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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마왕님은 용사 아빠들이 너무 귀찮아 (159)화 (160/163)

<167화>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한때 ‘바르톨로아 일족’으로 불렸던 마족들은, 멍한 얼굴로 자신들의 가주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가주는 전지전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주가 내리는 선택은 절대적으로 옳으며, 그를 따르는 것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 위대하던 가주는, 그들이 하등하다며 조롱하던 하급 마족보다도 못한 몰골로.

……바닥을 벌레처럼 기고 있지 않은가.

동시에 그들은 전율했다.

지금 이 순간.

여태까지 자신들이 누렸던 절대적인 지위가 영영 사라졌다는 사실을, 피부로 실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일별한 타티아나가 허공을 손가락으로 그어냈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거대한 균열이 형성됐다.

마침내.

균열 너머로 눈이 부시도록 새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르톨로아 본성과 다른 장소를 연결한 것이다.

그야말로 신에게나 가능할 압도적인 기적이었다.

“라키.”

타티아나가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불쑥 손을 내민다.

“돌아가자.”

“…….”

라키어스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제게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수려한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티티.”

라키어스가 힘을 주어 타티아나의 손을 맞잡았다.

“가자.”

두 사람은 나란히 푸른 하늘로 발을 내디뎠다.

* * *

수많은 마족들이 흡사 해일처럼 달려 들어왔다.

“공격하라-!”

“저 증오스러운 초월자들이 마계에 발을 딛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숫자.

하지만 그 숫자보다도 더욱 압도적인 건, 마족들이 품은 선명한 적의였다.

그 적의가 어찌나 강렬한지,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한편 그 마족들을 마주한 이들은 단 세 명뿐이었다.

“와, 이런 건 오랜만이네. 짜릿짜릿한데?”

대마법사, 키리오스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키리오스.”

밀려드는 마족들을 경계하며, 지크프리트가 핀잔을 주었다.

“타티아나를 한시라도 빨리 데리러 가야 한다는 것, 잊지는 않았겠지?”

“아, 누가 뭐래?”

키리오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비록 태도는 장난스러웠으나 녹색 눈동자만큼은 무척 진지했다.

“일단 우리 꼬마를 데리러 가려면…….”

키리오스가 양손에 마력을 모으며 정면을 쏘아보았다.

산을 가르고 바다를 뒤집을 거대한 마력이 한 점으로 모여든다.

“저 망할 자식들부터 쓸어 버려야겠지?”

“동감이다.”

지크프리트가 매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검 위로 날카로운 금빛 기운이 치솟아 올랐다.

“다들 상처 하나라도 났다가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요.”

앞서 나간 두 사람을 지원하기 위하여, 세자르가 신성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때 다섯 마왕을 토벌하여 인류를 구원했던 세 용사는, 다시 한번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타티아나.

그들의 소중한 딸을 위해서.

그런데 그때.

세 용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날 선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그거 뭐야?”

“느껴지죠?”

“그래.”

코앞에 짓쳐들어오는 거대한 마족의 군세를 두고서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다니.

전장에 선 사람들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러나 용사들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첫째로, 고작 저딴 마족들 앞에서 긴장하기에는 세 용사가 여태까지 거쳐 온 전투가 너무나도 많았다.

저 정도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금방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강제로…… 공간을 연결하고 있어.”

지금 그들의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야말로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으니까.

공간과 공간을 연결한다.

공간이동마법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은 오로지 신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

그 말은 즉.

저 너머로 건너오는 존재는, 최소 신에게 준하는 초월자라는 소리다.

쩌억-

동시에 하늘이 찢어졌다.

당장이라도 적을 찢어발기려 팽팽하게 살기를 부풀리던 전장에, 기적이 일어났다.

세 용사들에게로 짓쳐들어오던 마족들이 홀린 듯이 그 자리에 멈춰 선 것이다.

“……마왕이신가?”

“설마, 정말로 마왕께서?”

마족들 사이로 나직한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갈라진 균열 너머로 어둠침침한 지하실의 전경이 얼핏 드러났다.

그리고.

봄꽃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레이디와, 화사한 금발의 청년이 나란히 하늘 위로 발을 내딛는다.

“티티!”

“라키어스!”

세 용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들어찼다.

평지처럼 하늘을 디딘 타티아나가, 차분한 시선으로 발밑의 마족들을 내려다보았다.

“…….”

“…….”

이 자리의 마족들은, 아니, 인간을 뛰어넘은 세 초월자까지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이곳에, 진짜 마왕이 도래했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강한 존재만이 살아남는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절대복종해야만 한다.”

당장이라도 병장기를 맞부딪칠 전장에서 내뱉기에는, 다소 뜬금없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그 말을 마족의 본능이라며 신봉하지.”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말은 이 자리에 선 모두의 귀에 똑똑하게 틀어박혔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마신의 대리자이자 마족을 대표하는 마왕의 이름으로.”

타티아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가 본능이라 믿어 왔던 그 말이 거짓임을 선언한다.”

마족들이 두 눈을 크게 홉떴다.

그도 그럴 것이, 마왕의 저 선언은.

마계의 영원한 2인자, 고귀한 바르톨로아가 마신의 신탁을 잘못 해석했다고 못을 박는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타티아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마족들, 아니, 모든 생명들은.”

푸른 눈동자가 온기를 머금고, 제 발아래의 만인을 휘둘러보았다.

“강하고 약하고에 상관없이, 행복과 생존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증한다.”

“…….”

“…….”

그 순간.

다시 한번 기적이 일어났다.

마족들이 제각기 병장기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폭풍에 휘말린 바다가 순식간에 잠잠해지는 양.

그야말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마족들이 제 말을 따르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는 양,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 후.

타티아나는 흘끗 세 용사 쪽을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내내 무표정했던 타티아나의 얼굴 위로 희미한 두려움이 서렸다.

‘나는…… 마왕인데.’

세 용사들은 평생을 마족들과 싸워 왔지 않은가.

마왕인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물론 아빠들을 믿고는 있지만…….

그런데 그때.

“꼬마!”

“티티 양!”

“타티아나!!”

세 용사들이 목을 놓아 타티아나를 불렀다.

“뭐 해? 안 내려오고!”

“언제까지 하늘에 붙어 있을 거예요?!”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걱정과 애정이 가득 실린 고함.

타티아나의 아빠들은, 여전히 그녀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를…….

딸로서 사랑하고 있었다.

그 순간.

타티아나의 얼굴 위로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아빠들!!!”

여태까지의 오연함은 모조리 내던져 버린 채.

타티아나는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와락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 테니까!!”

타티아나가 휙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가자, 라키!”

“티티? 야, 너……!”

기겁한 라키어스가 타티아나의 팔을 꽉 붙들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라키어스를 이끌고는, 세 용사들의 품 안으로 유성처럼 떨어져 내린 것이다.

“어, 어…… 어?!”

“바, 받아요!”

“이런 미친!”

기절할 것처럼 놀란 세 용사가 황급히 두 사람을 받아 들었다.

“야, 꼬마! 너 진짜!!”

기겁한 키리오스가 언성을 높였다.

“위험하잖아요!”

뒤이어 세자르가 정색을 했고,

“타티아나,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

평소 침착했던 지크프리트마저 사색이 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타티아나와 라키어스는 물끄러미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녀왔어요.”

“다녀왔습니다, 스승님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를 건넨다.

침묵이 흘렀다.

“…….”

“…….”

“…….”

세 용사들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 사람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어휴, 둘 다 사람 속 썩이는 데 뭐 있어!!”

“걱정했다고요!!”

키리오스와 세자르가 입을 모아 두 사람을 구박했다.

“죄, 죄송……!”

“죄송한 것만으로 해결이 되면, 세상에 치안대는 왜 있고 법원은 왜 있나요?!”

딱!

기어코 라키어스는 세자르에게 꿀밤을 한 대 얻어맞았다.

울상이 된 라키어스가 제 스승들에게 항변했다.

“아야! 왜 때려요?!”

“때릴 만하니까 때렸죠!”

그 와중, 키리오스가 두 눈을 부릅뜨며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꼬마 너도 그래! 어딜 그 위험한 곳을……!”

“죄송해요!”

타티아나는 얼른 납작 엎드렸다.

한편, 네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고생 많았다.”

“…….”

순간 타티아나와 라키어스는 나란히 울컥한 얼굴이 되었다.

지크프리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서 와라.”

“네!”

너무나도 그리워하던 세 아빠들의 품 안에서.

타티아나는 울며 웃었다.

티끌 하나조차 없이 환한 미소였다.

-본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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