그 위용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방금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어?”

“저쪽인 것 같은데…….”

제기랄.

라키어스는 잽싸게 검부터 뽑았다.

하기야, 무려 공간이동 게이트를 열었으니까.

마족들이 그 마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하기는 하다.

동시에 주변을 순찰하던 마족들이 라키어스를 발견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인간이다!”

“인간이 침입했다!”

마족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마주했음에도 라키어스는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납게 눈을 빛낼 뿐.

검을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서걱!

그의 검이 커다란 은빛 궤적을 그리고.

붉은 핏물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등지고.

라키어스는 거침없이 마족들을 베어 넘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 * *

바르톨로아 본성 지하에 위치한 거대한 실험실.

넓디넓은 바닥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몇 개나 정교하게 겹쳐져 있었다.

그 마법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르톨로아 가주가, 곁에 서 있던 수하를 흘끗 돌아보았다.

“마기의 흐름은? 꼬이거나 엉킨 부분은 없나?”

“예, 완벽합니다.”

수하가 긴장된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

나른하게 고개를 끄덕인 가주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의식 과정은 확인해 보았나? 뭔가 문제는 없겠지?”

“몇 번이나 점검해 보았습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없을 듯’이라고?”

푸른 눈동자가 가느스름해졌다.

“나는 가정이 아니라 확답을 원하는데.”

“어, 없습니다!”

수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외쳤다.

그제야 가주가 굳힌 표정을 풀며 빙긋 눈웃음을 지었다.

“가서 일 보도록.”

“예, 가주님.”

수하는 절도 있게 예를 갖춘 후 떠나갔다.

가주는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마족들은, 모두 바르톨로아 일족의 핵심 인재들이었다.

가주가 직접 고르고 골라 제 휘하에 넣어 둔 연구원들.

‘그건 그렇고.’

가주는 실험실 가운데로 흘끗 시선을 고정했다.

정교하게 얽힌 마법진 가운데에 타티아나가 누워 있었다.

고요히 닫힌 눈, 가볍게 다문 입술.

겉보기로는 그저 곤히 잠든 것 같았다.

‘의외로 폐하의 마기와 내 마기가 파장이 잘 맞던데…….’

의식을 치르기 전, 마지막으로 마법진을 안정화시키던 작업을 진행하던 때.

바르톨로아 가주는 타티아나의 마기에서 특별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타티아나와 가주 자신의 마기가 상당 부분 비슷한 파장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혈연이기라도 한 것처럼.

‘설마 마왕께서 바르톨로아의 혈통이기라도 하셨다는 건가?’

가주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마계의 영원한 2인자, 바르톨로아 일족.

고귀한 푸른 피를 가진 그들은, 자신들의 혈통이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비록 ‘마족’이라는 같은 종족하에 묶일지언정, 바르톨로아는 특별했으니까.

혹시라도 푸른 피와 더러운 피가 뒤섞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바르톨로아의 피에, 하다못해 같은 마족의 피도 아니고…….”

가주의 목소리에 옅은 불쾌감이 뒤섞였다.

“미천한 인간의 피가 섞여 있었을 줄이야.”

다만 이상한 건, 어디서부터 바르톨로아에서 인간의 피가 섞이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바르톨로아의 혈통에 대한 집착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직계뿐 아니라 방계의 혼사까지 철저하게 신경 쓸 정도였으니까.

그렇게까지 물샐 틈 없이 관리하는데, 핏줄이 외부로 흘러나갈 리가…….

‘설마.’

순간 뇌리에 스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가주의 얼굴이 얼음으로 빚은 양 싸늘해졌다.

‘그 머저리 같은 녀석이?’

카이젠.

바르톨로아 가주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차기 가주로서 촉망받았고, 가주 자신도 내심 아들이 저를 쏙 빼닮았다 여겼으나.

결국 카이젠은 바르톨로아 최고의 머저리로 남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천한 인간을 사랑하여 가주를 배신했고.

최후에는 제 아비의 등에 칼을 꽂아 버렸으니 말이다.

‘카, 카이젠 님은…….’

‘죽여라.’

제 유일한 핏줄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가주는 그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가주는 제 아들을 죽이기 위해 가주의 직속부대 하나를 파견했고.

부대는 지휘관 단 하나만을 남기고 모조리 전멸했다.

팔 한 짝이 날아간 지휘관은, 남은 팔로 직접 카이젠의 수급을 베어 왔고.

‘다들 잘 봐라.’

뒤늦게 소집된 바르톨로아 일족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가주를 바라보는 가운데.

콰직!

가주는 한때 제 아들이었던 자의 수급을 직접 짓밟아 부쉈다.

“……거의 잊고 있었는데.”

쯧.

가주는 짧게 혀를 찼다.

없는 셈 치고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가.

이제는 카이젠이 어떻게 생겼었는지조차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바르톨로아 가주는 제 아들의 비극적인 사랑을 알고 있었음에도, 단 한 번도 타티아나의 존재를 의심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라.’

가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혼혈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었는데. 공교롭기도 하지.’

마법진이 흩뿌리는 빛 속에 잠긴 타티아나는, 여전히 고요하게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가주는 만찬장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타티아나를 다시 떠올렸다.

두 눈에 날을 세우며, 스스로의 목에 나이프를 겨누던 그 모습과.

‘네가 죽으면 마족들도 죽는다’라는 사실 하나에, 결국 나이프를 내려놓던 그 무력함까지.

“그러니까 우리 폐하께서, 내 핏줄…… 그러니까 손녀였다는 말이군.”

그것도 더러운 인간의 피가 반이나 섞인.

가주의 입술이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 참, 재밌어! 하하하!!”

가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

“…….”

주변을 바쁘게 오가던 바르톨로아 일족이,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가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주는 그들의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하, 하……!”

허리까지 꺾어 가며 한참을 낄낄거리던 가주가,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하지만 우리 완벽한 일족에게, 저딴 반쪽짜리 마왕은 역시 부족하지.”

가주의 만면에 광기 어린 미소가 천천히 번져 나갔다.

“영원한 2인자가 아닌…… 영원한 1인자로서.”

가주가 황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실로 바르톨로아가 온 세상을 지배할 날이 머지않았다.”

동시에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에 감싸인 타티아나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가냘팠다.

* * *

‘아파.’

나는 나지막이 숨을 헐떡였다.

마기 폭주를 완전히 극복한 이래로, 이런 통증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온몸의 신경이 올올이 타오르는 것만 같은 끔찍한 작열감.

‘이럴 거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내가 눈조차 뜨지 못하고 신음하던 바로 그때.

-안 되지, 너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내 대리자인걸.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비록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아주 익숙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온몸을 찢어발기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내가 왜 너를 선택했는지 알려 주마.

그 순간.

시야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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