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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 나만+장르가 이상하다-17화 (17/183)

17화

<숲을 지키는 엘븐나이츠의 수장, 정령왕의 친우, 세계수를 모시는 신녀>

『차원 방랑자를 선택하시는 데 참고가 될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그런 게 있어? 당연히 좋지.”

『차원 방랑자는 충성 스탯이 Max인 상태로 소환된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차원 방랑자는 영지민이 아니라, 가신(家臣)에 속하게 돼요. 영주 직속 관리 계층이라는 거죠.』

“그래서?”

『영지에 충성 스탯이 Max인 가신이 존재하면 숨겨진 상호작용이 해금됩니다.』

“상호작용?”

[영지 관리]에는 딱히 그런 게 없는데? ‘숨겨진’이라는 수식어가 그래서 붙은 건가?

『네. 충성 스탯 Max인 가신의 기술과 능력을 사사(師事) 받으실 수 있어요.』

“사사? 그거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잖아?”

『그렇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전투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난 태생이 근접 전투 클래스와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검이나 창을 들고 돌진하는 올리비아 같은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다.

‘아니, 잠깐만. 애초에 올리비아가 모시는 지구의 의지는 비술(祕術)이잖아? 그렇다면 마법사 같은 클래스가 개화됐을 건데? 도대체 왜 창을 들고 뛰쳐나간 거야? 그것도 정장을 입고서.’

올리비아의 이상한 취향에 대해서는 일단 차치하고, 나는 근접 캐릭터와 적성이 맞지 않다는 게 중요하다. 하다못해 게임을 해도 난 원거리 딜러 같은 걸 했으니까.

막 서로 숨결을 느낄 정도로 바짝 붙어서 검을 들이밀고, 땀 냄새를 서로 풍기면서, 근육 불끈불끈! 이런 거 내 취향이 전혀 아니다.

안전한 곳에서, 적이 다가오기 전에, 대가리가 보이는 순간 숨통을 끊어놓는 스타일. 이게 내 취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건 뭐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네.”

세 가지 선택지는 내게 아주 조금의 선택 장애도 주지 못했다. 단 하나만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엘리아나. 엘리아나로 선택할게.”

『하이엘프 엘리아나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어, 맞아.”

『숲을 지키는 엘븐나이츠의 수장, 정령왕의 친우, 세계수를 모시는 신녀, 하이 엘프 엘리아나를 소환합니다.』

우웅―. 우웅―.

시스템의 목소리에 맞춰 빼곡히 음각된 문양과 동심원들이 선명한 빛을 내뿜고 농밀하고 진한 마력이 모여들었다.

『엘리아나를 가신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약간의 충격에 주의하십시오.』

“어? 뭐?”

순간 시야가 암전된다. 눈을 감지 않았음에도 까맣게 변한 세상을 인지한 순간 하늘을 관통할 것 같은 커다란 나무가 보이는 곳에 난 서 있었다.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구의 의지를 직시했을 때처럼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는 나무였다.

그 나무를 중심으로 일정한 반경의 숲을 제외한 모든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엘리니아. 신의 계시를 받는 성녀시여. 어머니의 나무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요?”

뒷모습만 보이는 여인을 향해 수많은 엘프들이 ‘엘리니아’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런 동족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거대한 나무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엘리니아!”

“조용히.”

족히 천은 넘어 보이는 엘프들이 하나의 엘프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나는 어쩐지 불편했다. 마치 회귀 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어머니께서는 이 멸망을 막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아……!”

“흑!”

엘프들이 운다. 고구마를 백 개는 목구멍에 처넣은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온다. 지금 상황에서 쳐울게 아니라, 당장 활과 검을 들고 나가서 한놈이라도 죽여야지.

“그러니 우리는 끝까지 싸웁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준 어머니께 보답하는 길이 그것뿐이니.”

“흑!”

다시 울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순간,

쿠우웅―!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멀쩡하던 숲이 흔들린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그때가 돼서야 울던 미남, 미녀들이 사태를 인지했는지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킨다.

화면을 빨리 감는 것처럼 주변이 빠르게 변하더니, 어느 순간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정도만 멀쩡한 상태가 되었다. 천여 명이 넘던 엘프로 보이는 이들도 백을 채우지 못하는 수만 남았다.

그 백이 안 되는 생존자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앞서 거대한 나무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던 그 엘프였다. 온몸에 어두운 녹색 피와 먼지가 범벅이 되어 본래라면 화려했을 금빛 갑옷조차 고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여인, 엘리아나라고 엘프들에게 불렸던 여인의 얼굴에는 녹색 피딱지와 함께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엘리니아 님.”

“우린 패했습니다.”

“…….”

아까와 달리 우는 엘프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얼굴도 아니다. 그저 숨길 수 없는 분노를 품고 참아내는 게 전부다.

“비록 우리는 이렇게 사라지겠지만, 다행히 어머니께서 아이들은 보살펴 주신다고 하셨어요.”

“…아!”

다행이라는 듯이 절망 속에 피어난 일말의 희망이 조각 같은 엘프들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마기스테르. 대스승이라고 불리는 당신은 아이들과 함께 하세요. 나머지는 이곳에서 나와 함께 적의 눈을 돌리고, 끝을 함께합니다.”

“…….”

풀잎을 닮은 초록색 머리카락에 괴물의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중년의 남자는 엘리니아의 말에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

“성녀께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장인 종족이라는 드워프는 사멸했고, 용족도 결국 끝났습니다. 대륙의 주인을 자처하던 인간은 죽거나 배신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우리 엘프뿐입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었던 건 엘프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

“어머니 나무와 소통하고 그 힘을 사용하는 성녀,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남으셔야죠.”

“맞아요. 엘리니아 님. 우리 아이들을 부탁해요.”

“그래도 엘븐나이츠로서 마지막 전장은 의미가 있겠네요. 미래를 위한 죽음이라니. 영광입니다. 엘리니아 님.”

“하지만……!”

쿠웅―!

전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굉음에 둘의 언쟁은 강제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곱 밖에 남지 않은 엘프들 사이로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절절한 기색이 흘르고 있었다.

“마기스테르. 성녀로서 내리는 명령이에요.”

“엘리아나 님.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미기스테르라고 불린 엘프는 그 즉시 숲 외곽이자, 굉음이 들리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나의 소중한 아이들이여.]

누가 잡아챈 것처럼 공중에 매달린 모양으로 몸을 날리던 자세 그대로 멈춰선 마기스테르를 비롯한 엘프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엘프와 거대한 나무는 갑자기 등장한 기이한 틈으로 사라졌다.

[여기까지입니다. 잘 보셨나요? 차원의 희망이 되신 분이시여.]

4D 영화보다 더 리얼한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멈춰버린 장면을 배경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장난스러우면서도 신성한 느낌의 목소리가.

[내 아이를 선택해주셔서 고마워요. 불쌍한 아이들이지만, 불행을 부르는 아이들은 아니랍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지만, 그래도 선하고 순수한 아이들이랍니다. 내 아이와 함께하는 당신의 차원은 부디 우리의 과거와 다르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도적인 존재감. 만약 말을 건 존재가 악의적이었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오만했다면 내 영혼이 한 줌의 먼지가 되었을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건 저의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소소한 뇌물이에요. 다행히 새로운 희망이신 당신에게 속한 땅에는 생명력 넘치는 아이들이 있어서 전할 수 있네요. 잘 키워주세요.]

스팟―!

마치 꿈을 꾼 것처럼 그 영화 같은 장면과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찬연한 빛으로 빛나는 바닥의 여러 문양들 사이로 여성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과 손에 내 손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묘목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내가 묘목을 직시하는 순간, 김춘추의 시 「꽃」의 한 구절처럼, 그동안 아무런 느낌이 없던 묘목에서 신령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흘러나왔고,

“아아.”

허공에 떠 있던 엘프의 눈이 번쩍 떠지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의 묘목.”

그리고 곧 내 손에 들린 묘목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음식 사진을 발견한 것처럼.

“아! 죄송합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주인…?”

“네. 저는 세계수를 모시는 사제, 하이 엘프(High Elf) 엘리아나라고 합니다. 주인님.”

허리를 숙여 다소곳이 인사하는 여인. 엘리아나를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고결함’이 적당할 것 같다. 무기도 들고 있지 않고, 녹색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고귀함과 성스러움은 조금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

“주인님은 좀 그렇고, 영주 님이라는 호칭이 어떨까 한데?”

이상하다. 내가 원래 삼강오륜스러운 남자라서 함부로 말을 놓거나 그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엘리아나와 마주하면서 나눈 대화에 나도 모르게 말이 편하게 나온다. 마치 알고 지낸 것처럼?

“알겠습니다. 영주 님.”

“아, 말 편하게 하는 건 괜찮아?”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불편하다고 하면? 상호 존대하는 거지 뭐.

“당연합니다. 영주 님.”

“내가 본 그 마지막 날 이후,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건가?”

“네…….”

“그럼 전투의 피로도 안 풀렸겠네? 좀 씻고 쉰 후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지?”

“배려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묘목 먼저 심을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이거?”

내 손에 들려 있음에도 금방이라도 벗어날 것 같은 느낌을 조금 전부터 풍기고 있는 묘목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네. 어디 심어야 할지 알 것만 같아서 말입니다. 안……. 될까요?”

“그건 아니지만. 혹시 멀어?”

성소를 확인하고 이후에 확인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쉴 곳도 마련해야 한다.

“아닙니다. 가까운 곳입니다. 이 영지의 중앙. 그곳에 모시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그래? 나가자.”

영지의 중앙이라면 내성이 있는 곳이고, 이 성소도 내성 안에 건설했으니,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성소를 나서자마자 묘목을 받은 엘리아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아직 아무것도 지어지지 않은 공터 중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것처럼 두 무릎을 꿇고 흙바닥을 파내지도 않고 그저 묘목을 올려놓았을 뿐인데,

드드드드드드드―!!

지진으로 착각할 정도로 땅이 흔들리더니 지구에서 어지간히 크다고 알려진 나무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다랗고 굵은 나무로 자라났다.

‘분명히 저거 묘목이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더 놀라운 건 마치 처음 영지를 소환했을 때처럼, 나무가 자란 땅의 1.5배의 땅이 저절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내성이 더 넓어지면, 내성벽이나 외성벽의 일부가 문제가 생겼을 법도 한데, 원래 그런 것처럼 넓어진 것만큼 성벽이 늘어나면서 본래 모습을 유지했다.

무엇보다,

“뭐야? 이거?”

[영주]이기 때문에 감지할 수 있는 영지 전체의 공기가 달라진 느낌은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즉각적인 변화였다.

『영지 안에 세계수가 자리 잡았습니다.』

『세계수의 축복이 적용됩니다.』

『영지의 모든 생산율이 50% 상승합니다.』

『영지의 모든 성장률이 25% 상승합니다.』

『세계수의 랭크(Yellow)보다 낮은 등급의 오염이 영지 안에서는 상시·자동 정화됩니다.』

다행히 내가 인지한 변화가 착각이 아니라는 걸 시스템이 증명해줬다.

다만……,

『세계수의 성녀를 가신으로 삼으셨습니다.』

『세계수가 영지 내에 존재합니다.』

『병영에서 특수 병과 「파수꾼」과 「레인저」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기사단 숙소] 개방 이후, 특수 병과 기사단, 세계수의 수호자 「엘븐나이츠」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봐. 이것들아. 여기를 무슨 노아의 방주로 만들 셈이냐?!”

이건 너무 과한 전력이다.

『아포칼립스에 나만 장르가 이상하다?』

심행 퓨전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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