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 * *
마법진 앞에 도열한 바르톨로아 일족이, 가주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주님.”
“그래.”
고개를 끄덕인 가주가 느긋한 걸음으로 마법진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진 전체에서 일렁거리는 마기는 아무런 반발 없이 가주를 받아들였다.
가주는 마법진 중앙으로 향했다.
고요히 잠들어 있는 타티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폐하.”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조차 기껍다는 양, 가주의 미소는 더더욱 짙어졌다.
“폐하의 희생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니…….”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타티아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가주가,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들어라!”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바르톨로아 일족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한껏 몸을 낮추었다.
“이제 우리 일족은, 영원한 2인자에서 벗어나!!”
광기에 가득 찬 새파란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바닥에 엎드린 일족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지고한 1인자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몸속에 마왕의 마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뻗어 나가며 온몸을 충만하게 채운다.
“아아…….”
가주의 입술 사이로 황홀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마왕의 마기만 모조리 흡수하면 된다.
“드디어 우리 일족에서 마왕이 탄생하는 거야……!”
그런데 바로 그때.
쾅!!
천장이 성대하게 부서져 내렸다.
깨진 천장 파편과 흙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거대하게 균열이 간 천장 위편으로 다급한 고함이 새어 들어왔다.
“이, 인간이 침입했다!”
“잡아!!”
“지하로 가지 못하게 해!!”
삽시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실험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르톨로아 일족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저 인간은 도대체 뭐야?!”
“이러면 의식에 방해가……!”
“경비병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
그 가운데, 금실처럼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청년 하나가 균열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라키어스였다.
“이 망할, 레이디 클로비스!”
이왕 보내 줄 거면 티티 앞으로 바로 보내 주면 좀 좋아?!
이를 갈아붙이던 라키어스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저건!’
드넓은 바닥 위로, 거대한 마법진들이 뱀처럼 서로 뒤얽혀 있었다.
그 위로 검보랏빛 마기가 일렁거리는 모습이 사뭇 기괴하다.
하지만 붉은 눈동자는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오로지.
“티티!!”
마법진 중앙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타티아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안에 들어가서는 안 돼.’
본능이 어떻게든 제 주인을 말리려 들었다.
‘마법진에 발을 들이는 순간, 분명히 너는 죽고 말 거야.’
하지만 라키어스는 가차 없이 스스로의 본능을 짓밟았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웠더라면, 목숨을 걸고 바르톨로아 본성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제 목숨을 건사하겠노라며 도망친다면.
아마 나는 평생을 후회하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증오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티티를 데리러 가겠어.’
붉은 눈동자에 결기가 어렸다.
라키어스는 그대로 마법진 안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바르톨로아 일족이 기겁을 했다.
“저런, 미친!”
“마법진에 인간이 침입했어!”
“당장 끌어내야 해!”
“저러다가 마법진이 어그러지기라도 하면……!”
수십 수백 번의 계산을 통해 섬세하게 조율한 마법진이었다.
라키어스처럼 초월자 직전의 경지에 닿은 존재가 들어선다면, 내부에 흐르는 마기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다들 입으로만 떠들어 댈 뿐.
그 누구도 마법진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려웠으니까.
저 거대한 마기의 격랑에 휩쓸리는 순간.
제 목숨마저 위태로워지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큭!”
라키어스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온몸을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기는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움직여야만 했다.
바로 저 앞에…….
타티아나가 있었으니까.
‘티티.’
라키어스는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그의 발이 바닥을 밟았다.
첫 번째 걸음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두 번째 걸음을 옮길 적.
라키어스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마기로 인해 진탕된 속에서 피가 역류하고 있는 것이리라.
“퉤!”
입 안에 고인 피를 거칠게 뱉어 낸 라키어스가, 옷소매로 제 입가를 대충 닦아 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고 있어.’
그리고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여섯 걸음…….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법진 밖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도.
천장에 뚫린 균열 사이로, 라키어스에게 쏟아지는 온갖 협박과 저주도.
모조리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저…….
‘티티에게 닿는 것.’
라키어스는 흡사 고행을 하는 수도승처럼 마법진 안을 묵묵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너…….”
가주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라키어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나운 시선과는 달리, 가주는 저 벌레 같은 인간에게 손가락 하나조차 까닥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가주는 온몸에 타티아나의 마기를 한껏 머금고 있었으니까.
자칫 잘못했다가는 마기가 폭주할 우려가 있었다.
의식이 끝날 때까지는 마법진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라키어스는.
“…….”
그저 무표정한 눈으로 가주를 일별할 따름이었다.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이보다 무심한 시선으로 볼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꺼져.”
라키어스는 가주의 어깨를 밀쳐 버렸다.
현재 라키어스는 마법진에서 넘쳐흐르는 마기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한계였기에, 가주를 밀치는 힘은 그저 툭 건드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가주는 그 손짓조차 버티지 못했다.
“저 미천한 것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가주가 패배감 가득한 얼굴로 라키어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키어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고대하던 목적지에 도달했으니까.
“티티.”
잠든 듯 조용히 눈꺼풀을 닫고 있는 타티아나.
그녀 앞에 멈춰 선 라키어스의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나 왔어, 티티.”
라키어스는 무너지듯 타티아나 곁에 주저앉았다.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창백한 뺨과 이마를 어루만진다.
온통 흐트러진 분홍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사뭇 다정했다.
피로 얼룩진 입술 사이로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절대로…….”
타티아나의 손을 마주 잡은 라키어스는, 그녀의 가냘픈 손끝에 제 이마를 기댔다.
신에게 기도를 바치듯 경건한 동작이었다.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와 동시에.
“컥!”
타티아나의 마기를 받아들이던 가주가 거세게 피를 토해 냈다.
‘라키어스’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침입하여, 마법진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타티아나의 입술 위로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아주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엄마, 아빠.’
타티아나는 지금,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녀를 태어나게 해 준 사람들의 꿈이었다.
* * *
카이젠 바르톨로아.
바르톨로아 일족의 가장 날카로운 검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카이젠의 이름이 가장 먼저 거론될 것이다.
현 바르톨로아 가주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자, 가문의 후계자.
일족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소가주.
하지만 그 카이젠은 지금,
“허억, 허억, 헉…….”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었다.
‘방심했어.’
잿빛 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내리는 눈.
설원은 온통 피와 비명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필이면 부대원 중에…… 숙부의 수하들이 끼어 있을 줄이야.’
카이젠은 숨을 헐떡이며 와락 검을 움켜쥐었다.
바르톨로아 일족에게, 최근 마계의 변경에 쥐새끼 같은 인간 병사들이 숨어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병사들은 눈에 띄는 마족들을 모조리 학살하며 돌아다닌다고 했고.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는 카이젠에게 명령을 내렸다.
‘개미 새끼 하나도 남겨놓지 마라.’
‘예.’
그리하여 토벌대가 꾸려졌다.
토벌대는 사나운 기세로 마계의 변경으로 진격했으나…….
‘인간 군대를 토벌하기도 전에, 숙부에게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이야.’
카이젠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쾅!!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던 병사 하나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낼 틈조차 없이, 카이젠은 다른 병사가 제 부관에게로 돌진하는 것을 발견했다.
“죽어어!!”
부관을 겨눈 검 끝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카이젠은 당장에 병사의 등으로 검을 찔러 들어갔다.
푹!
“컥!!”
날카로운 단말마가 울렸다.
병사가 그 자리에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카, 카이젠 님!”
부관이 감사와 공포가 뒤섞인 눈동자로 카이젠을 바라보았다.
검을 회수한 카이젠이 재차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