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카이젠은 잠시 침묵했다.
그랬다.
그의 몸은 완전히 회복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카이젠이 차마 발길을 떼지 못했던 이유는.
첫째로는 저렇게 어리고 약한 여자를 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거니와.
둘째는…….
순간 푸른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아버지.’
위대한 바르톨로아의 가주.
바르톨로아를 유례없이 강력한 일족으로 만들어 주신 분.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옳은 선택만을 하신다고 믿었다.
아버지의 검으로써 활약하던 시절이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말을 들은 이래로.
‘존경하는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
‘저 여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리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미는 모든 반발을 억누르며, 카이젠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령이 옳다는 근거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여태까지 카이젠이 치러 왔던 수많은 전투의 의미가 사라지니까.
여태까지 카이젠에게 있어, 인간들은 그저 버러지였다.
마족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귀찮은 벌레들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저들은 벌레가 아니야.’
눈앞의 여자를 보면,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저들 또한 마족들과 같은 생명이었다.
울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아파하는, 같은 땅 위에서 발 딛고 살아가는 생명들.
다만 아주 조금, 마족들보다 신체적으로 연약할 뿐이다.
마족들은 그런 자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단순히 약하다는 이유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게 옳다는 이유로.
그러나.
‘우리가 인간들을 적대하는 건 온당한가?’
‘강한 자만이 모든 것을 움켜쥐고, 만인을 지배하는 게 정말로 옳은 일일까?’
‘약한 자를 보듬으며 함께 살아갈 수는 없을까?’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흘러나왔고.
그 결과는 짙은 회의감이었다.
그리하여 카이젠은, 아버지의 검으로써 살아왔던 제 평생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내렸던 수많은 명령들.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병사들을 움직였던 것.
비록 여태까지 카이젠이 베어 냈던 적들은 모두, 인간들의 군사들이었다.
하지만 카이젠이 보지 못했던 곳은 어떠한가?
그가 직접 가지 않고, 병사들만 대신 보냈던 곳은?
군대가 암약하고 있다는 보고 하나만으로, ‘쓸어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던 자신은?
그때의 카르젠은 과연 옳았나?
그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카이젠은…….
아버지를 예전과 같은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미안해.”
그리하여 카이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젠을 마주 보았다.
“네 말을 들은 후에야…… 처음으로 생각해 봤어.”
“무엇을?”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핍박당하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
순간 여자의 무심한 얼굴에 희미하게 실금이 갔다.
동시에 카이젠이 확고하게 말을 맺었다.
“그건 옳지 않아.”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
심지가 단단하게 자리 잡은 목소리였다.
여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한참 동안 가만히 카이젠을 응시했다.
그리고.
“내 이름.”
갑자기 뜬금없는 대답을 꺼냈다.
“아나이스야.”
“뭐?”
행여나 여자가 질책할까, 분노를 터뜨릴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카이젠이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한편 카이젠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아나이스는 오두막 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장작들 다 패 놓고 들어와. 저녁 먹게.”
“…….”
“늦지 마. 그러면 빵조각 하나 못 얻어먹을 줄 알아.”
그 말을 끝으로.
쾅!!
카이젠을 밖으로 내쫓은 아나이스가 그의 코앞에서 거세게 문을 닫아 버렸다.
“뭐야, 도대체…….”
카이젠이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론 저 여자가 다소 제멋대로인 구석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그런데 그때.
카이젠의 귀가 문 너머에서 들려온 아주 조그마한 소리를 잡아챘다.
“……흑.”
순간 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복잡한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던 카이젠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아마도 제가 우는 소리를 카이젠이 듣는 것은 바라지 않을 터.
그러니까.
‘오늘은 좀 넉넉하게 장작을 패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젠은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 * *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과 마족이란 그만큼 까마득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나이스를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카이젠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었다.
‘맞아, 그랬었지.’
카이젠은 품 안의 갓난아기를 꼭 끌어안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꼬물거리는 아기가 눈물겹도록 사랑스럽다.
그래, 눈앞의 이 여자처럼.
“아나이스.”
다정하게 부르자, 아나이스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카이젠.”
“자.”
카이젠은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아나이스의 품에 안겨 주었다.
말간 하늘색 눈동자는 카이젠에게서.
솜털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은 아나이스에게서 물려받은…….
그들의 사랑의 결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저, 정말로.”
언제나 당찼던 아나이스가 말을 더듬으며 카이젠에게 물었다.
“나 혼자 가야 해? 같이 갈 수는 없어?”
“알잖아, 아나이스.”
“하지만……!!”
아나이스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카이젠은.
아나이스가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 게, 못내 기꺼웠다.
“감동이네, 예전에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었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
아나이스는 펑펑 울고 있는 와중에도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카이젠은 피식 웃으며 아이와 아나이스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을 끌어안은 카이젠의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쉴 새 없이 피어올랐다.
혹시라도 아기가 혼자 남게 될 상황을 대비한 갖가지 보호 마법이었다.
“티티의 기억은 지워 둘 거야.”
카이젠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
부모로서, 자식이 자신을 잊는 상황을 어떻게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나이스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 위로 천천히 결기가 서렸다.
카이젠이 사랑해 마지않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알았어.”
그 순간.
카이젠이 아나이스를 와락 끌어당겼다.
화인을 찍듯, 창백한 이마 위로 입술을 찍어 누른다.
“사랑해, 아나이스.”
“……나도.”
아나이스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아나이스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화사하게 흩날리는 분홍색 단발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카이젠은 그 뒷모습을 오래오래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티티. 아나이스.”
카이젠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검날과 검집이 스치는 소리가 섬뜩하게 귓가를 쓸어내렸다.
“너희를 만날 수 있어서 내 인생은 충만했어.”
동시에 바르톨로아 가주의 직속 특수부대가 카이젠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다만 아버지, 바르톨로아 가주는 없었다.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소가주님.”
특수부대의 지휘관이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지휘관과 몇 번이나 합을 맞춰 인간들을 쓸어버렸으니까.
“인간과 정을 통하다니요. 가주님께서 아주 노하셨습니다.”
“…….”
다행히도 지휘관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타티아나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카이젠은 내심 안도했다.
지휘관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
“가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바르톨로아 가주는 하나뿐인 자식의 목숨을 거두는 일까지 남에게 맡겼다.
아마도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효율’ 때문이겠지.
위대하고 고매하신 가주께서는, 반항하는 아들을 직접 짓밟아 죽이는 비효율적인 일을 하느니.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리라.
“아버지께 전해 드려.”
그 비정함에 치를 떠는 대신.
카이젠은 지휘관을 향해 곧게 검을 겨누었다.
“내 삶에서 가장 잘한 일은…… 아나이스를 내 아내로 선택한 거야.”
“…….”
그런 카이젠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휘관이,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생포할 필요 없다. 죽여서라도 제압해라.”
“예!”
해일처럼 몰려드는 아버지의 병사들을 마주하며.
‘티티, 사랑하는 내 딸.’
카이젠은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과거의 편린을 떠올렸다.
기나긴 산고 끝에, 아나이스는 딸을 낳았다.
갓 태어나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딸아이를 품에 안은 채.
아나이스는 땀에 젖은 채로도 행복하게 웃었다.
그리고 카이젠은…….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고, 기나긴 산고를 무사히 견뎌 준 아내에게 고마웠다.
그런 카이젠을 바라보며 아나이스는 곤란한 듯 웃었다.
‘너는 나와 내 아내가 서로 사랑했다는 증거이자 결실이고.’
그때의 아나이스처럼, 카이젠은 희게 웃었다.
‘우리 삶의 기적이란다.’
맹수처럼 포효한 카이젠이 검을 움켜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달려 나가는 방향으로 붉은 길이 생겼다.
수많은 생명들이 불타오르는 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날뛴 끝에.
서걱!
마침내 카이젠의 몸에서 붉은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