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55)화 (156/163)

<163화>

“…….”

“나는…….”

무어라 말하려던 여자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고는 더 말을 섞기도 싫다는 것처럼 휙 돌아선다.

그 뒷모습이 기이하게 슬퍼 보여서.

“…….”

차마 카이젠은 여자에게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 * *

그렇게 기이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여자는 대체로 카이젠에게 적대적이었다.

“치료해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밥값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카이젠은 처음으로 설거지를 해 봤고,

우지끈!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성대하게 나무 식기들을 부러뜨려 버렸다.

여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누가 귀한 집 도련님 아니랄까 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네.”

“…….”

……내가 이렇게 무능했었나?

카이젠은 살면서 스스로의 능력을 처음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여자가 카이젠에게 핀잔을 주었다.

“가서 빨래라도 해. 빨래통에 빨래들 담가 놨으니까, 문지르기만 하면 돼.”

그래서 카이젠은 최선을 다해 빨래를 해 보았으나.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옷들을 이렇게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데?”

“…….”

그렇게 카이젠이 시시각각 스스로에 대한 불신을 쌓아 가는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여자는 카이젠을 구박할지언정 내쫓지는 않았고.

그녀의 보살핌 아래에서 카이젠은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비록 부상이 무척 심하기는 했으나, 여자는 부상자를 보살피는 데에 꽤나 능숙했고.

무엇보다도 바르톨로아 일족 특유의 가공할 회복력 덕이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여기에 혼자 살고 있는 거지?”

카이젠은 별생각 없이 질문을 던졌다.

사실 좀 이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눈앞의 여자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무 살 초반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린 여자가 이런 외딴곳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니.

평소처럼 핀잔, 혹은 무시로 일관할 줄 알았는데.

여자는 그 무엇과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

한참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여자가, 어둑한 시선으로 흘끗 카이젠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되묻는다.

“왜일까?”

카이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연둣빛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

뒤늦게야, 무언가 잘못 건드렸다는 자각이 들었다.

“왜 나는 혼자 살고 있을까?”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선문답하지 말고.”

카이젠이 미간을 좁히며 쏘아붙였다.

여자의 얼굴 위로 메마른 미소가 번졌다.

버석거리다 못해 먼지 냄새가 날 것 같은 미소였다.

그 후.

여자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가족들은 모두 죽었어. 정확히는 살해당했지.”

“……뭐?”

카이젠은 제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여자가 똑바로 그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너희 마족들에게.”

“그게…… 무슨 소리지?”

카이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무심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너희 마족들이 내가 살던 마을을 몰살시켰다고. 그래서 지금 나 혼자 따로 나와서 살고 있는 거야.”

“그, 그럴 리가.”

경악한 카이젠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느 날,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뇌리에 스쳐 지났다.

‘저 간악한 인간들이 우리 국경을 계속해서 침범하고 있다.’

아버지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가공할 머릿수로 어떻게든 우리의 땅을 호시탐탐 탐내는 그 모습이, 마치 바퀴벌레 같지 않느냐?’

고개 숙인 카이젠의 머리 위로, 아버지의 냉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니 네가 싹 쓸어 버리거라.’

‘명 받들겠습니다.’

단 한 번도 그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위대한 바르톨로아의 가주는 절대적으로 옳았으니까.

카이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모조리…… 군대라고 들었는데. 민간인은 없다고…….”

“군대?”

하.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것도 잠시.

신록을 닮은 녹색 눈동자 위로 확 불길이 일어났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여자가 손을 뻗어 카이젠의 멱살을 와락 틀어쥐었다.

“넌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

“내가, 내가!!”

여자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 빌어먹을 군인처럼 보여?!”

카이젠은 여자의 거친 손길에 마구 흔들리면서도, 망연하게 여자를 응시했다.

아니다.

눈앞의 여자는 그저, 덫을 놓거나 활을 쏘아서 작은 들짐승이나 잡을 줄 알았을 뿐.

체계적으로 군사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어!”

여자가 악에 받쳐서 고함을 질렀다.

“고작해야 조그맣게 밭이나 일구거나, 작은 짐승을 사냥해서 근근이 살아왔다고!”

“…….”

“그런 우리가, 너희 마족들을 어떻게 학살할 수 있다는 거야!!!”

카이젠의 눈동자에 거센 파문이 일었다.

동시에 여자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는……!”

스르륵.

카이젠의 멱살을 놓은 여자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치받는 감정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윽.”

여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켰다.

적어도, 자신의 우는 얼굴을 카이젠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흐윽, 흑…….”

가녀린 어깨가 쉴 새 없이 들썩였다.

하지만 카이젠은 차마 여자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위로, 혹은 변명.

자신에게는 그 어떤 것도 허락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카이젠이 힘겹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왜…… 너는 나를 살렸지?”

“…….”

커다랗게 숨을 삼킨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 고인 녹색 눈동자가 카이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너희 마족의 목을 하나라도 따고 싶었어.”

“…….”

“어차피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게라도 복수할 수만 있다면.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자의 눈빛이 조금 흐려졌다.

“막상 도착했더니, 마족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중이더라고?”

피에 절어 새빨간 설원.

어지러이 뒤얽히는 병장기들과 비명.

분수처럼 튀어 오르던 핏줄기.

그리고 그 피를 온몸에 맞으며, 맹수처럼 그 가운데에서 날뛰던 남자.

“너, 잘 싸우더라. 그 많은 병사들을 혼자 해치우다니. 좀 놀랐어.”

여자가 짧게 조소했다.

“어쨌거나 네가 죽었다면, 그대로 버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짜증 나게도 살아 있지 뭐야.”

엉망으로 쓰러진 마족의 시신 사이로, 남자가 홀로 누워 있었다.

공허한 푸른 눈동자가 여자를 올려다보았고.

그 순간 여자는 결정했다.

“너희 마족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

“…….”

“내 눈앞에서 죽어 가는 이를 내팽개친다면, 우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마족들과 뭐가 다른가 싶더라고. 그리고.”

커다랗게 심호흡을 한 여자가 재차 말을 내뱉었다.

“묻고 싶었어.”

“무엇을?”

“너희 마족들은 오로지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을 무시하고 경멸하지.”

천천히, 여자의 목소리에 기이한 열기가 서렸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옳다고 생각해?”

여자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약하다고, 신체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핍박 당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여자가 절박한 시선으로 카이젠을 응시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건…….”

“너는 딱 봐도 꽤 고위 마족 같았으니까, 내게 그 답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여자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너희 마족들에게 내 가족을, 친지를, 그리고 친구들까지…… 모두 잃었으니까.”

여자의 목소리에서는 더 이상 끓어오르는 증오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정말로 대답을 듣고 싶다는 절박함.

누구라도 이 불합리한 상황을 이해시켜 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그런 처절한 감정만이 느껴졌다.

“나, 이 정도는 물어볼 자격이 있잖아.”

“…….”

차마 여자의 눈을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카이젠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참을 간절하게 카이젠을 바라보던 여자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구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거였어.”

“…….”

“알았어.”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달칵.

오두막 문이 닫혔다.

카이젠은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 * *

그 후.

여자는 더 이상 카이젠에게 냉랭하게 굴지 않았다.

다만 그저 무심했다.

길을 걷다 발길에 채는 돌멩이, 혹은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들꽃.

그런 것들에게 일일이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언제 떠날 거야?”

“……그건.”

카이젠이 멈칫하며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몸은 다 회복된 것 같은데. 슬슬 네 가족들에게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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