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화>
추후에 전해 듣기로, 가주는 힘을 잃자마자 그를 따르던 마족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고 했다.
여태까지 강대한 힘을 바탕으로, 마계를 공포로 다스리던 지배자였으니.
그 힘이 없어지자마자 모두가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뭐, 여러모로 끔찍한 죽음이기는 하지만.
동정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혈연이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 아빠들이,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가없는 애정.
그 애정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꼭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아도,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뭐라고 한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이었다.
때마침 키리오스가 불쑥 내게 물었다.
“꼬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키리오스와 지크프리트, 할아버지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제단에 서 있는 세자르까지도 이쪽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너무나도 벅차올라서.
내 아빠들과 할아버지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 준다는 사실이, 사무치도록 와 닿아서.
“그냥, 다 함께 같이 있을 수 있어서…….”
나는 밝게 웃었다.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내 대답에, 네 사람의 얼굴 위로도 천천히 미소가 번져 나갔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였다.
* * *
뒤이어 라키어스의 대관식이 이어졌다.
“여기 제국의 새로운 태양이자, 만민의 새로운 아버지가 될 필멸자가 섰습니다.”
대사제, 세자르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라키어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라키어스 카세르 엘 데카르트.”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대신전 안.
세자르의 차분한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그대는, 그대의 몸과 영혼을 다 바쳐 제국을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대의 존재보다 제국을 우선시할 것을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라키어스의 대답에는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런 제자를 뿌듯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세자르가, 성수 그릇에 손가락을 담갔다.
가슴 위로 성호를 그은 후.
고개 숙인 라키어스의 머리 위로 성수를 튕겨 떨어뜨린다.
“지금 이 순간부터, 빛의 신의 이름으로.”
세자르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대관식을 돕는 사제들이, 비단 쿠션 위에 보관을 받쳐 내밀었다.
세자르는 양손으로 황제의 보관을 경건하게 들어올렸다.
“라키어스 1황자가 데카르트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라키어스의 머리 위로 황제의 보관이 씌워졌다.
동시에 세자르가 선언했다.
“제국을 수호하는 신성한 의무가 부여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라키어스는 몸을 일으켰다.
오연한 붉은 눈동자가 대신전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새로운 황제가 처음으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황제가 새로이 즉위한 후.
대관식에서 처음으로 꺼내는 말은 여러 상징성을 가진다.
패도적인 황제는 야심을 뽐냈고, 황권을 중시하는 황제는 대놓고 귀족들을 견제하고는 했다.
그리고 라키어스의 입에서 처음으로 흘러나온 말은…….
“비록 부족하지만, 언제나 만인을 포용하려 노력하는 황제가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모두를 포용하겠노라는 약속이었다.
“또한 특별하게 감사를 표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키어스가 말을 덧붙였다.
보통은 이런 경우에는 선황, 그리고 대신들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붉은 시선은 우리 아빠들을 거쳐 내게로 머물렀다.
“저를 물심양면으로 돌봐 주신 세 스승님, 그리고 오를레앙 공녀가 제 곁에 있어 주었기에.”
오를레앙 공녀.
그 호칭을 쓴 이유는 명확하다.
라키어스는 나를 마왕이 아니라, 아빠들의 딸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
아빠들도, 나도.
모두 감회에 젖은 얼굴이 되었다.
과묵한 지크프리트는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 깐족거리기 좋아하던 키리오스마저 드물게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앗, 둘째 아빠는 조금 눈시울이 젖은 것도 같은데?!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윽고 라키어스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라키어스에게 환한 미소를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새로운 태양을 뵙습니다!”
“새로운 태양께 축복을!”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대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축하했다.
라키어스는 웃는 낯으로 그들의 축복을 받아들였다.
‘정말 다행이야.’
눈앞의 새 황제는 더는 지쳐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음 깊이 안도했다.
* * *
그 후.
라키어스는 곧장 집무실로 틀어박혔다.
보통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축하 파티가 이어지지만, 아무래도 제국 내외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으니까.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황제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네. 그렇지?”
나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는 라키어스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아, 라키를 놀려먹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티티 너 정말.”
라키어스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으나.
“왜, 뭐, 왜?”
나는 소파에 기대앉은 채,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빈둥거리는 사악함을 보였다.
“어때, 나 좀 악독한 마왕님 같지?”
“됐다, 됐어.”
라키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울린다.
그렇게 한참을 노닥거린 끝에.
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이만하면 많이 놀려먹은 것 같으니까…… 일을 좀 도와줘 볼까?’
대관식 첫날부터 야근하는 황제라니, 너무 불쌍하잖아.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라키어스 곁으로 다가갔다.
“라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
내 질문에, 그새 퀭한 얼굴이 된 라키어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카를로에 있을 때 자주 라키어스가 저러고 돌아다녔었는데.
그를 목격한 셋째 아빠가, 라키어스의 초췌한 모습이 꼴 보기 싫다면서.
입 안에 쓰디쓴 영양제를 욱여넣었고 말이야.
‘유령도 아니고, 꼴이 이게 뭔가요?’
그렇게 핀잔을 주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한데…….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추억에 빠져들었던 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가 라키어스, 야근을 넘어서서 밤을 꼴딱 새게 생겼다!
“국정 현안 같은 건 어렵더라도, 기본적인 서류 검토 같은 건 도와줄 수 있어.”
아무리 내가 라키어스와 친하다지만, 관리도 아닌 내가 국가 업무를 직접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단순한 계산 업무 같은 건 가능하지 않을까?
“고마워, 티티. 하지만 괜찮아. 이건 별로 중요한 서류도 아니고.”
라키어스가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든 나를 부려먹지 않겠다는 그 마음씨는 갸륵했으나…….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중요한 서류가 아니면 나한테 맡겨도 되잖아?”
이러다가 대관식 첫날에 과로로 쓰러지는 황제 폐하 되겠네!
라키어스의 손에서 서류를 휙 빼앗아 든 내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런 단순한 계산 서류까지도 네가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던 거야?”
“……아랫사람한테만 맡기기에는 좀 걸려서.”
으이구, 저 완벽주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문제는…….
‘계산기가 어디 있지?’
마도 계산기.
그 특허료만으로도, 매년 마탑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벌어다 주는 물건이자.
마법식 계산 속도를 눈부시게 발전시켜 준 마도구의 총아 말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내가 라키어스를 돌아보았다.
“라키, 계산기는 어디 있어?”
“아, 계산기? 여기 있어.”
라키어스가 무심결에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응?’
나는 서랍 구석에 놓인 내 손바닥만 한 상자를 발견했다.
동시에 내 눈이 휘둥그레 하게 커졌다.
‘어? 저거…….’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벨벳으로 마감한 반지 케이스로 보이는데?
“이,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동시에 라키어스가 질겁을 하며 책상 서랍을 닫아 버렸다.
쾅!
“…….”
“…….”
침묵이 흘렀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라키어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키, 아까 그거…….”
“아니야!!”
라키어스가 절박하게 외쳤다.
“반지 케이스 아니라고!!”
“…….”
라키어스를 빤히 바라보던 내가 불쑥 되물었다.
“나는 반지 케이스라고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
아무래도 허를 찔렸나 보다.
라키어스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