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안 돼요. 오빠.>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다음 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내 심정과 달리 세상은 어제와 변함이 없었다.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가까스로 입사한 회사는 대기업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고 중소기업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큰 어중간한 회사였다.
4년을 만났다.
정말 뜨겁게 사랑했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랬나 보다.
업무 시간에 메신저는 해도 전화는 하지 않던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온 건 출근해서 이것저것 정리를 끝내고 막 업무를 시작했을 무렵의 어제 오전이다.
드드드드드―.
책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평소와 달리 섬뜩하게 느껴졌던 건 어떤 예감이었을까?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고 비상구로 달려가 휴대폰 화면을 오른쪽으로 밀어 통화를 수락했다.
“어, 수진아. 무슨 일……?”
[헤어져.]
“…이야? 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왜……?”
[헤어지자.]
“갑자기?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불과 저번 주말 저녁에만 해도 나랑 만나서 영화 보고 너희 집 앞에서 키스도 했는데?”
[오빠. 나 진지해. 어제 소개팅했는데, 내겐 다시 못 올 기회라고 생각해.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뭐? 뭐라고!”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그때, 차라리 소리를 질렀어야 했다.
빌어처먹을.
진짜 혈액형은 B형인데도, 소심한 트리플 A 형의 성격은 거기서 또,
“아, 아니. 내가 소리를 지른 게 아니라…….”
[아, 몰라! 헤어져! 연락하지 마! 최악이야!]
병신 같은 변명을 하고 기어이 차였다. 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암 걸리는 느낌이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난 진짜로 암에 걸렸다.
일방적인 아니, 엽기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뇌가 익어버리는 기분과 함께 눈앞이 흐려지더니 쓰러졌는데,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정신을 차린 내게 의사가 한 말은 위에 종양이 있단다. 그것도 완전 큰 놈으로다가.
치료하면 살 수 있냐고 물으니, 답이 없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나는 내가 B형인 걸 자각했다. 의사의 멱살을 잡고 개땡깡을 부리는 나를 보면서.
요즘은 혈액형이 아니라, MBTI이라고? 그딴 게 알게 뭐냐!! 당장 몇 개월 못 살고 뒈지게 생겼는데!!
당신이라면 그 순간 무엇을 했겠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에서 제시한 5단계(DABDA)를 재현하고 있을까?
나는 그날 바로 충분한 진통제를 처방받고 퇴원했다.
그길로 회사로 가서 사표를 제출했다. 사정을 들어서 안 건지, 아니면 회사 소속의 병원이라서 소식을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회사에서는 내 사표에 별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수료해줬다. 퇴직금도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입금해주겠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정말 세상 좆 같은 게 뭔지 아나?
그렇게 만신창이가 돼서 퇴원한 다음 날.
독한 술을 마시고 소파에서 널브러져 자다가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켜놓은 TV 소리에. 짜증을 내면서 리모컨을 찾는데, 마침 TV에서는 로또 추첨 방송이 나온다. 추첨 전에 복권 기금이 어디에 쓰였는지를 남자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에 따라서 보여준다.
그에 나도 모르게, 무조건 반사처럼 TV로 시선을 집중하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자조적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두 손으로 뺨이 뜨겁게 거칠게 비비면서 리모컨을 찾는데, 귀에 익숙한 숫자들이 들려온다.
― 첫 번째 당첨 볼입니다. 파란색 볼 17번입니다. 두 번째 당첨 볼 노란색 볼 16번입니다. 세 번째 당첨 볼입니다. 노란색 볼 9번, 9번입니다. 네 번째 당첨 볼 노란색 볼 7번입니다. 다섯 번째 당첨 볼 노란색 볼 2번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당첨 볼은 회색 볼 31번입니다. 2등 보너스 볼은 몇 번입니까?
남자 아나운서가 여자 아나운서에게 말을 넘겨서 보너스 볼이 나오는데, 나는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나온 번호들이 마치 환상과 꿈처럼 뒤죽박죽이다.
7, 17, 2, 31, 9, 16.
내 생일인 7월 17일.
여자 친구‘였던’ 수진이의 생일 2월 31일.
그리고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인 9월 16일.
난 이 숫자로 매주 로또를 사 왔다. 4년 동안 거의 매주.
지금 로또 1등 당첨 번호가 2, 7, 9, 16, 17, 31이라고 나오는 걸 보면 아마도,
“1등인가?”
다시 봐도 1등이다.
노란색 볼 6번. 파란색 볼 18번. 2등 보너스 볼 노란색 볼 3번입니다.
“허허. 허허허. 흐흐흐흐흑.”
1등 따위 되면 뭐 하냐고. 얼마 못 살고 뒈질 텐데. 이게 무슨 거지 같은 행운이냐. 누가 이따위 행운을 원했나?
그렇게 허탈하고, 화도 나고, 황당하기도 해서 울다가 문득,
“건물주는 되겠네. 크크크큭. 뒈지기 전에 꿈은 이루려나? 크크크큭. 아, 인생 진짜 좆같다!”
그리고 TV를 향해 리모컨을 던지…지는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말 내내 자다 깨다가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서―이때 또 한 번 자괴감에 휩싸였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골방에서 완전 병신처럼 죽어가야 하나?
깨달음인지 주제 파악인지 아니면 현실을 직시한 건지 모를 그 생각이 들고 나서 문득 내가 사는 집을 둘러봤다.
주상복합 아파트라는 말에 혹해서 무리하게 이 집을 마련한다고 좋은 옷도 못 입고, 맛있는 것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보너스라도 받으면 여자 친구의 선물을 사주느라 바빴고.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라면이었다.
그러니 위가 남아나겠냐고. 암이 안 걸렸으면, 구멍이 났을지도 모르지.
“좋아! 이제부터 빌어먹을 욜로(YOLO)다!”
일요일 저녁.
무턱대고 백화점부터 찾았다. 평소라면 어깨가 잔뜩 위축돼서 눈길조차 주지 못하던 명품 매장을 들어가서 옷을 사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특별할 것 없는 운동화가 백만 원이 넘는 것에 놀라긴 했지만, 두 개나 사서 하나는 신고 나왔다. 이제 환불도 못한다.
그리고 청담동으로 택시를 타고 가서 유명한 미용실에도 들렀다. 주말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여기가 그런 건지 손님이 많다. 괜히 등줄기에 땀이 나고, 긴장이 된다. 빌어먹을 소심함이라니.
그런데 굉장히 귀여운 상의 여자가 다가온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편해 보이는 소파에 앉아서 기내식이 떠오르는 샌드위치와 차를 받아 든 채로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가격표가 나와 있었고.
대략 30만 원에서 50만 원까지의 가격표. 디자이너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것도 놀라운 데, 머리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이 이 정도라니.
“해주세요.”
50만 원에 체크를 하고 사인을 하자 조금은 놀란 표정이 된 직원이 다시 웃으면서,
“알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다시 고오급 미용실을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돈 쓰는 재미가 있는데?”
암을 재배하고 있는 시한부 삶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긴장과 환희의 연속이었기에 피곤했던 몸을 소파에 누이고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을 때는 벌써 아침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침이었다. 중요한 건 어제가 일요일이었다는 것이다. 즉, 오늘은 월요일 아침이라는 거다.
항상 샀던 로또 번호를 재차 확인한 게 아침이다. 언제나 당첨되면 무엇을 하겠다고 꿈꿔왔던 대로 로또 뒷면에 이름과 주민 번호와 핸드폰 번호까지 볼펜으로 쓰고 로또를 안전하게 지갑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생각보다 로또를 지급 받는 과정은 별 문제가 없었다. 외려 담당자가 금융 관련 상담을 하는 걸 거절하는 게 더 힘들었달까?
이번에 로또 1등 당첨자는 나를 포함해서 총 3명.
1등 배당금은 약 200억. 세금을 제하기 전에 1등 당첨금은 약 67억. 여기에 세금 33%와 재산세 3%를 제외하고 받은 돈이 42억이 조금 넘었다.
“진짜 빡세게 개욜로다!”
그날 난 난생처음 돈을 ‘물처럼’ 써봤다.
* * *
빌어먹을 흑역사. 이 생뚱맞은 기억력이라는 놈은 거기서 왜 그걸 기억해내서. 아오!!
“그러네. 로또가 있었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른 흑역사를 지우고 싶은 마음에 부산스럽게 서두르며 지갑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지친 몸으로 퇴근하고 대충 벗어놓은 정장 상의 안주머니에서 찾은 지갑 속에는 평소와 같이 한 장의 로또 용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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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7, 9, 16, 1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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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뭐가 전 여자친구의 생일이고, 뭐가 만난 날인지도 헷갈리지만, 확실한 건 이 번호는 당첨이 되는 번호라는 거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어차피 뒈질 건데.”
로또 용지를 다시 지갑에 쑤셔 넣고 아까 하던 고민을 마저 이어나갔다.
기껏 회귀까지 해놓고 왜 죽으려고 하느냐고?
이제 제대로 된 설명이라도 해달라고?
좋다. 간략하게나마 앞으로 벌어질 일을 설명해주지. 그럼 당신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거다.
지구는 멸망한다.
애초에 목적은 인류의 멸족이지만, 그 여파가 지구에도 미치니, 지구가 멸망하는 게 맞다.
몇 달 뒤.
인간의 눈앞에는 게임에서나 볼 법한 메시지가 떠오른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인간이 워낙 X 같아서 지구의 의지가 인류의 멸족을 결정했다는 듯한 내용이다.
그렇겠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구 입장에서는 인간이 정말 X 같았을 거다.
지구는 일종의 집주인이나 건물주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그 집을 전세로 얻은 사람이고. 그런데 세입자가 집을 손보는 것을 넘어 자기 편하자고 집을 무너뜨리고 온갖 오물을 뿜어내며 더럽게 쓰면?
집주인 입장에서 빡치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당장 나가! 그런데 나가라고 경고를 보냈는데 세입자가 안 나가면? 강제력을 동원하겠지?
지구의 입장에서 그 강제력이 바로 멸망이다.
인류를 식료품처럼 다루는 종족.
인류의 시체를 탐하는 종족.
그리고 그저 파괴만 일삼는 종족.
세 종족의 침공에 인간이 자랑하는 과학이라는 힘 아래 마음껏 누리던 인간의 자유와 윤택한 삶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최첨단을 달리며 5차 혁명이 어쩌고 하던 시대에서 순식간에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을 위협하는 기괴한 괴물들과 함께.
“그러니까 그 더러운 꼴을 다시 보려고 하지 말고 깔끔하게 죽자.”
괜히 로또 용지를 보고 있으면 미련이 생겨서 욜로네 어쩌네 하면서 살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 또 후회할 거고.
“좋아.”
그리고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뛰어내리자.”
난 내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방법으로 ‘추락사’를 선택했다. 깔끔하고 한 방에 뒈지는 방법으로.
“좋아. 망설일 거 뭐 있어. 시간 끌면 괜히 미련만 생겨.”
마침 부모님의 사고 보상금과 유산으로 마련한 이 아파트는 상당히 높은 건물이다.
“옥상 문이 열려 있던가? 여기서 자살하면 집값이 떨어지려나?”
그게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몇 개월 뒤에는 세상이 망하는데. 피식 마른 웃음을 흘리고 대충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몇 가지 준비를 했다.
쉽게 말하면 유서 같은 걸 작성했다. 이 집과 내 번화와 주민등록 번호가 적힌 로또 당첨금은 평소 후원하던 몇몇 보육원에 같은 비율로 나눠 기부한다는 내용이다. 솔직히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종말 전까지라도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뭐. 어차피 다 끝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옥상으로 가려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오빠?”
웬 여고생이 우리 집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다.
“…누구?”
회귀하고 여자친구 목소리를 잊은 것처럼, 지금 이 시기에 내가 만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인가 싶어 물었는데, 대답은 안 하고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무섭게.
“오빠.”
“어? 어. 그래. 학생.”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가 아는 사이였나?”
“치. 잊어버렸구나. 다시 만나면 먼저 인사해달라고 했잖아요.”
응? 저건 어디선가 들은 것처럼 익숙한 내용이긴 하다. 뇌를 간지럽히는 것처럼 기억이 날 듯 말 듯 아련한.
“내가 분명히 기억해달라고 했잖아요. 저를요.”
“어?! 너!”
그 꼬맹이다. 내가 강제로 식물인간이 된 후, 쉘터의 보호막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 토템으로 누워서 숨만 쉬던 시절,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10년을 넘게 지켜 준 아이.
얼굴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유다연?!”
이름과 목소리만은 잊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 되는 고마운 아이이며,
“촌장 오빠.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미친!!”
무엇보다 내가 회귀할 거라고 단언했으며, 이제는 자신 역시도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신비한 아이가 내 앞에서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서 있었다.
“어, 어! 그래! 일단 들어와!”
자살하려던 사람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유다연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냉장고를 뒤져 이제는 헤어진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비싸기만 하고 맛은 별반 차이도 없는 스타벅스에서 나온 병 커피를 꺼내서 내놨다.
“어쩐 일……. 아니. 아니지. 일단 반갑다?”
“저도요. 다시 보니까 너무 좋아요. 오빠.”
낑낑거리며 열심히 커피의 뚜껑을 열려고 노력하다가 간신히 성공하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에서 한치의 걱정이나 근심도 보이지 않았다. 염세적이지도 않고.
“그럼 다시 만나서 이런 말을 꺼내서 미안한데. 무슨 일이야?”
“안 돼요. 오빠.”
“뭐?”
“안 돼요.”
해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지만, 난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동시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