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58)화 (159/163)

<166화>

* * *

누군가가 절박하게 나를 불렀다.

“……티.”

“…….”

“티티.”

그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흡사 깊은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채, 바깥의 부름을 듣는 것처럼.

“티티!!!”

그 순간.

나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루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가 간절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라키?”

나는 멍하니 라키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내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잠깐.”

찬물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차가워졌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바르톨로아 가주가 마왕이 되기 위해 펼쳐 둔 마법진이었다.

그 말은 즉.

라키어스는 마기가 넘실거리는 마법진에 들어와 있다는 소리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기절할 것처럼 놀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 아빠들 정도의 초월자에게도 무리가 될 환경인데, 어떻게 겁도 없이!

“제정신이야?!”

“티티.”

“무슨, 여벌 목숨이라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질겁하여 마구 말을 쏟아냈다.

라키어스의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앞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커다란 위험을 짊어졌는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라키어스가 차분하게 선언했다.

“나는 괜찮아.”

“뭐? 괜찮아? 괜찮기는 무슨……!”

재차 쏘아붙이던 내가 순간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라키어스는 정말로 평온해 보였으니까.

비록 붉은 시선은 오로지 나만을 절박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래도 그 얼굴에서는 고통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마기가 휘몰아치는 마법진 안에서 온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즉.

“라키, 너…….”

설마 초월자로 각성한 건가?

나는 두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그와 동시에, 라키어스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보다, 왜 나한테 화를 내지?”

“뭐? 그거야!”

“너도 그랬잖아.”

“…….”

나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너도, 나와 스승님을 두고 멋대로 모든 것을 짊어졌잖아.”

“……그건.”

“너는 항상 멋대로 희생하면서, 어째서…….”

라키어스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와락 날 끌어안는다.

“너도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라키.”

“그런데…… 나만 버려 두고, 네 마음대로 떠나 버리면…….”

언제나 강건했던 그 팔은, 지금.

치받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어떡하라고.”

라키어스가 날 끌어안은 양팔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티티.”

“…….”

“……정말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끝으로.

라키어스는 그대로 내 어깨 위에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감정이 넘쳐흘렀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나는 양팔로 라키어스를 마주 포옹했다.

“나도 네가, 정말로 보고 싶었어…….”

* * *

라키어스를 꽉 끌어안고 한참을 흐느낀 끝에.

타티아나는 몸을 일으켰다.

바르톨로아 일족은 감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한껏 몸을 낮추었다.

본능이 그들에게 속삭였다.

‘저분께 거역해서는 안 돼.’

지금 이 순간, 마왕이 온전히 각성했다.

그것도 여태껏 존재한 적 없었던 강대한 힘을 품고.

“타, 타티아나!”

그런데 그때.

바르톨로아 가주가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며 타티아나를 불렀다.

아직도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양.

오만방자한 태도였다.

“너도 알지 않느냐?”

“…….”

타티아나가 싸늘한 시선으로 바르톨로아 가주를 응시했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마기에 얽매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비참한 꼴이었음에도.

가주의 혀만큼은 매끄럽게 움직였다.

“너는 내 피를 물려받은 아이다. 내 아들이 네 아버지…….”

“그래서?”

타티아나가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가주는 헛숨을 삼켰다.

“큭.”

마치 마신을 직접 대면한 듯, 강렬한 공포와 경외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개미 새끼가 태산을 마주한다면 이런 압박감이 들지 않을까.

방금 전까지의 건방진 모습은 간데없이.

가주의 목소리가 절로 다급해졌다.

“바, 바르톨로아 일족의 영향력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응?”

“…….”

“우리 일족은 장차 네게 큰 도움이 될 게야. 나도 내 하나뿐인 손녀를 최대한 지원할 것이고…….”

가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절박하게 말을 쏟아내면서도, 가주 스스로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가주를, 더 나아가 바르톨로아 일족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리고…….”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가주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

“…….”

얼음 같은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 후.

“다 지껄였어?”

갸웃 고개를 기울인 타티아나가 입을 열었다.

“일단 하나 정정하고 싶네. 나에게는 이미 할아버지가 계셔.”

“타, 타티아나.”

“다만 그분은, 피붙이조차 이용하려 드는 저열한 작자가 아니라…….”

가을 하늘처럼 푸르른 하늘색 눈동자가, 멍한 얼굴의 바르톨로아 가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동시에 타티아나의 입술 위로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통렬한 조소였다.

“나를 그저 손녀로서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다정한 분이셔.”

“…….”

가주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티아나는 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바르톨로아의 율법은 단 하나뿐이지. 강한 자가 가문의 주인이 된다.”

“그, 그게 무슨…….”

“그리고 나는 이제 당신보다 강해.”

타티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선언했다.

“그러니 마땅히 내가 바르톨로아 일족의 새로운 가주가 되어야겠지.”

가주가 저도 모르게 바짝 어깨를 굳혔다.

그 태연한 목소리가, 바르톨로아 가주의 귀에는 흡사 사형 선고처럼 들렸으므로.

“다만.”

타티아나는 일견 부드럽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자리의 모든 마족들을 죽여 없애지는 않을 거야.”

……설마?

순간 가주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희망이 어렸다.

그래, 아무리 마신께서 선택하셨다 한들.

그 유약한 타티아나 아닌가.

평생 가족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으니, 어쩌면 제 피붙이에게는 최소한의 관용을 베풀어 줄지도 모른다.

“내 부모님은 사랑으로 나를 낳아 주셨고, 내게 새로이 생긴 세 아버지들은 나를 사랑으로 키워 주셨지.”

타티아나의 온화한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가주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가주 직위를 빼앗기는 건 뼈아프지만, 그래도 괜찮다.

살아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반격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은 누군가를 죽일 줄만 알지만, 나는 당신의 목숨을 거두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당신과 다르니까.”

정말로 나를 살려 주겠다는 건가?

가주의 얼굴에, 일말의 기대감이 서림과 동시에.

타티아나가 입술을 열었다.

“다만 당신은, 당신이 미천하다 주장했던 인간보다도 연약한 육신에 갇혀 살게 될 것이며.”

뭐라고?!

순간 바르톨로아 가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타티아나는, 가주가 가슴에 은밀하게 품고 있던 일말의 희망마저 짓밟고 있었으니까.

가주의 얼굴 위로 끔찍한 절망이 번졌다.

“오늘부터 내가 바르톨로아의 가주이고, 또한.”

그런 가주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타티아나는 냉엄하게 말을 맺었다.

“나는 바르톨로아 일족의 해체를 선언한다.”

그 순간.

실험실 곳곳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바르톨로아 일족들이, 대경실색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내, 내 힘이……!”

“내 마기가!”

바르톨로아 일족들을 마계의 영원한 2인자로 만들어 주었던, 순도 높은 마기.

그 마기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마왕의 권능을 이용하여 일족들의 마기를 모조리 회수한 것이다.

또한 그녀가 타인의 마기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마신이 타티아나를 자신의 온전한 대리자로 삼았음을 증명했다.

마기는 마신이 마족에게 내려 준 축복이었으며.

신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마기에 간섭할 수 없었으므로.

“안 돼! 안 돼애애!!”

“제발, 마왕이시여! 자비를……!!”

바르톨로아 일족들은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타티아나에게로 다가오려 했다.

타티아나는 무감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이제 바르톨로아 일족은, 그들이 그토록 무시하던 인간들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일족이 매번 앵무새처럼 되뇌던 그들의 규율은…….

‘오로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를 떠올린 타티아나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재주껏 살아남아 봐.”

여태껏 자신들이 부려 왔던 하급 마족들에게 잘 대해 주었다면, 그 마족들도 최소한의 인정은 베풀어 줄 것이고.

그러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터다.

다만 마계의 영원한 2인자랍시고 다른 마족들을 착취하며 군림하기만 했다면.

두 눈이 뒤집힌 휘하 마족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나가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그 생각을 끝으로.

타티아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이 미친 계집이, 이, 무슨 짓을……!!”

두 눈이 뒤집힌 옛 가주가 미친 듯이 타티아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제 생물학적 할아버지를 흘끗 곁눈질로 돌아볼 따름이었다.

퉁!!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옛 가주가 거세게 튕겨져 나간다.

쿠당탕!

옛 가주는 실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커억!!”

그의 입술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육신의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고통이 훨씬 더 컸다.

그는 평생을 바르톨로아 일족의 직계로, 소가주로, 그리고 수장으로 살아왔다.

신체에 타격을 받아서 느껴지는, 이런 일차원적이고도 하등한 통증은 단 한 번도 겪어 볼 일이 없었기에.

그가 느끼는 충격은 더더욱 컸다.

“어때?”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옛 가주를 향해, 타티아나가 우아하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일평생 네가 짓밟아 왔던 사람들이 어떤 기분일지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