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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54)화 (155/163)

<162화>

“다들 버텨라! 대열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전황이 너무 안 좋았다.

어제까지 웃으며 함께 떠들었던 동료가, 오늘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아 넣는 상황이지 않은가.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카이젠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병사들이었다.

이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젠장!!”

카이젠은 까득 이를 갈아붙이며, 엉망으로 뒤엉킨 병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처럼 날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전멸할지도 몰라.’

등골에 엄습하는 두려움을 어떻게든 떨쳐 내기 위하여.

카이젠은 더더욱 거세게 칼을 휘둘렀다.

* * *

‘끝났군.’

수많은 시체 사이에 쓰러지듯 누운 채, 카이젠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눈송이가 마치 죽은 나비 같다.

물론 카이젠도, 스스로의 죽음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검으로써, 전장에서 스러질지도 모른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핏줄에게 배신당해 죽게 될 줄은 몰랐지.’

카이젠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의 아버지가 바르톨로아 가주가 된 이래로, 일족은 유례없는 성세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아버지에게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숙부.’

카이젠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마족은 기본적으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그 기조는 바르톨로아 일족도 동일하다.

가장 강한 자가 가주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그의 아버지가 가주가 되기까지 온갖 고난이 존재했고.

카이젠은 아버지의 검으로써 적들을 모조리 분쇄했고, 마침내 오랜 정적이었던 숙부까지 무릎 꿇렸다.

아버지는 숙부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으나,

‘그래도 아버지의 유일한 동생이지 않습니까.’

카이젠은 자비를 베풀었고.

‘마, 맞아! 형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숙부는 카이젠이 건넨 자비를 덥석 움켜쥐었다.

‘……바닥을 기면서, 목숨만은 구명해 달라 빌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더 이상 추위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팔다리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아버지께서는 괜찮으실까.’

카이젠은 힘을 주어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하지만 시야는 여전히 흐리다.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버린다면…….

그런데 그때.

“너.”

누군가가 불쑥 카이젠을 불렀다.

이 끔찍한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미성이었다.

카이젠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뭐지.’

여자였다.

그 어떤 것도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시야 너머로, 분홍색 단발머리가 흩날리는 모습만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오랜 겨울을 버티고 견뎌서.

처음으로 피어나는 봄꽃의 빛깔이었다.

* * *

타탁, 타닥타닥-

가장 먼저 살아난 감각은 청각이었다.

‘이 소리는…….’

벽난로에서 불길이 타오르며 불똥이 튀는 소리였다.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묘하게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한참을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카이젠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카이젠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숙부의 계략에 빠져서 휘하의 병사를 모조리 잃었다.

피를 토하는 발악 끝에, 카이젠을 공격해 오는 병사들을 모조리 죽였지만.

그 대가로 카이젠 자신도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건.

겨울바람에 미친 듯이 흩날리던, 봄꽃 같던 분홍색 머리카락…….

“……윽.”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카이젠이,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눌러 삼켰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오두막이었다.

통나무를 층층이 쌓아 올려 만들었는지 벽에는 나무껍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기세 좋게 불길이 타오르는 벽난로와, 그 위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

식탁 겸용으로 사용하는 듯한 탁자가 하나 있었고, 의자는 두 개였다.

아무래도 탁자는 다리들이 서로 높이가 맞지 않는지, 종이를 접어서 괴어 두었다.

침대 또한 하나뿐이었는데…….

“음.”

순간 카이젠은 조금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하나 남은 침대를 자신이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의자 하나가 침대 옆에 바짝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를 밤새 간병이라도 해 준 것처럼.

“…….”

카이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때.

달칵.

오두막 문이 열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 한 명이 성큼성큼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품에는 마른 장작을 한가득 끌어안고 있었다.

‘저자는!’

순간 카이젠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상대에게로 달려들었다.

“읏!”

상대가 커다랗게 휘청거렸다.

툭, 투두둑!

그 서슬에, 장작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가느다란 목이 손안에 가득 잡혔다.

맥박이 거세게 뛰는 게 느껴졌다.

손아귀에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꺾어 버릴 수 있으리라.

“넌 누구지?”

카이젠이 경계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이름 모를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로브 아래의 입술이 잔뜩 비틀렸다.

날카로운 조소였다.

“우습네.”

카이젠은 상대가 머리 위로 눌러 쓴 로브 모자를 벗겨냈다.

동시에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인간?”

분홍색 단발이 차르르 쏟아져 내렸다.

연둣빛 눈동자가 불타오르는 증오를 담고 카이젠을 올려다보았다.

“곧 죽을 자식을 기껏 살려 줬더니, 그 은혜도 모르고 누구냐면서 협박이나 해 대는 꼴이라니.”

당장이라도 카이젠이 그녀의 목숨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자의 기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역시 마족다워. 감사를 표하면 주둥이가 찢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지.”

“…….”

카이젠은 드물게 당황했다.

“죽일 거라면 당장에 목을 꺾었어야지. 안 그래?”

날카롭게 쏘아붙인 여자가 당장 카이젠의 무릎을 걷어차 버렸다.

“윽!”

카이젠은 반사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 도대체?’

고통보다도 당황이 훨씬 더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이젠은 마계의 로열 블러드인 바르톨로아 일족의 직계였으니까.

이런 기품 없는 행동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왜? 천한 인간 나부랭이가, 귀하신 도련님을 걷어찰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나 보지?”

들으란 듯이 빈정거린 여자가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불길 안에 마른 장작을 몇 개 집어넣은 여자가 흘끗 뒤를 돌아본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뭐?”

“당신 옆구리에서 피 나는데.”

“…….”

동시에 카이젠의 이마 위로 깊은 주름이 잡혔다.

여자의 말을 듣자, 뒤늦게 다시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아무래도 간신히 틀어막아 둔 옆구리의 자상이 벌어진 것 같은데…….

여자가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왜, 죽어 나자빠지게 둘 것을 내가 억지로 살린 건가?”

“아, 아니…….”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목에 바람구멍 하나 정도는 내 줄 수 있는데.”

여자의 입담이 어찌나 사나운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멍한 얼굴이 된 카이젠을 향해 여자가 으르렁거렸다.

“사람 번거롭게 하지 말고, 침대로 가.”

“…….”

“아, 뒤지고 싶은 거면 당장 밖으로 기어나가고. 최대한 멀리 꺼져 줬으면 좋겠어. 시체 치우는 취미는 없으니까.”

여자가 까딱 턱짓으로 오두막 문을 가리켰다.

카이젠은 묵묵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성큼성큼 근처로 다가온 여자가, 협탁 위에 놓인 구급상자를 열었다.

붕대와 약을 꺼내 놓고는, 피로 얼룩진 카이젠의 웃옷을 돌아본다.

동시에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피는 잘 안 지는데. 빨래하려면 고생깨나 하겠군.”

“…….”

어째서일까.

어느새 카이젠은 슬그머니 여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옷 벗어.”

“……붕대 정도는 내가 감아도.”

“진짜 번거롭게 구네. 도련님들은 다 그래?”

“…….”

결국 카이젠은 웃옷을 벗었다.

카이젠 곁에 바짝 붙어 앉은 여자가,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다시 감아 주었다.

“큭.”

붕대를 어찌나 세게 잡아당기는지 날카로운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다.

그러나.

“엄살떨지 마.”

여자는 한심하다는 양 핀잔을 줄 따름이었다.

그러면서도 상처를 치료하는 손길만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 능숙한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젠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너, 이름이 뭐지?”

“글쎄? 더러운 마족 새끼한테 알려 줄 이름은 없는데.”

“…….”

카이젠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의 목소리며 태도에서 묻어나는 증오가 너무나도 선명했으므로.

어깨를 으쓱인 여자가 사르르 눈매를 접어 내렸다.

날 선 미소였다.

“물론 당신의 이름이 뭔지는 알아. 당신의 죽은 부하가 카이젠 님이라고 몇 번이나 불러 댔으니까.”

마지막으로 붕대를 매듭지은 후.

“다 됐어.”

몸을 일으킨 여자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착각하지 마. 네게 호의가 있어서 널 살린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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